28.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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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비밀
2023.06.03.
“이수야! 너 어제 왜 전화 안 했어?”
“너무 피곤해서 바로 잤어. 오늘 어차피 볼 건데 뭐.”
애라는 강의 시작 전부터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이수에게 물어보고 확인할 것들이 많았다.
“어젠 어떻게 된 거야? 너 지호랑 진짜 뭐 있는 거 맞지?”
“얘기가 좀 길어. 우리 오전 수업 다 끝나고 얘기하자. 중간에 끊기면 더 궁금하잖아.”
“오오! 진짜 뭐가 있긴 있나 보네.”
아침 9시부터 인체 생물학과 의학 생화학 수업이 4시간 연달아 이어졌다.
정신적으로 너덜너덜해진 학생들이 점심시간이 되자 우르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이수야, 우리 점심 맛있는 거 먹자. 오늘 내가 사줄게.”
“갑자기 왜?”
“생물학 노트 빌려준 거 내가 밥 사준다고 했잖아. 그거 오늘 사려고.”
“좋아.”
“흥미진진한 얘기 들을 땐 입도 즐거워야지. 빨리 나가자.”
애라는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이수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학교 앞에서 가장 분위기 좋고 맛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직원이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아서 알리오올리오 파스타와 고르곤졸라 피자를 주문했다.
“자, 이제 시작해봐. 난 들을 준비 됐어.”
애라는 두 팔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리고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
“애라야, 나…….”
이수는 무슨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입으로 누군가에게 말해본 적은 처음이라 괜스레 간지럽고 오글거리기까지 했다.
입 안에 맴도는 말을 뱉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지호랑 만나기로 했어.”
“캬아악!”
본론부터 말한 이수의 말에 애라는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이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깜작이야! 갑자기 소리는 왜 질러?”
“내가 지금 소리 안 지르게 생겼어? 와 이게 무슨 일이야? 으으윽! 너무 신기해! 네가 지호 여친이라니!”
애라의 큰 눈이 쏟아질 것처럼 더 커졌다.
눈을 여러 번 깜빡거리며 흥분을 감추지 않고 종알거렸다.
“나도 아직 얼떨떨해.”
“거봐. 내가 뭐랬어! 내 직감이 다 맞았지? 처음부터 이상했다니까.”
이수는 쑥스러운 듯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한다. 친구야! 드디어 네가 연애를. 그것도 무려 서지호랑. 호호호.”
애라는 자기 일인 것처럼 기뻐하며 크게 웃었다.
“고마워. 근데 당분간 너만 알고 있어.”
“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걸 왜 나만 알아? 온 세상에 퍼트려야지. 서지호가 내 남자다. 외쳐야지!”
“조용히 만날 거야. 너한테만 말하는 거니까 모른 척해줘.”
“아니, 그러니까 왜?”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애라가 물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뻔하잖아. 이거 소문나 봐. 어휴, 생각만 해도 싫어.”
이수는 몸서리를 치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능하다면 끝까지 그러고 싶었다.
애라만 아는 걸로 충분했다.
“야,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니? 뭘 그런 걸 신경 써?”
“너도 알잖아. 나 애들 입에 오르내리는 거 딱 질색인 거.”
“나는 아는데. 지호는 뭐래? 걔도 그렇게 한대?”
애라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뒤섞였다.
“내가 부탁했어.”
“에휴. 다른 여자였으면 좋아서 난리가 났을 텐데. 그걸 비밀로 하자고 했으니 지호가 진짜 황당했겠다.”
“어쩔 수 없어.”
황당하기까지 한 건가.
캠퍼스커플이 사귈 때는 좋지만, 헤어지고 나면 서로 불편하고 어색해서 별로라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부럽기보다는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쪽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걸 하게 된 지금, 최소한 비밀 유지는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으이구! 곧 죽어도 연애 안 한다고 그렇게 철벽을 치더니……. 결국 지호한테 무너졌네. 큭큭.”
“내가 무슨…….”
애라가 아무리 놀려도 이수는 할 말이 없었다.
“아닌 척은? 내가 아는 애들 다 얘기해? 이제 보니까 연애하기 싫다는 건 다 핑계고 맘에 안 들어서 철벽 친 거였네. 네 눈이 진짜 높았던 거였어! 서지호 정도라야 만나는구나!”
“아니야. 진짜 연애할 생각 없었어.”
“그럼 지금은? 지호가 좋다니까 갑자기 연애가 막 하고 싶어졌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이수가 애라를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만 좀 놀려!”
“하긴 뭐. 지호가 좋다는데, 세상에 어떤 여자가 거부하겠어. 안 그래? 말도 안 되는 거지. 어쨌거나 너무 부럽다. 지호는 내 맘속 이상형이었는데. 큭큭큭.”
애라의 흥분이 가라앉을 무렵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이수는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아서 한입에 넣었다.
“맛있게 먹을게.”
“이건 내가 사는데, 너도 조만간 밥 사! 지호랑 만나기로 했으면 진짜 크게 한번 쏴야지.”
“알았어. 맛있는 거 사줄게.”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수는 지호와 있었던 일들을 대부분 털어놨다.
뭔가 이상하게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지호와 무슨 일이 생기면 적어도 애라와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안심도 되고 마음이 편해졌다.
**
월요일은 5시까지 꽉 찬 수업 때문에 쉴 틈이 없었다.
어제의 피로가 다 풀리지도 않은 상태라 오후가 되면서 몸이 축축 처지는 게 느껴졌다.
등산 후유증의 여파가 상당했다.
“이수야, 오늘 끝나고 뭐 해?”
애라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피곤해서 쉬려고 하는데. 왜?”
“나 보고 싶은 영화 있는데……. 이제 너한테 영화 보자고 하면 안 되나?”
애라는 지금까지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길 때마다 이수와 다녔는데, 이제 지호 눈치를 봐야 하는 건가 싶었다.
“무슨 소리야? 나랑 영화를 왜 못 봐?”
“너 이제 남친 생겼으니까.”
“그런 게 어딨어? 무슨 영환데?”
애라가 보고 싶다는 영화는 최근 개봉한 범죄스릴러 영화였다.
“오늘 가자. 가면 되지 뭐.”
영화 보는 거나 집에서 쉬는 거나 별반 다를 것 같지 않아서 이수는 흔쾌히 가자고 했다.
“진짜? 말 나온 김에 바로 예매할까?”
“그래. 끝나고 5시에 정문에서 보자.”
“알았어. 좋은 자리로 예매할게.”
이수가 애라와 약속을 잡고 헤어지자마자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이수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지호야.”
[이수야, 지금 어디야?]
“수업 들으러 인문대 왔어.”
[아. 지금 의대에 없구나.]
지호는 의대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해서 전화했던 건데, 여기 없었네.’
“응. 월요일은 오전 수업만 의대에서 해.”
지호의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수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왜 한숨을 쉴까 생각했다.
그러다 오늘 아침 카페에서 마주쳤던 일이 생각났다.
지호에게 미안한 상황이었던 것 같아 마음이 쓰였는데.
“지호야, 아까 카페에서 혹시 기분 상했어?”
[…….]
이수는 괜찮다는 대답을 기다렸지만, 지호는 대답이 없었다.
“응?”
이수가 대답을 재촉하며 또 물었다.
침묵이 대답인 거면…….
“기분 상했구나.”
[……조금 서운했어.]
아. 이수는 입술을 안으로 꾹 말아 물었다.
[나한테서 도망치듯 차에서 내린 네가 동우랑 만나서 카페에 있는 거 보니까. 솔직히 기분이 좀 그랬어. 나 버려두고 딴 놈한테 간 거 같아서.]
“하……. 말도 안 돼. 비약이 너무 심하잖아.”
이수는 억울한 기분이 들어 어이없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따지고 보면 지호도 유미와 함께 있었는데, 상대가 유미라서 따지지도 못하는 이수는 이 상황이 조금 답답했다.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알아. 그냥 내 기분이 그랬다는 거야. 혹시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는 게 아는 척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지?]
자조적인 한숨 끝에 지호가 말했다.
“그런 건 아니야. 아까 바로 인사 못 한 건 미안해.”
유미 때문이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지호가 괜한 오해 할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오늘 끝나고 볼 수 있어?]
“아니, 오늘은 약속 있어.”
[아, 그래.]
지호의 실망스러운 목소리에 이수는 괜히 또 미안해졌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왜 이렇게 미안한 기분이 드는 건지.
[몇 시쯤 집에 들어가? 내가 집 앞으로 갈게.]
“언제 들어갈지 잘 모르겠는데.”
[그럼 집에 들어가면서 연락해줘. 아무 때나. 늦어도 상관없으니까.]
**
의대 앞에 서 있던 지호는 전화를 끊고 발걸음을 돌렸다.
“어머, 쟤 서지호 아니야?”
“여긴 무슨 일이지? 경영대는 여기랑 완전 반대편이잖아.”
“와.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연예인 같아. 너무 잘생겼다.”
“아까부터 누구 기다리는 것 같던데.”
“여친 기다리나?”
“쟤는 어떤 여자 만날까? 진짜 궁금하긴 하다.”
지호를 지나치면서 수군거리는 말소리들이 지호의 귀에도 들렸다.
‘이수가 싫다고 한 게 이런 건가…….’
지호는 이런 일에 익숙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다.
평생을 그래왔기에 이제는 남의 시선에 무덤덤해졌다.
하지만 이수는 아니겠지.
지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깊게 구겼다.
**
유미는 30분 전부터 주차장에서 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이제 오는 거야?”
멀리서 걸어오는 지호를 향해 유미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뭐 해?”
반가워서 활짝 웃는 유미와 달리 아침부터 계속 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지호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뭐 하긴. 오빠 기다렸지!”
그동안 지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던 유미는 지호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우연히 만나서 뭔가 되기를 기다렸다가는 졸업할 때까지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았다.
지호가 먼저 다가올 것 같지는 않고, 그래서 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네가 날 왜 기다려?”
“일단 차 문 좀 열어주면 안 돼? 오래 서 있었더니 다리 아파.”
무심한 지호의 말투에도 유미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조각 같은 남자와 화려한 여자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두 사람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중엔 애라와 정문에서 만나기로 했던 이수도 있었다.
“네가 내 차를 왜 타는데?”
유미의 애교에도 지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빠 별일 없으면 나 집까지 데려다주면 안 돼?”
유미는 무심한 지호의 반응에도 꿋꿋했다.
“그냥 가라. 지금 너 상대해줄 기분 아니야. 그러니까…….”
“그럼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유미는 웃으며 지호의 말허리를 잘랐다.
멀리서 유미의 얼굴만 보면 두 사람이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호는 얼굴을 찡그리며 운전석 문을 벌컥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유미는 재빨리 조수석에 올랐다.
오매불망 타보고 싶었던 차에 드디어 오른 순간이었다.
“이 차 오빠 입학 선물로 할아버지가 사주신 거랬지? 너무 좋다.”
“같은 학교 다니면서 한 번도 안 태워주고 너무해.”
“오빠랑 매일 같이 다니면 너무 좋겠다.”
낮게 가라앉은 지호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미는 들뜬 목소리로 계속 떠들었다.
지호의 차가 빠르게 정문을 빠져나갔다.
차에 탄 지 3분쯤 됐을까.
지호는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 앞에 비상등을 켜고 차를 세웠다.
“내려.”
“진짜 여기서 내리라고?”
황당한 얼굴로 지호를 보는 유미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지호의 서늘한 목소리에 애교를 부려볼 틈도 보이지 않았다.
유미가 내리고 차 문이 닫히자마자 차는 주저 없이 출발했다.
‘진짜 너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