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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상형 (31/31)


31. 이상형
2023.06.14.



 
이수는 화장실에 가는 척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들 주희 얘기에 집중하느라 이수가 나가건 말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수야, 어디가?”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다가 그때 막 도착한 동우와 마주쳤다.


“어, 어…….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이 시간에?”

“응. 매운 걸 먹었더니 갑자기 커피가 당기네.”

“그럼 같이 가자.”

“아냐, 나 혼자 가도 괜찮아. 안 그래도 늦게 왔는데, 넌 들어가.”

이수가 괜찮다는데도 동우는 방향을 돌려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어차피 늦었는데 뭐.”

동우는 술 마시는 것보다 이수와 단둘이 커피를 사러 가는 편이 더 좋았다.

이수는 일부러 술집에서 멀리 떨어진 카페로 향했다.

유미에 대한 주희의 관심이 사그라들 만큼의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친한 조교 형이 갑자기 논문 자료 정리 좀 도와달라고 부탁해서……. 뒤풀이에 애들 많이 왔어?”

“응. 너 빼고 다 왔어.”

동우는 이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다 왔다면 지호도 왔다는 말인데…….

MT 때 분위기로 봐서는 지호가 이수를 분명 챙겨줬을 것 같은데 웬일로 이수 혼자 커피를 사러 가는 건가 싶었다.

좀 전에도 어두운 표정으로 멍하게 내려오던 이수를 동우가 먼저 아는 척하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동우는 이수의 표정을 흘깃 살피며 걸어갔다.

10분쯤 떨어진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뒤풀이 장소에 다시 도착했을 땐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수는 다른 테이블에 빈자리가 생겼기를 바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늦어서 미안.”

동우가 안으로 들어가며 손을 살짝 들고 인사했다.


“야, 이제 오냐?”

이수는 지호와 애라 옆자리가 비어 있는 걸 보고 애라 옆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애라가 큰소리로 동우를 손짓하며 불렀다.


“동우야, 너 이리로 와.”

“어. 그래.”

이수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자, 애라는 ‘나 잘했지?’ 하는 얼굴로 싱긋 웃으며 지호 옆자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럴 필요 없는데……,’

이수는 애라에게 뭐라 말도 못 하고 어쩔 수 없이 지호 옆자리에 앉았다.

주희를 피해 앉고 싶었는데, 옆자리에서 겨우 앞자리로 옮긴 셈이었다.


‘으으. 주희한테서 벗어날 수가 없네.’

지호는 이수가 들어올 때부터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시계만 쳐다보고 있던 지호는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나가보려고 했었다.

비밀연애가 이럴 때 불편하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

이수에게 말을 걸고 싶어도 불편해할까 봐 맘 편하게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유미 사진 때문에 마음이 상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시 돌아온 이수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너 커피 사러 어디까지 갔다 온 거야?”

나갈 때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주희가 이수를 보며 물었다.


“좀 멀리. 여기 커피가 맛있거든.”

이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새로 맥주를 주문한다는 걸 말리고 맥주잔 대신 커피를 앞에 내려놨다.


“나 없는 동안 술 많이 마셨나 봐.”

“응. 이게 벌써 5잔째.”

맥주 2,000mL 마시고 취했는지 주희의 얼굴이 빨개졌다.

의자에 몸을 느슨하게 기대앉은 주희는 이수와 지호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나 솔직히 너희 둘 좀 의심했어. MT 가서 둘이 너무 티 나게 붙어 다니길래……. 내가 그런 촉이 좋아서 딱 보면 알거든. 근데 이번엔 내가 잘못 짚은 거지?”

이수는 주희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지 불안했다.


“무용과 정유미라는 애가 지호 여자친구라고 했으면 내가 바로 ‘그렇구나.’ 했을 텐데, 이수는 좀…….”

고개를 갸웃하며 눈썹을 살짝 찡그린 주희를 보고 이수는 기가 막혔다.


‘나는……. 뭐?’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참았다.


“지호는 화려한 여자가 잘 어울리는데.”

이수의 기분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주희가 턱을 괴고 지호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진짜 궁금하다. 지호는 어떤 여자 좋아해? 왜 있잖아, 이상형 같은 거.”

이수도 가끔 궁금한 적은 있었지만, 유치한 질문 같아서 물어본 적은 없었다.

지호는 이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주희를 향해 대답했다.


“난……. 꾸미지 않아도 예쁜 여자가 좋아.”

“에이, 그런 여자가 어딨어? 여자는 꾸미기 나름인데.”

주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있어. 그런 여자.”

지호는 테이블 아래 있던 이수의 손을 꼭 감싸면서 대답했다.

이수는 흠칫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있는 그대로 예쁜 여자가 있더라고.”

이수의 손을 꼭 쥐며 대답하는 지호 때문에, 이수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심장이 콩닥콩닥 세게 뛰어댔다.

주희의 계속된 질문에 지호는 대답할 때마다 이수에게 잠깐씩 눈길을 주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 모두 이수 얘기라고.

지호의 손이 이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

뒤풀이가 끝난 뒤.


“너랑 같이 버스 타보고 싶었어.”

버스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이수가 지호에게 말했다.


“정말? 이게 뭐라고…….”

“그냥……. 밤에 버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연인들 보면 되게 다정해 보이더라고.”

이수가 쑥스러운 듯 웃음을 짓자 지호가 이수의 손을 잡았다.

지호의 어깨에 이수가 살며시 얼굴을 기댔다.


“이수야, 아까 그 사진…….”

지호는 지금까지 참았던 말을 꺼냈다.

굳어 있던 이수의 얼굴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얘기 안 해도 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지호를 향해 이수는 웃으며 말했다.


“오해 안 해. 난 누구처럼 질투 나서 머리가 돌 것 같진 않더라고.”

“음……. 그건 좀 서운한데?”

웃으며 말하는 이수에게 지호가 멋쩍게 웃었다.


“그럼 막 질투하고 화낼까?”

“사실 아까 네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계속 신경 쓰였어. 혹시 나 때문에 그런가 해서.”

“너 때문이 아니라, 네 여자친구라고 소문 나는 순간 저런 일들을 겪는구나 싶어서 조금 심란했어.”

유미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묵직한 돌덩이를 얹어놓은 것 같았다.


‘아까 그 사진을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의도치 않게 지호에게 비밀이 생긴 것 같아 생각할수록 마음이 불편했다.

어떤 식으로 유미 얘기를 꺼내야 할지도 막막했다.

한 번도 남에게 가족 얘기를 해본 적 없어서 더 그랬다.

하필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가장 숨기고 싶은 얘길 털어놔야 한다니.

지금 당장은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지호에게 한쪽을 내밀었다.


“음악 들을래?”

“좋지.”

“들어 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 노래야.”

지호가 이어폰을 끼자, 이수는 음악 앱을 열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눈을 지그시 감은 이수의 얼굴에 연한 미소가 그려졌다.

지호는 그런 이수를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다.

곧이어 너무나 익숙한, 지호가 셀 수 없이 많이 불렀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래를 듣는 지호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지호의 얼굴로 놀라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드러났지만, 눈을 감고 있는 이수는 보지 못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J(제이)라고?’

지호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으려고 두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어찌 보면 대단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지호의 노래는 음원을 낼 때마다 차트를 장악했고, 특히나 여자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많았다.

그러니 이수가 좋아하는 것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지호의 마음은 벅차올랐다.

신곡이 끝나고 그 뒤로 이어진 노래 모두 지호의 노래였다.

노래와 노래 사이 잠깐의 틈에 이수가 눈을 뜨고 물었다.


“누군지 알지?”

빙그레 웃는 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노래를 듣는 이수의 표정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황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좋아?”

지호의 말에 눈을 뜬 이수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아는 것도 없잖아.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데.”

“모르니까 더 좋아. 내 멋대로 막 상상할 수 있잖아.”

의외의 대답에 지호는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아?”

“별로. 내 맘대로 상상했던 거랑 다르면 실망할까 봐 차라리 모르는 게 더 좋아. 목소리만 듣고 나머진 행복한 상상으로 채우면 되니까. 어차피 노래가 좋은 거니까. 그걸로 충분해.”

대체 무슨 상상을 어떻게 하길래.

지호는 피식 웃음이 났다.


‘이거 실망할까 봐, 함부로 밝히지도 못하겠네.’

“아, 근데 딱 한 가지 아쉬운 건 있어. 라이브 못 듣는 거.”

심각하게 얼굴까지 찡그린 이수를 보며 지호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없는 가수니까 애초에 콘서트가 불가능하잖아. 음원 내는 것 말고 다른 활동은 전혀 안 하니까. 라이브로 들으면 진짜 소름 끼치게 좋을 것 같은데…….”

뭘 상상하는지 이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라이브…….”

이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지호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



“연수야, 그럼 이번 주말에 서울에 온다는 얘기지?”

[어. 근데 내가 일요일 저녁 비행기로 또 제주 내려가야 하거든. 그래서 너 시간 되면 일요일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고 연락했어. 서울까지 갔는데, 네 얼굴은 보고 와야지 싶어서.]

수민은 오랜만에 런던에 있는 연수와 통화 중이었다.

제주도 별장 계약 때문에 급하게 한국에 온다는 소식에 수민의 목소리가 들떴다.


“그럼. 너 오는데 내가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야지. 근데 여기까지 와서 겨우 삼 일만 있어? 좀 오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번엔 일 때문에 갑자기 가는 거라 시간을 많이 못 냈어. 대신 올여름에 네가 유미 데리고 런던으로 놀러 와.]

“그럴까? 그 얘긴 우리 일요일에 만나서 하자. 아, 그리고 그날 지호도 같이 볼 수 있어? 나도 지호 본 지 너무 오래돼서 한번 보고 싶은데.”

[물론 되지. 지호한테는 내가 얘기할게. 너도 유미 데리고 나와. 나도 유미 보고 싶다.]

“그래. 알았어. 식당은 내가 예약하고 연락해줄게.”

소파에서 전화를 받던 수민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마침 이번 주 일요일은 유미의 생일이기도 했다.

지호까지 함께 볼 수 있다면 유미에겐 그 무엇보다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전화를 끊은 수민은 서둘러 핸드폰 검색창을 열었다.

얼마 전부터 유미가 자기 생일에 꼭 가고 싶다고 했던 레스토랑 전화번호를 찾았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신호음 몇 번에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청을 가다듬은 수민은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주 일요일 1시에 4인 스페셜 코스로 예약할게요. 아, 그리고 생일 케이크도 함께 준비해주세요.”

 

**

유미는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에 공을 들였다.

오늘은 유미의 스무 번째 생일이었다.

오랜만에 연수를 만나는 데다가, 지호도 함께 만날 예정이었다.

어젯밤 지호를 만나기로 했다는 수민의 말에 너무 설레서 잠까지 설쳤다.

정성스럽게 머리를 손질하고 어젯밤에 미리 골라둔 화사한 봄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완벽해. 내가 봐도 너무 예쁘네.”

유미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활짝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스무 번째 생일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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