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예상치 못한 삼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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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상치 못한 삼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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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상치 못한 삼파전
2023.03.11.
라일리는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에르메인츠 백작은 일전에 스치듯 마주친 적이 있지만, 그때 느낀 느낌과 지금 느낌은 차원이 달랐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서 마주치는 것이 아닌, 정혼자로 그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어머! 네 부군 오셨네!”
“클레어, 뭐하니! 얼른 이리 오렴! 얼른!”
라일리를 놀릴 생각에 신난 클레어를 남작 부인이 사색이 되어 잡아끌었다. 그러곤 황급히 등을 떠밀었다. 혹여나 자신의 친딸이 에르메인츠 백작의 눈에 띄면 곤란할까 걱정하는 게 확연히 보였다.
이런 자리에선 가족을 소개해야 마땅했음에도 라이언은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클레어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클레어가 멀어지고 나서야 라이언은 급히 가족을 소개했다.
“여긴 제 아내, 여긴 제 딸 라일리입니다.”
“오호라, 이 아름다운 레이디께서 라일리라고? 못 알아보겠군.”
“하하, 그때는 라일리가 아직 어릴 때가 아니었습니까.”
“그래, 그때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 지금은 아주 아름다운 미인이 되었군. 세월이 무서워. 그 어리고 귀엽던 아이가 이렇게 아름답게 자라다니.”
“라일리, 인사드리거라. 에르메인츠 백작이시다.”
등골이 서늘했다. 식은땀이 삐질 흐름과 동시에 전신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불쾌함이 덧대어졌다.
“라, 라일리 에아달린입니다…….”
“그래, 라일리. 이런 자리에서 보니 아주 반갑구나.”
에르메인츠 백작이 라일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곤 자신의 주름지고 도톰한 손을 포개어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노골적인 만지작거림.
그저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불쾌했다. 아닌 듯 음흉해 보이는 침침한 시선도, 주름진 손의 거칠고 투박한 느낌도 끔찍했다.
“그런데 자네가 어떤 일인가?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그것이…… 마탑주께서 저와 가족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라이언의 대답에 에르메인츠 백작이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그 애송이가 자네 일가를 이곳에 초대했다고? 원래 일면식이 있는 사이인가?”
“그럴 리가요, 저희도 초대장을 받고 당황했습니다.”
“흐음, 이해가 안가는 군. 저 애송이 놈이 자네 일가의 존재를 아는 것도 신기한데 직접 초대까지 해놓고선 여기선 모르쇠로 굴고 있는 거로군?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
“그, 그러게 말입니다.”
“흠, 아무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자리가 자리인지라 쉽지 않군. 리셉션이 끝나고 나서 결혼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어떤가? 자네의 여식을 내 저택에 보내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데려가십시오. 아예 결혼식 전까지 쭉 데리고 계셔도 괜찮습니다.”
미친! 라일리는 경악하며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이언은 대화할 상대가 생긴 것에 신이 난 건지 에르메인츠 백작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부를 떨기 바빴다.
“하하, 그럼 나중에 보지. 유감스럽게도 인사를 나눌 상대가 너무 많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가 없군.”
“물론입니다. 그럼 리셉션 끝나고 뵙겠습니다.”
에르메인츠 백작이 떠나자 라이언이 라일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말했다.
“들었지?”
“…….”
“리셉션 끝날 때까지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거라.”
“……숙부님, 전!”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라.”
“…….”
“도망칠 생각도 하지 마. 밖에 경비병들을 대기시켜 놓았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려면 신원 확인을 해야 해. 출구를 지키는 경비병들에게 너에 대해 말해두었다. 네가 정신적으로 아픈 아이라 보호자가 필요하니 나 없이 홀로 밖에 나가는 일이 없게 잘 좀 신경을 써 달라고 말이다.”
라일리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당황스러움과 분노에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런 라일리를 비웃으며 라이언은 격려 아닌 격려를 남겼다.
“고집을 버리고 포기하면 모든 게 편해져.”
“…….”
“꼭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닐 게다. 에르메인츠 백작이 문제가 많은 남자라 해도 너에게 과분한 혼처라는 건 변함이 없어. 비루한 남작가의 양딸을 받아줄 혼처가 어디 흔한 줄 아느냐? 게다가 에르메인츠 가문은 내로라하는 명문가다. 영광으로 알아.”
결국 뭘 하든 숙부님의 손바닥 위에 있었던 것인가.
라이언이 다른 곳으로 가고, 라일리는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어 섰다. 그는 혹시나 도망칠 상황을 다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거다.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이대로…… 저 늙은이와 결혼을 해야 하는가?
당장 오늘 밤 그의 저택으로 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부터가 싫었다.
손을 잡는 것도 이렇게 끔찍한데,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 버틸 수 있을까? 견딜 수 있을까?
망연자실한 라일리는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었다.
방법이 없다. 통로가 없다. 나아갈 길도, 물러설 길도 없다. 제자리에 고립된 채 갇혔다. 마치 좁은 도축장 안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소가 된 심정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바에야 차라리…… 저런 추잡한 놈에게 명예가 더럽혀질 바에야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낫지 않을까?
아버지도 이해해 주실 거야. 정말, 이건 아니잖아. 이건…….
라일리는 문득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천장.
그래, 이곳은 마탑이었다.
탑!
고작 3층짜리 에아달린 저택과는 그 크기가 다르다. 마탑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린다면 확실히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더럽혀질 바에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나아.’
더는 삶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무슨 짓을 하든 에아달린 가문의 완전한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제아무리 사랑받으려 애써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이 넓은 세상 그 어디에도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곳이 없다는 것이 눈물 나게 비통하고, 끔찍하게 고독했다.
그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의욕을 잃었다.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렇게 괴롭게, 비참하게 그저 휘둘리며 살 바에야 죽는 것만큼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해도 되는 거 아닐까?
‘그래, 다 끝났어, 이제.’
더는 방법이 없었다.
라일리는 결심한 듯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곤 마음이 닿는 대로, 충동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인 사람이 하루에 수도 없이 사람을 마주쳐야 하는 직책을 담당하는 건 아주 고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리셉션은 기브넨에게 아주 고되고 지랄 맞은 일정이었다.
마탑주에 취임하고 처음 주최하는 공식행사다. 이는 그저 입맛에 맞는 사람만을 골라 초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을 뜻하기도 했다.
블레스티지에서 내로라하는 정·재계의 거물급 인사들에게는 모두 초대장이 발송되었다. 초대장을 받은 이들은 당연하다는 듯 전부 참석했다.
이들은 기브넨이 호라이즌의 마탑주로서 끊임없이 교류해야 하는 이들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말이 친목의 장이지, 사실 사교의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융이 그렇게 가버린 건 무척 유감이네.”
눈앞의 이 불청객은 그 중에서도 최고로 껄끄러운 상대가 분명했다.
“참석하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르메인츠 백.”
“호라이즌의 리셉션이 어떤 자리인데 참석하지 않을 수가 있나? 내 위세가 예전 같지는 않아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되는데?”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자네는 좀 괜찮나? 스승이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에서 참변을 당했는데, 꽤 마음고생을 했겠어.”
“……이젠 괜찮습니다.”
“하긴, 정신없이 바쁠 텐데 죽어버린 스승을 신경 쓸 틈이 어딨겠나? 차라리 바쁜게 잘된 걸지도 모르겠어. 정신없이 일하다보면 슬픔도 줄겠지.”
기브넨은 대답대신 샴페인을 들이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르메인츠 백작은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나저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자네가 제아무리 융의 제자라지만 너무 핏덩이가 아닌가. 마탑 호라이즌은 애송이가 이끌고 갈 만한 마탑이 아닌데. 어울리지 않는 왕관을 쓰고 버티는 건 자네에게나, 아랫사람들에게나 힘든 일 같은데 이참에 우리 쪽에 팔아넘기는 건 어떤가? 아니면 전문 경영인을 따로 들이는 것도 좋은 방법 같은데. 내가 잘 아는 사람을 소개해 줄까?”
에르메인츠 백작은 원래가 빈정거리기를 잘하고 거침없는 언변이 특징인 자였다.
그의 그런 성격은 세심하고 신중한 편인 기브넨과는 완전히 상극이었다.
특히 에르메인츠 백작은 단순히 언변이 거친 걸 넘어서 할 말, 안 할 말 구분도 못 하고 똥 싸듯 내뱉어버리는 덕분에 사교계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융의 사태를 보면 알겠지만 이 바닥에서는 말이지 적을 너무 많이 두면 단명하게 되는 걸세. 마탑은 이제 변화가 필요해. 정치적 중립? 말이야 좋지, 사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이떠중이라는 거지. 마탑은 국가의 핵심 기관이네. 그런 기관이 힘을 더 키우려면 정치적 입지를 확실하게 하는 게 좋아.”
기브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르메인츠 백작은 눈치 없이 재잘거리는 것을 계속했다.
“내가 잘 아는 전문 경영인을 소개해 줄까 하는데, 어떤가? 원한다면 말만 하게, 내 주위에는 유능한 경영인들이 아주 많아.”
빈정거리는 그에게 기브넨은 비즈니스적 미소를 머금은 채 신사적으로 대답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당장 경영에 어려운 부분은 없습니다.”
“그런가? 그것참 아쉽군. 그나저나 이 큰 마탑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니, 제아무리 천재라도 그건 쉽지 않은 일인데. 혹 융이 자네에게 지식과 마나 전승이라도 해준 건가? 자네는 수제자인데다 후계자로 지명한 걸 보면 가능성 있는 이야기 같은데.”
“…….”
“그래, 뭔가 이상하다 했어. 융이 그렇게 ‘쉽게’ 살해당할 인물은 아니지 않은가. 자네에게 지식과 마력을 전승했다면 마법사로서 남아 있는 힘이 거의 없었을 테니 살해당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군. 자신을 희생해서 자네 같은 괴물을 만들어낸 건가? 이야, 정말 무서워. 타고난 천재에게 대마법사의 지식과 마력이 합쳐졌으니 호라이즌의 미래가 참 밝겠군!”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융을 살해한 범인은 아직인가?”
“아직 수사중입니다.”
“수사가 길어지는군. 사실 융을 죽였을 때 가장 이득 볼 사람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텐데, 안 그런가?”
에르메인츠 백작의 물음에 기브넨이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순간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것을 알아차린 에르메인츠 백작은 과한 제스처를 보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농담일세, 농담. 살벌해서 농담도 못 하겠군!”
에르메인츠 백작의 호들갑에 기브넨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백작께서도 예전 같지 않으십니다. 맨몸으로 호랑이도 때려잡던 장수께서 새파랗게 어린 제게 주눅이 드시다니 말입니다.”
“뭐라?”
“다 늙고 이빨이 빠져버린 호랑이와 하룻강아지가 뭐가 다를까 싶은데, 늙은 호랑이 본인은 그걸 모르고 여전히 호랑이인 척 유세를 떠는 건지.”
“그런가? 그래도 호랑이는 호랑이지, 호랑이인 척하는 하룻강아지가 상대가 되겠는가? 요즘 세상이 많이 변해서 참 살기가 좋아. 망나니가 마탑주가 되는 세상이 아닌가? 껄껄”
에르메인츠 백작의 호탕한 웃음에 기브넨도 피식거리며 화답했다. 그 옆에 서 있던 기브넨의 보좌관 삭만이 사색이 된 채로 기 싸움 판에 서서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모쪼록 좋은 시간 보내고 가십시오. 나이도 나이인데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물론! 자네야말로 조심하게. 아름다운 미녀들이 호시탐탐 자네를 노리고 있더군. 혈기왕성한 나이니만큼 정신 바짝 차리게. 아무리 그래도 리셉션 당일까지 염문설이 퍼지면…… 자네의 아랫것들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하하!”
아랫도리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집안을 콩가루 집안으로 만들어버린 작자가 할 말인가 싶었으나 기브넨은 느긋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메인츠 백께서도 조심하십시오, 제 스승님도 살해당하는 세상에 늙고 이빨 빠진 호랑이 한 마리 못 죽일까요.”
“허허, 유념하지.”
에르메인츠 백작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삭이 욕을 곱씹었다.
“정말 매너라고는 쥐똥만큼도 없는 양반입니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답니까?”
“놔둬, 쓰레기는 뭔 짓을 해도 안 바뀌어. 제아무리 번지르르하게 꾸며봐야 쓰레기지.”
에르메인츠 백작을 응대하던 웃음은 온데간데없고 싸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기브넨은 다른 이가 인사를 건네자마자 바로 천사 같은 미소를 머금고 인사를 나눴다.
어떻게 저렇게 순식간에 표정이 돌변할 수 있는 걸까. 삭은 어질어질한지 이마를 쓸어넘기며 제 상관의 화려한 접객 솜씨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저 정도는 되어야 마탑주 직함 달 수 있구나 싶었다. 아마도 그는 배우를 했어도 대성했을 것이다.
삭이 그의 화려한 접객 솜씨에 놀라 넋 놓고 있는 동안, 기브넨은 오는 사람들을 능숙하게 맞이했다.
타고난 언변과 애티튜드는 그가 이 파티의 주인공임을 증명함과 동시에, 그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그는 삭에게 전해들은 상대의 짧은 정보만으로 유창하게 이야기를 이끌었다.
이름만 들어도 눈이 휘둥그레질 거물급 인사들 앞에서 주눅이 들기는커녕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는 재주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손님을 맞고 근황에 관해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 마탑 경영과 관련된 사업 이야기를 하느라 그는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잠깐의 틈이 생겼다. 기브넨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올 테니 응대 부탁하지.”
“다녀오십시오.”
기브넨은 꽉 조여 맨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단정하게 채운 단추도 두어 개 열었다.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걸까.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는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5분이라도 좋으니 휴식이 필요했다. 터질 듯한 머리를 진정시킬 시간이 있어야 다음 응대를 계속할 수 있었으니까.
그는 곧바로 텔레포트기에 올라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꼭대기 층을 눌렀다.
마탑의 꼭대기에서 별을 보며 휴식하는 것만큼 최고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마탑의 꼭대기에 도착하자마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아무도 없어야 할 한적한 공간이 어째서 소란스러웠다. 절박함에 가까운 여인의 비명 소리도 비명 소리인데…….
“나 원. 어차피 결혼할 사이에 왜 이렇게 앙칼지게 구느냐?”
익숙하면서도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으로도 단번에 주인을 알 수 있을 정도로.
***
“어디로 갔다고?”
“탑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답니다.”
“혼자서?”
“그렇습니다.”
라일리 에아달린이 홀로 탑 꼭대기로 향했다는 소식이 에르메인츠 백작에게 전해졌다.
잠시 여유가 생긴 에르메인츠 백작은 라일리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꼭대기 층으로 가겠다. 넌 여기서 대기해.”
에르메인츠 백작은 부분 기대를 안고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그는 꼭 라일리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만큼 라일리가 마음에 들었다. 비루한 남작 가문의 양딸이란 걸 알면서도 결혼을 결심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옛날 첫사랑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고분고분하고 내성적인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여자가 앙칼지면 남편을 이기려 드는 법이라 생각한 에르메인츠 백작은 자기 주관이 확고한 여자를 특히 싫어했다. 여러 번의 결혼 실패로 깨달은 부분이다.
그날, 어린 라일리는 나이답지 않게 꽤 정숙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자랐으니 그 정숙함이나 아름다움이 훨씬 더 무르익었을 것이다.
“여기 있었구나, 라일리.”
“여, 여기는 어떻게…….”
“네가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보고 적당히 틈을 봐서 빠져나왔지.”
에르메인츠 백작이 웃으며 라일리에게 다가가려 하자, 라일리는 질겁을 하면서 난간을 붙잡았다.
“가까이 오지 마요!”
에르메인츠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느냐? 나는 그냥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온 것인데.”
“당신이랑 나눌 이야기 없어요.”
“우린 곧 결혼할 사이가 아니냐. 이미 이야기는 끝난 걸로 아는데?”
“제 아버지와 이야기가 끝난 거겠죠! 저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죽음을 결심한 라일리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래서 솔직한 제 심정을 표현했다. 그러자 에르메인츠 백작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왜?”
그는 진심으로 의아하단 반응이었다.
“나 같은 대귀족이 한미한 남작가의 양녀를 손수 거둬주겠다는데, 대체 뭐가 싫단 말이냐?”
“그 나이 먹고 정신 못 차리고 자식뻘 되는 절 아내로 삼으려는 미친 작자를 대체 어떻게 좋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늙은 남자를 어찌 좋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뭐라? 그 무슨 무례한 망발이냐.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그런 말을 해? 너 따위가 뭔데 감히.”
“끔찍합니다, 역겹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과 결혼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하! 설마 죽으려고 이곳에 왔다? 나랑 결혼하기가 싫어서?”
에르메인츠 백작은 제대로 빈정이 상했다.
“내 아무리 예전 같지 않기로서니, 이젠 하다 하다 별 천것까지 나를 무시하고 기어오르는군.”
“가, 가까이 오지 마!”
“나 원. 어차피 결혼할 사이에 왜 이렇게 앙칼지게 구느냐? 서로 힘 빼지 말고 편하게 가자니까.”
“결혼 안 한다니까!”
“그래? 네가 나랑 결혼을 하지 않고 거기서 뛰어내리든 말든 알 바는 아닌데, 어차피 죽을 계집이면 한 번 품에 안기라도 해야 내 화가 좀 풀리지 않을까 싶어.”
에르메인츠 백작이 라일리에게 다가가는 그때였다.
백작의 뒤에서 나타난 뭔가가 불쑥 백작을 앞지르더니 라일리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에르메인츠 백작은 제 앞을 가로막은 건방진 작자가 누구인가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멈칫했다.
“……자네.”
“이게 대체 무슨 역겨운 상황인지 모르겠는데.”
에르메인츠 백작을 가로막고 선 기브넨이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바라보며 경고했다.
“그쯤 하시죠.”
예상치 못한 삼파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