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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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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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소문
2023.06.10.
금요일. MT 뒤풀이가 있는 날이었다.
이수가 강의실에 앉자마자 애라에게 전화가 왔다.
점심 먹고 헤어진 지 몇 분이나 됐다고.
“여보세요.”
[이수야, 내가 아까 뒤풀이 갈 때 만나서 같이 가자는 말을 깜빡했어. 너 5시에 끝나지?]
“응.”
[그럼 끝나고 학생회관 앞에서 만나서 가자.]
“그래, 알았어. 좀 있다 봐.”
같이 점심 먹는 동안 애라는 어제 나간 과팅 얘기에 열을 올렸었다.
‘하여간 체력도 좋아. 어제도 과팅 나가서 술을 그렇게 마셔놓고, 오늘 뒤풀이도 안 빠지겠다는 거지.’
“일찍 왔네.”
그때 지호가 옆자리로 와서 앉았다.
MT 다녀온 이후 처음 같이 듣는 수업이었다.
이전까지 의도적으로 얼굴을 보지 않았던 적도 많았는데, 오늘은 지호와 하준이 함께 앞자리로 왔다.
하준은 이수를 보며 다 알고 있다는 듯 싱긋 웃음을 보였고 이수는 저도 모르게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나 옆에 앉아도 되지?”
지호는 이미 앉았으면서 뒤늦게 허락이라도 받는 것처럼 능청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가까이 속삭이는 것만 안 하면 괜찮아.”
이수 쪽으로 몸을 완전히 틀어 고개를 내리고 있는 지호에게 이수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비밀연애에 최선을 다해보겠다던 지호는 나름 협조적이었다.
약속대로 학교 안에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냈다.
우연히 마주치는 것 말고 학교에서 일부러 지호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 덕분에 지호와 만나는 일은 이수가 걱정했던 것만큼 부담스럽지 않았고, 그 전과 달라진 것 없는 일상이 가능했다.
같이 듣는 [영화의 이해] 수업이 이수와 지호가 자연스럽게 학교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오늘 뒤풀이 갈 거지? 난 오늘 팀플 때문에 좀 늦게 갈 것 같아.”
“응. 많이 늦어?”
“뭐. 만나봐야 알겠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갈게.”
“하준아, 너도 늦어?”
“아니. 난 끝나고 바로 갈 거야.”
“나 5시에 애라 만나서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그래.”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있어. 늦지 않게 갈게.”
“어, 어.”
지호는 습관처럼 이수 가까이 고개를 내리고 말했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저도 모르게 자꾸 이수를 향했다.
그냥 해도 될 말을 자꾸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하고, 이수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
유일하게 허락된 시간을 마음껏 누리려는 사람처럼 이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보다 못한 이수가 한마디 했다.
“너 이럴 거면 다음엔 하준이랑 바꿔서 앉아야겠다. 뒤에서 보면 누가 봐도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지호가 강의실에 들어오기만 해도 순식간에 시선을 사로잡는데, 괜히 오해할 만한 행동으로 시선을 더 끌고 싶지 않았다.
“내가 뭘 했다고? 얌전히 있었는데.”
지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억울한 표정이었다.
“뒤에서 볼 게 걱정이면 다음부턴 맨 뒤에 앉는 건 어때? 그럼 뒷사람 눈치 안 봐도 되잖아. 너무 좋은 생각 같은데.”
“됐어. 뒷자리는 싫어.”
지호의 은근한 애정행각을 위해 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태연한 척해도 지호가 바로 옆에 앉아 다정하게 대할 때마다 이수는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리고 간질거렸다.
지호 말대로 뒷자리에 앉았다가는 수업을 아예 버리게 될 것 같았다.
오늘 강의는 간략한 이론 강의 끝에 영화 감상이 바로 이어졌다.
첫 수업 때처럼 조명이 모두 꺼진 강의실에 오직 스크린 불빛만 빛났다.
영화가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호의 커다란 손이 이수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흠칫 놀란 이수가 당황한 눈으로 지호를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손을 빼려고 하자 더 세게 움켜쥔다.
지호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영화 봐, 라고 입 모양으로 대답하더니 스크린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때부터 이수의 머릿속에 영화 내용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지호가 잡은 손으로 쏠렸다.
잠시 풀어졌던 손이 이수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손깍지를 끼고 엄지를 넓게 벌린 지호는 이수의 손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럴 때마다 이수의 몸속 어딘가에 작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었다.
아무도 모르는 은밀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이수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아……. 이런 건 대체 언제쯤 익숙해질까.’
지호에게 갇힌 이수의 손은 두 시간 동안 한 번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
늦을 거라는 지호와 동우를 빼고는 모두 뒤풀이에 참석했다.
테이블 여러 개를 나란히 붙여서 앉았다.
이번엔 주희와 떨어져 앉고 싶었지만, 일부러 이수 옆에 앉는 주희를 말리지는 못했다.
생맥주와 저녁 대신 먹을 안주로 치킨과 골뱅이 소면을 함께 주문했다.
“얘들아, 마시자.”
다 같이 잔을 부딪치고 맥주를 들이켰다.
곧이어 보기에도 군침 도는 골뱅이 소면과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는 치킨이 나왔다.
이수의 젓가락은 골뱅이 소면으로 먼저 향했다.
“이수야, 그날 우리 산에 올라갔을 때, 네가 힘들다고 하니까 지호가 그렇게 챙겨준 거야?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닭 다리를 한 손에 든 주희가 물었다.
뭐가 궁금한 건지 알 것 같았지만, 이수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럼 나도 지호한테 힘들다고 할걸. 힘든 척하기 민망해서 씩씩하게 다닌 게 좀 후회되네.”
그 말에 골뱅이를 먹던 이수가 멈칫했다.
‘뭐야, 내가 일부러 힘든 척이라도 했다는 거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판단하고 단정 짓는 건 참 한결같았다.
저렇게 얄밉게 말하는 것도 재주네 정말.
쓴웃음을 지으며 이수가 말했다.
“힘든 척한 게 아니라, 정말 힘들었어.”
“아유, 나도 진짜 힘들었어. 힘들어도 엄살떨기 싫어서 참은 거지.”
이수는 졸지에 힘든 것도 못 참고 엄살떤 여자가 되어버렸다.
‘이래서 주희랑 앉기 싫었는데, 얜 굳이 왜 내 옆에 앉아서 이렇게 염장을 질러댈까?’
예쁜 얼굴만큼 말도 예쁘게 하면 참 좋을 텐데.
이수는 열이 올라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쨌든 너 그날 지호랑 되게 친해졌겠다. 단둘이 등산도 하고 지호 차도 타보고……. 그날 집까지 데려다줬어?”
“응.”
“어머! 되게 자상하구나. 안 그래 보이는데 반전 매력이 있네. 호호.”
주희는 간드러진 웃음을 웃다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이수야, 너 솔직히 그날 지호가 너한테 호감 있어서 잘해주는 줄 알았지?”
“뭐?”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럴까.
“사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소문 들어보니까 지호 만나는 애 있는 것 같더라. 너도 몰랐지?”
눈만 깜빡거리는 이수에게 주희가 신나서 말을 이었다.
“너 괜히 쓸데없이 착각할까 봐 내가 알려주는 건데, 지호 만나는 여자가 우리 학교 무용과 여신이래. 카페에서 둘이 팔짱 끼고 있는 거 본 애들도 많고, 식당에서 단둘이 밥도 먹고, 며칠 전에 지호가 그 여자 차에 태우고 가는 거 본 애들이 한둘이 아니야.”
주희는 핸드폰을 꺼내서 만지작거리더니 사진을 보여줬다.
유미가 지호 차에 타는 모습과 카페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이수는 연예인 파파라치 사진을 보는 것 같아서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다.
이건 뭐 아이돌급 인기가 부럽지 않은 상황이었다.
저 사진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핸드폰으로 전송되고 공유되었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이 여자 봐. 완전 예쁘지?”
주희는 손가락 두 개를 화면에 대고 유미의 얼굴을 확대해서 보여줬다.
“근데 반전은 이게 다 성형한 거래.”
다음으로 주희가 보여준 사진은 유미의 중학교 졸업사진이었다.
“이거 봐. 이 여자 중학교 졸업사진인데, 완전 다른 사람이야. 어디서 성형한 건지 몰라도 진짜 감쪽같지? 이 정도면 뭐 거의 다시 태어난 수준이잖아.”
주희는 신나서 떠들어댔고, 옆에 앉은 친구들도 다 같이 놀라며 호들갑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이수의 마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편했다.
단지 지호와 몇 번 같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소문이 퍼졌다는 게 기가 막혔다.
지호의 여자친구가 되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가.
숨기고 싶은 신상이 털리고, 모르는 사람들 핸드폰에 사진이 공유되고.
말문이 막혀 멍하게 있는데, 주희가 갑자기 이수 어깨 너머를 보고 활짝 웃었다.
“앗! 지호 왔네.”
하준이 있는 쪽으로 들어가려던 지호를 주희가 불러세웠다.
“지호야, 여기 앉아. 너한테 물어볼 거 있거든.”
지호는 이수와 대각선으로 맞은 편에 앉았다.
주희가 호출 벨을 누르고 맥주를 주문했다.
“우리 너 얘기하고 있었어.”
주희가 지호를 보며 운을 뗐다.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지호가 쳐다보자 주희가 본론을 꺼냈다.
“너 여자친구 생겼지?”
“아니 없는데.”
지호는 이수가 원하는 대답을 해줬다.
사람들이 몰랐으면 좋겠다고 한 건 이수였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이수와 잠깐 눈이 마주친 지호는 당황스러웠다.
잔뜩 굳은 이수의 표정이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진짜 없어?”
“응.”
“그럼 이 여잔 누구야?”
주희는 유미 사진을 지호에게 보여줬다.
“아, 이거 내가 찍은 건 아니고, 누가 보내준 거야.”
뒤늦게 도촬 사진이라는 걸 인식했는지 주희는 다급하게 변명을 덧붙였다.
“며칠 전에 네가 차에 태우고 간 여자. 얘 무용과 정유미 맞지? 얘가 너 여자친구라고 소문났던데.”
사진을 확인한 지호는 그제야 이수의 표정이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이 사진 때문에 화 난 거구나.
“하.”
지호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 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헛소문이야. 걘 그냥 아는 동생이야.”
이날이 언젠지 기억한다.
연락도 없이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유미를 지하철역에 내려줬던 거.
전후 사정을 모르고 사진만 보면 두 사람이 약속하고 만난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지호는 이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이날 갑자기 날 찾아와서 막무가내로 차에 탄 거야. 학교 나가자마자 바로 내려줬고. 그게 다야.”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내리고 있는 이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지호는 그런 이수를 보는 게 답답했다.
강의실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도착했을 때부터 이수의 안색은 굳어 있었다.
‘설마 이수가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는 건가.’
지호를 만나는 게 겁나서 피하고 싶었다던 이수였다.
마음을 열기까지 쉽지 않았던 이수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지호의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이수는 굳은 얼굴로 지호의 시선을 완벽하게 피하고 있었다.
“진짜 아니야? 애들이 이 여자 신상 다 털어서 중학교 때 사진도 다 찾았잖아. 여신인 줄 알았는데 완전 성형인 거 들통났어. 네가 그 여자한테 속은 거라며 네가 아깝다고 난리야. 근데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
주희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재차 확인했고, 지호는 굳은 표정으로 아니라고 했다.
이수는 유미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시치미 떼고 앉아 이런 얘기를 듣고 있는 상황이 너무 불편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무용과 정유미가 사실 내 동생이라고 폭탄 선언할 자신도 없는데.
유미 얘기가 길어질수록 이수는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이수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지호는 돌아서 나가는 이수를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