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내 옆에 있었으면 (29/31)


29. 내 옆에 있었으면
2023.06.07.



 
이수는 지호가 유미를 차에 태우고 가는 걸 지켜봤다.

거리가 멀어서 두 사람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유미는 시종일관 밝게 웃었고 지호는 무표정했다.

오후 5시.

정문엔 어느 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어머, 저기 서지호 맞지? 옆에 여잔 누구야?”

“저 여자 무용과 여신 정유미 아니야?”

“둘이 만나서 같이 가나 봐. 사귀는 건가?”

“둘이 완전 선남선녀네. 잘 어울린다.”

사람들 떠드는 소리를 무심하게 듣던 이수는 무엇보다 무용과 여신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쳤다.


‘유미가 이제 여신 소리까지 듣는구나.’

두 사람이 만나서 차를 타기까지 걸린 시간이 3분이나 됐을까.

그 짧은 사이에도 지호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끌어모았다.

차가 사라진 뒤에도 지호 옆에 있는 여자에 대한 궁금증과 평가가 계속 이어졌다.

이수는 언젠가 자기가 겪게 될 상황을 미리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애라가 뛰어와서 이수의 어깨를 툭 쳤다.


“이수야, 가자.”

 

**

영화는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내내 스릴과 박진감이 넘쳤다.

저녁을 먹고 애라와 헤어진 시간은 9시가 넘어서였다.

지하철역까지 애라를 배웅하고 돌아선 이수는 지호에게 연락할까 망설였다.

지금 보면 10시 넘어야 만날 텐데.

아예 올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늦은 시간에 연락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시간을 가늠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이수 옆으로 집 앞까지 가는 버스 한 대가 휙 지나갔다.

정류장까지는 20미터 정도.

배차 간격이 길어 저 버스를 놓치면 한참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수는 본능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딱히 빨리 갈 이유가 없었는데도.

등산 뒤끝으로 생긴 다리 근육통 때문에 계단을 내려갈 때도 앓는 소리를 내는 몸 상태를 간과한 행동이었다.

달려가던 이수의 몸이 어느 순간 공증으로 붕 떠오르더니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면서 아스팔트 바닥으로 철퍼덕 내리꽂혔다.


“아악!”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어머 어떡해.”

“진짜 아프겠다.”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이 이수를 보며 안타까운 소리를 한마디씩 했다.

너무 처참하게 넘어져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상황이었다.


‘와. 아픈 것보다 창피해서 눈물 날 것 같네.’

이수는 손을 바닥에 짚고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툭툭 털고 일어나고 싶은 마음과 달리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간신히 일어나자마자 지나가는 택시를 보고 다급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 자리에서 빨리 사라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택시에 털썩 앉자마자 이수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창피함이 사라지고 나자 다친 다리에서 통증이 강하게 느껴졌다.

다리를 보니 바지도 찢어져 있고 그 틈으로 피가 보였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오늘은 진짜 지호 만나면 안 되겠다.’

이수는 핸드폰을 꺼내 지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호야, 우리 다음에 보자. 늦게 연락해서 미안해.

구구절절 긴 문자를 적었다가 다 삭제하고 짤막하게 보냈다.


-무슨 일 있어?

바로 답장이 왔다.


화면을 내려보며 뭐라고 답장을 보낼까 고민하는데, 지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어디야?]

“집에 가는 중이야.”

[알았어.]

전화는 바로 끊어졌다.

뭘 알았다는 거지.

이수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통화가 끊어진 게 맞는지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화난 건가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시 전화를 걸어 지호를 달래줄 기분도 아니었다.

뼈에 금이라도 간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더 심해졌다.

결국 택시 타고 가는 거. 처음부터 곱게 탔으면 이렇게 다치지도 않았을 텐데.


‘쓸데없이 뛰긴 왜 뛰어.’

아프기도 했지만, 이런 상황이 짜증 나서 얼굴을 와락 구겼다.

20분쯤 지나 집 앞에서 내린 이수는 절뚝거리며 걸었다.

걸을 수 있는 거 보면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타박상에 찰과상까지 생긴 통증이 제법 날카롭고 욱신거렸다.

베이지색 바지는 핏물이 배어 엉망이 되었다.

이걸 소독하는 동안 겪어야 할 고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참한 무릎을 내려보며 걷던 이수 뒤로 큰 그림자가 다가왔다.


“이수야,”

“어? 서지호…….”

이수가 고개를 휙 돌렸다.

반가움보다는 창피함이 먼저였다.

또 이런 꼴을 보이다니.


“너 다리 왜 그래? 넘어졌어?”

지호는 놀란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수의 다친 다리를 살폈다.


“병원 안 가도 되겠어?”

“뭐 이런 걸로 병원에 가. 집에서 소독하고 밴드 붙이면 돼.”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지호에게 이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걸을 수 있겠어?”

지호는 다리를 펴고 일어나며 물었다.


“그럼. 뼈는 멀쩡해.”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지호는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였다.


“근데 왜 왔어? 다음에 보자니까.”

“아침에 그렇게 헤어진 게 마음에 걸려서 왔어.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어서. 근데 지금…….”

찢어진 바지에 피범벅인 다리로 길바닥에 계속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시간에 갈 만한 카페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 꼴을 하고 어딜 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럼……. 우리 집으로 가자. 집에 가서 얘기해.”

이런 식으로 지호를 집에 초대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것저것 따지기엔 다리가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아…….”

이 시간에 여자 혼자 사는 집에 간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지만, 다친 이수를 그냥 두고 가기도 마음에 걸렸다.

망설이는 지호를 보고 이수가 다시 말했다.


“괜찮아. 들어가자. 나 지금 오래 서 있기 힘들어.”

“그럼……. 너 다친 것만 봐주고 바로 갈게.”

 

**

생각지 못하게 이수의 집에 가게 된 지호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정식으로 초대받고 온 거라면 긴장되고 설레기도 할 상황이었지만, 절뚝거리는 이수를 부축하며 온 지금은 그런 걸 느낄 겨를도 없었다.


“화장실 저쪽이니까 손 씻고, 소파에 앉아 있어. 난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

아프니까 이런저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자연스러운 말투로 지호에게 화장실 위치를 알려주고 이수는 방으로 들어갔다.

상처 난 피부와 바지가 엉겨 붙어서 바지를 벗을 때도 상당한 통증을 견뎌야 했다.

바지를 벗고 보니 상처는 더 처참했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 이수는 짧은 바지로 갈아입고 손을 씻었다.

거실로 나와 구급약 상자를 꺼내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내가 해줄게. 앉아 봐.”

지호는 구급 약상자에서 소독약과 습윤 밴드를 꺼냈다.


“나 혼자 해도 되는데…….”

상처의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소독약이 상처에 닿는 순간 비명을 지르게 될 것 같았다.

손수건이라도 입에 물고 있을까.

지호가 소독약이 묻어 있는 스틱을 꺼냈다.

소독약이 상처에 닿는다.

상처를 스칠 때마다 이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두 주먹에 저절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따갑지?”

지호는 꼼꼼하게 약을 발라주다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수를 보며 얕은 한숨을 쉬었다.


“응. 조금.”

지호의 손길이 차분하게 다시 움직였다.


“많이 아프겠다.”

“응……. 너무 따가워.”

조금이란 거짓말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소독약을 바른 상처로 지호가 입바람을 후, 하고 불어줬다.

따가운데 간지러운,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이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른 데 다친 데는 또 없어?”

“응.”

소독약이 마르자 지호는 습윤 밴드를 상처 크기에 맞게 가위로 잘랐다.

이수의 무릎에 붙여주면서 물었다.


“어쩌다가 다친 거야?”

지호는 사용한 소독약 스틱과 습윤 밴드 포장지를 정리하고 이수를 바라보았다.


“버스 안 놓치려고 뛰다가 넘어졌어.”

이수는 말하면서도 괜히 민망해졌다.


“어제 등산 때문에 아직 근육통이 남아 있거든.”

변명 같은 말을 한마디 덧붙였다.


“나 빨리 보고 싶어서 뛰었어?”

“어?”

지호가 피식 웃으며 물어보는데,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그건 아닌데, 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택시를 탔겠지.

상처 치료가 끝나고 멀뚱히 있으려니 왠지 어색했다.


“뭐 좀 마실래?”

이수가 자리에서 기우뚱 일어나며 물었다.

그래도 손님이 왔는데, 마실 거라도 대접해야지 싶었다.


“괜찮아. 그냥 앉아 있어.”

지호가 서 있는 이수의 손목을 잡고 소파에 다시 앉게 했다.

소파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지호는 이수 쪽으로 상체를 틀고 앉았다.


“너랑 얘기하고 싶어서 온 거야. 보고 싶기도 했고.”

부드러운 손길이 이수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그 손으로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감싸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볼 때마다.

이수는 심장이 너무 뛰어서, 얼굴이 너무 붉게 달아올라서 언제나 감당하기 벅찬 기분이 들었다.

숨이 조금 막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침엔 미안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내리는 건 아닌데, 나도 네가 아침에 갑자기 찾아올 줄 몰랐고, 그래서 미리 얘기할 시간이 없어서 그랬어. 급하게 얘기하다 보니까 그만…….”

“그렇게 도망치듯 내릴 정도로 나랑 있는 게 불편해?”

이수가 편안한 얼굴로 동우와 웃으며 대화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너 때문이 아니라 너를 보는 사람들이 네 옆에 있는 나도 보니까.”

지호의 입에서 답답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수야, 나는 너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보고 싶고, 네가 나만 봐줬으면 좋겠고, 네가 다른 남자랑 있는 거 보면 질투가 나서 머리가 돌 것 같아.”

짙어진 눈빛이 이수를 빤히 응시했다.


“다른 사람 눈치 보느라, 좋아하는데 아닌 척하고, 참는 건 힘들 것 같아.”

이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람들 모르게 만나는 게 힘들다는 얘기였다.


“나는 네가 항상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네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게 싫어.”

천하의 서지호가 질투한다니.

이걸 좋아해야 하나.


‘다른 여자를 차에 태우고 간 사람은 넌데, 어째서 내가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이수는 질투해야 할 사람은 지호가 아니라 자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가 늘 보이던 자신감과 여유는 다 어디 가고 동우와 카페에 갔던 걸 가지고 질투가 나서 머리가 돌 것 같다니.

듣다 보니 조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이수는 심통 난 아이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다른 데선 몰라도 학교에서만 비밀로 해줘. 응?”

“하아…….”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만 비밀로 해달라니.

이수를 설득하려고 왔는데, 이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지호의 한숨 뒤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이수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지호는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알았어. 최선을 다해볼게.”

“고마워.”

지호가 마지못해 하는 말에 이수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어른스럽던 지호가 갑자기 아이가 된 것 같았다.


“늦었어. 이제 집에 가.”

이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11시였다.


“그래. 아픈데 얼른 쉬어.”

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안 나갈게. 조심해서 가.”

이수는 현관 앞에 서서 인사했다.

지호는 싱긋 웃으며 다가와 이수의 뺨을 감싸더니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잘 자.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

깜짝 놀라서 눈만 커다랗게 뜨고 있는 이수를 두고 지호는 미련 없이 돌아서 나갔다.

철컹.

현관문이 닫히고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이수는 긴장이 탁 풀어졌다.

이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심호흡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