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 이렇게 팔려가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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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 이렇게 팔려가고 싶지 않아요
2023.03.01.
‘……아, 머리야.’
술에 미쳐 잠에서 깬 라일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주위를 둘러보다 멈칫했다.
낯선 방, 낯선 침대, 낯선 이불.
그리고 옆에 누워 있는 낯선 사람. 그것도 그냥 사람이 아닌 남자. 게다가 살색.
실오라기조차 걸치지 않은 남자의 탄탄한 육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난 라일리는 낯선 남자의 조각 같은 나체를 마주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설마.’
전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적나라한 살색의 현장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땀에 젖어 살짝 상기된 얼굴.
‘더, 더 해줘요. 조금 더.’
미쳤어!
라일리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이 충격적인 상황을 머리로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저랑 하실 건가요?’
'글쎄, 어쩔까.’
‘…….’
‘할래?’
‘좋아요.’
드문드문 기억이 난다. 퍼즐처럼 조각난 기억이 맞춰질 듯 안 맞춰질 듯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술. 이 예기치 못한 사고를 저지르게 한 건 리셉션에서 마셨던 술. 그로 인해 과하게 오른 취기라고.
대형사고다, 이건.
‘……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하지 못할 정신 나간 짓이긴 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쩌자고 그런 망측한 말을 했지?’
라일리는 한숨을 내쉬며 옆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베개에 파묻혀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흐트러진 주제에 찰랑거리는 은빛 머리카락뿐이었다.
그도 술에 취했던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일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진짜로 저질러버렸어. 진짜로…….’
인생의 첫 일탈. 그리고 생면부지의 남자와 가진 첫 잠자리가 가져다주는 충격은 상당했다. 이 모든 상황이 애초부터 철저하게 계획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떡하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닥친 현실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각오하고 저지른 일이긴 하지만 주어진 무게감이나 압박감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간밤의 행위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함께 밤을 보낸 상대.
‘일단은 여기서 나가자.’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만 그 장소가 여긴 아니다. 그가 깨어나는 순간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민망했다. 나중에 만나 간밤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당장은 아니었다.
일단 머릿속을 정리해야 한다.
라일리는 침대 아래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챙기며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입고 왔던 클레어의 드레스가 아닌, 이곳 호텔에서 내어준 원피스였기에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일단 급한 대로 무작정 입고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어쩌다 실수로 하룻밤을 보내게 된 상대가, 왜 하필 마탑 호라이즌의 최연소 마탑주라 정평이 자자한 이 남자인 걸까.
왜 하필 마탑주와 잤을까.
왜 하필!
***
이 끔찍한 해프닝의 시작은 일방적으로 진행된 역겨운 혼사 때문이었다.
“아가씨, 소영주께서 부르십니다.”
숙부님께서 부른다. 대체 무슨 말을 할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언제나 그렇듯 정확하게 적중했다.
“결혼 축하한다, 라일리.”
숙부인 라이언 남작의 통보에 라일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뭐라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털이 쭈뼛 곤두서는 불쾌한 짜릿함, 쿵쿵, 뜨겁게 피가 역류하는 느낌. 불안은 보란 듯이 뒤통수를 강타해왔다.
시녀들이 수군거리던 대화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걸.
“결혼은 다음 달에 진행할 것이다, 결혼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에르메인츠 백작이 지불하기로 하였다. 네게는 정말 과분할 정도로 분에 넘치는 결혼이지. 잘 되었지? 우리에게 이만한 혼처가 또 어디 있겠느냐. 정말 좋은 기회야. 너에게도, 우리 집안에도.”
아, 결국.
눈앞이 아득해진 라일리는 짧게 숨을 토해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혹여라도 거칠어진 호흡 소리가 숙부님의 귀에 들어가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서 최대한 흐트러진 호흡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다.
괜히 그의 심기에 거슬렸다간 또 방에 갇힐지 모르니까.
“일전에 이곳으로 요양 오셨을 때 너를 보았다더구나. 네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야.”
“…….”
“에르메인츠 백작은 블레스티지의 중앙귀족이다. 네 결혼 상대로는 한없이 과분한 분이시지. 에르메인츠 백작께서 결혼 지참금을 후하게 챙겨주었어. 이걸 그냥 받아도 되나 싶을 만큼 과한 거액이지. 그 정도 돈이면 사업 확장을 하고도 남을 거다. 좋은 기회가 왔으니 결혼이 공표되기 전까지 몸가짐을 바르게 하도록 해라.”
“……예, 숙부님.”
결혼이 결정되었다.
숙부님께서는 과분한 결혼이라 했다. 고작 변방의 작은 영지의 소영주로 있는 에아달린 가문은 수도의 블레스티지의 권세가 중 하나인 에르메인츠 가문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니까.
하지만 이는 에르메인츠 가문을 모르는 이들이나 하는 실없는 얘기일 것이다.
결혼할 나이가 되면 가문의 번영을 위해 결혼을 하는 게 통상적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다. 축복받아야 마땅할 첫 결혼은 잔인한 사형선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숙부님의 사업 자금을 대신해서 팔려가는 것이다.
먼저 하늘로 떠나버린 아버지보다 나이가 스무 살이나 많고, 아내를 4번이나 갈아치운 전적이 있는 남자에게. 이제는 다 늙어 오늘내일하는 몸 상태라 수발 없이는 거동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늙은 남자에게.
그런데도 젊고 어린 여자만을 원하고 탐하는 미친놈에게.
***
라일리는 열네 살이 되었을 무렵 하나뿐인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아버지는 바로 눈앞에서 마차에 치이는 사고로 죽었다. 그렇게 혼자가 되었고 친척들 모두가 이를 외면했다.
단 한 사람, 숙부 라이언 에아달린 남작만 빼고.
그는 자선사업가로 모두의 귀감이 되는 자였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찾아가 봉사를 했다. 재해를 입은 피해 지역의 복구 작업 현장을 찾아가기도 하고, 부모를 잃고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거둬들여 보육원도 운영했으며,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그들에게 일자리를 내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장애가 있는 이들이나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모아 만든 물건들을 팔거나 기부금으로 돈을 벌었다.
그렇게 숙부님은 자선사업을 점차 확장시켜 가면서 모두의 귀감이 되는 훌륭한 귀족의 모범사례라며 유명세를 떨쳤다.
그의 유명세는 나날이 커졌고, 이윽고 영주의 대리인으로 대신 영지를 관리하는 ‘소영주’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남들에게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라일리 역시도 숙부님을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존경할 만한 멋진 분께 거둬져서 다행이라고,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던 때가 있다.
반짝인다고 모두 금이란 법은 없다 했던가. 겉치레 속에 감춰진 그의 내면은 실은 좋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선사업도 그저 명예를 떨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명예욕에 찌든 사람. 아울러 출세를 위한 야욕이 상당한 사람. 그것이 ‘라이언 에아달린 남작’의 실체였다.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너를 거둬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멍청한 짓 하지 마라, 가문에 누를 끼치는 짓을 하지 않게 항상 조심하거라. 보는 눈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너를 거둬들였지만, 난 너를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아. 가족으로 받아들일 생각도 없다. 그러니 쓸데없는 소속감은 갖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듣지 말고, 아무것도 말하지 말거라. 있는 듯 없는 듯 굴어. 눈에 띄지 말고 거슬리지 말아라. 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적당히 지내다 나이가 차면 적당한 가문에 시집이나 가면 된다. 내가 너를 거둔 것은, 네가 훗날 우리 가문에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까. 이는 곧 네가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너를 내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너무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강박증이 있었던 걸까.
‘전 숙부님 말씀대로 살아왔어요.’
눈에 띄지 않게, 거슬리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복종하며 살아왔다.
그저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둬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자고, 잘 보이려고 노력하면 이들도 언젠가 마음을 열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헛된 희망을 붙잡고 살아왔다.
통제된 환경 속에서, 주어진 것만 받아먹으면서. 주체적인 삶이 아닌, 의존적인 삶을 살았다.
버려질까 무서워서 혼자가 될까 두려워서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참고 산 결과가 고작 이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결혼하기 싫어, 싫어. 그런 늙은이와 매일 한 방을 쓰고 몸을 섞고…… 비위를 맞추고 병수발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나도 그의 다른 전처들처럼 헌신짝처럼 쫓겨나겠지. 산 건지 죽은 건지 모른 채……
싫어! 더러워! 역겨워!’
가슴에 응어리진 감정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숙부님을 향한 격렬한 배신감. 그리고 뼈저린 현실에 대한 회의감. 헛된 희망에 목매달고 인생을 헛살았던 스스로에 대한 멍청함.
‘차라리 뛰어내려 죽어버릴까…….’
당장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비참하게 삶을 연명할 바에야 죽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다.
‘라일리, 미안하구나…… 그래도 꼭 살아. 넌 보란 듯이 꼭 살아야 한다. 반드시…… 힘들어도 후회가 되어도 꿋꿋하게 견뎌.’
죽기 직전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라일리는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왜 그런 말을 하셨어요, 왜 마지막에 그런 말을 해서 스스로 포기하지도 못하게 만들어요.”
마차에 치인 아버지가 사망하기 직전 남긴 말.
그것은 유지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아남으라는 그 말은 세상에 홀로 남을 딸을 향해 할 수 있는 간절한 부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마지막 부탁은 아무리 힘들어도, 괴로워도 꾸역꾸역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족쇄였다.
‘내가 왜 죽어야 하지? 내가 왜?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는데…….’
슬픔은 곧 억울함으로 바뀌었다.
라일리는 더는 불행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죽어버리기에는 아버지의 유지도 그렇고 여태 참고 견뎌온 세월이 너무 억울했다.
버림받는 게 두려워 복종하며 살았지만, 사실 은연중에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들에게는 그저 쓸모가 다하면 버려질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도망칠까? 하지만 어떻게? 성벽 밖에는 마수가 득실거릴 텐데?
게다가 감시가 붙을 게 뻔하다. 또 숙부님의 호적 아래 입적되어 있는 이상 법적 보호자는 숙부님이다. 무작정 가출한다고 해서, 에아달린의 울타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 나갔다. 그에 따라 답답함도 커졌다. 앞날이 너무 깜깜했다. 혼자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서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던 그때.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아가씨. 날이 추운데 창문을 다 열어두시면 어떡하나요.”
“…….”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그곳으로 뛰어내릴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요?”
하녀장 맥달린이었다. 그녀는 항상 허락도 없이 멋대로 문을 열어 들이닥치곤 했다.
예의를 밥 말아 먹은 행동이었으나 그 누구도 그녀의 행동에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예의를 차리지 않는 이는 이 저택에서 라일리가 유일했다.
“뭐, 뛰어내린다고 해서 죽을 높이도 아닙니다만.”
“…….”
“어차피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늙은이입니다. 몇 년 비위를 맞춰주고 버티다 보면 에르메인츠 가문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는 겁니다. 아가씨에게도 나쁠 건 없는 거래입니다.”
“그, 그전에 그의 다른 아내들처럼 쫓겨날 수도 있어.”
“그거야 아가씨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린 문제겠지요. 에르메인츠 가문의 전처들은 모두 멍청한 탓에 에르메인츠 백작의 눈 밖에 나 쫓겨난 것입니다. 그곳에서 살아남는 것은 이제 아가씨의 역량에 달린 일이지요.”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강한 자가 곧 살아남는 자입니다.”
“그의 전처들이 이상한 게 아니야. 에르메인츠 백작이 이상한 거지. 그 나이에 과할 정도로 어린 여자에게 집착하는 것도, 혼자서 아내를 네 번이나 갈아치운 것도 정상으로 보여? 이게 전부 전부 전처들의 문제라고?”
라일리의 울분 어린 외침에 맥달린은 피식 웃었다. 그러곤 빗을 가져와 라일리의 머리를 빗겨주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가씨께선 이곳에서 도망칠 수도 없고, 또 이미 결정된 혼사를 무를 수도 없습니다. 아가씨에게는 그럴 힘도, 능력도 없으니까요.”
“…….”
“제가 항상 말했지요. 권력이 곧 힘이고, 힘이 곧 정의입니다. 그것이 세상 사는 이치입니다. 무시당하기 싫으시면 힘을 기르라 했습니다. 에르메인츠 백작은 강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가 곧 정의인 거고, 그의 전처들은 멍청한 머저리가 되는 겁니다.”
“…….”
“앞으로 혼사 전까지 외출은 철저하게 금지될 거고, 감시인이 붙을 겁니다. 아가씨께서는 그냥 여태 했던 대로 얌전히 있는 듯 없는 듯 방구석에 머물러계시면 됩니다.”
점잖은 척, 고상한 척하지만 사실 그 속은 뒤틀린 괴물이 따로 없는 맥달린은 충고를 빙자한 조롱을 위해 이곳에 온 게 분명했다.
“그래도 결혼이 끔찍하게 싫긴 한가 봅니다. 매번 영혼 없는 인형 같은 꼴로 있던 것과 상반되는 모습인 걸 보면.”
빗질을 끝낸 맥달린이 웃으며 머리를 어루만졌다.
“이러나저러나 달라지는 게 없다면 발버둥이라도 치는 것이 맞죠. 그래야 후회가 없지.”
“……무슨 뜻이야?”
“아가씨께서 그저 평소대로 멍청하고 얌전하게 이 현실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볼지 기대된다는 뜻입니다.”
“…….”
“원래 남의 집 불구경이 가장 재밌거든요.”
맥달린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라일리를 조롱했다. 얼마나 산뜻한 웃음인지, 정말 사이코가 따로 없었다.
“그럼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아가씨. 편히 주무세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시고.”
그녀가 나가고 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던 라일리는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맥달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평소처럼 멍청하게 현실에 순응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뭐라도 해보며 발버둥을 칠 것인지.
‘아버지. 전 이렇게 팔려가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숙부님의 호적에 입적하지 않았더라면, 에아달린 남작가의 영애가 아닌 평범한 고아였다면 좀 더 자유롭게 또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좀 더 주도적이고, 자립적인 인물로 자라날 수 있었을까.
맹목적인 복종,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조금은 버릴 수 있었을까.
지긋지긋한 집구석.
‘대책을 강구해야 해.’
결혼 공표 전까지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라일리는 결혼 전까지 어떻게든 머리를 쥐어짜보기로 했다.
***
그러던 와중, 뜻밖에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여보, 이것 좀 봐요. 마탑 호라이즌에서 초대장을 보냈어요.”
“호라이즌에서 보냈다고?”
“그렇다니까요! 이번에 새 마탑주 취임을 기념해서 리셉션을 여나 봐요.”
“호라이즌에서 변방의 귀족인 나한테 초대장을 보냈다……? 왜지?”
“당신의 명망이 블레스티지까지 닿았나 보죠!”
“그런데 왜 초대장이 4장이지?”
“라일리 것도 포함이더라고요.”
“……곤란하군.”
“아마 모르셔서 그런 모양이에요. 저희 가문과 교류하는 사람들이야 라일리가 병약해 대외적인 활동을 꺼린다고 알고 있지만, 마탑 호라이즌과 저희는 여태 교류가 없었잖아요?”
“라일리를 그런 큰 파티장에 내보이는 것은 염려되는데.”
“듣기로는 에르메인츠 백작도 참석하신다고 하던데요?”
에르메인츠 백작의 리셉션 참석 소식에 라이언 남작은 잠시 고민하다 라일리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숙부님.”
“수도에 갈 준비를 해라.”
“……예?”
“마탑 호라이즌에서 마탑주 취임 기념 리셉션 초대장을 보내왔다. 네 것도 포함되어 있어. 부족한 너를 데리고 그 큰 자리에 함께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에르메인츠 백작께서 참석하신다고 하니 인사도 드릴 겸 함께 가는 게 좋겠다.”
싫다고 거절할 선택지는 없었다. 이건 일종의 통보였으니까.
에르메인츠 백작을 면전에 두고 봐야 한다는 건 속이 뒤틀릴 만큼 역겨웠다. 당장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수많은 귀족이 모이는 행사 자리. 숙부님의 감시가 약해지는 순간이다. 그때가 도망칠 수 있는, 혹은 다른 대책을 세울 유일한 기회가 분명했다.
‘더는 겁먹고 멍청하게 끌려다니면서 살지 않겠어요, 아버지.’
이판사판이었다.
물러날 곳은 더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