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저랑 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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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랑 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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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랑 하실 건가요?
2023.03.15.
예상치 못한 방해꾼의 등장에 에르메인츠 백작은 노골적으로 언짢음을 드러냈다.
“자네가 낄 자리가 아니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주제에 어디서 내 일에 참견인가? 예의가 없군.”
“왜 제가 낄 자리가 아닙니까, 이곳은 제 ‘마탑’이고, 이곳은 제 개인 휴식공간인데.”
“아, 그럼 좀 비켜주겠나? 자네의 ‘마탑’이 아닌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계속할 테니 말이야.”
기브넨은 대답 대신 제 뒤에 서 있는 라일리를 흘겨보았다.
잔뜩 웅크린 그녀는 겁에 질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가뜩이나 새하얀 피부가 핏기없이 창백하게 질린 탓에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기절할 모양새였다.
게다가 초면이다. 사교계를 진절머리날 만큼 드나들며 여러 모임에 참석해 어지간한 얼굴은 다 익히고 있었지만, 이 여자는 분명 기브넨에게 초면이었다.
일면식이 없는 사이. 그 흔한 이름도 모르는 사이.
그래서 굳이 나설 필요가 있을까 아주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가뜩이나 피곤한 날, 가뜩이나 신경 쓰이는 것이 많은 날 굳이 업무적인 것 이외에 신경 써야 하는 일을 추가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곤란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이쪽 레이디께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일 텐데 무슨 볼일? 난 그녀와 아주 각별한 사이이네. 그러니 볼 일이 있다면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은 내게 양보하게.”
“각별한 사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누가 봐도 겁에 질린 초식동물과 역겨운 들짐승 한 마리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에르메인츠 백작은 자신만만하게 수염을 씰룩이며 말했다.
“그 아가씨랑 난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서 말이야.”
결혼?
바들바들 떠는 라일리를 무심히 바라보던 기브넨은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간다는 듯 피식 웃었다.
세간에 떠도는 에르메인츠 백작의 소문은 기브넨도 진절머리 날 정도로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제 자식보다 어린 여인을 골라 아내로 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아내로 갈아치운다는 악취미는 나라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일화였다.
그의 아내로 여식을 시집보내는 집안은 대체로 가세가 심하게 기울었다던가, 어중간한 위치의 가문들, 또는 딸이 아주 많은 집안이 대다수였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누구든 자신의 자식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변태 늙은이에게 보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말이 결혼이지, 사실은 가업을 위해 팔려 가는 거래에 가까웠다.
“에르메인츠 백작의 말이 사실입니까?”
“……일방적인 혼사일 뿐이에요.”
“그래 보입니다.”
사실 결혼이 약속된 사이라면 굳이 이 둘 사이에 더 참견할 이유가 없긴 했다.
그러나 기브넨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가 없었다. 라일리가 팔을 꽉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손짓이 너무 간절해서 내쳐버리기에는 민망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하필 상대는 에르메인츠 백작이었다. 왜인지 얌전히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조금 전 무례한 언사를 고스란히 받아낸 덕분에 기브넨의 심기 역시 언짢을 대로 언짢은 상태였으니까.
그런 와중에 기브넨은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결혼은 아직 정식으로 공표하기 전이니,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이미 말이 다 끝난 상태라니까. 공표는 다음 주네.”
“하루 전에도 깨질 수 있는 게 결혼이라는 겁니다.”
“뭐?”
“너무 단언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백께서 누누이 제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뼛속까지 새겨들으라면서.”
유쾌한 미소를 지어 보인 기브넨이 뒤를 돌아 라일리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럼 레이디께서 직접 선택하면 되겠군요.”
“……예?”
“골라주십시오.”
“……뭐를요?”
“오늘 밤 누구랑 함께하고 싶은지.”
폭탄 같은 발언에 에르메인츠 백작이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자네 지금 뭐 하자는 건가!”
“보면 모릅니까? 아름다운 레이디께 정식으로 애프터 신청하는 건데.”
“그 여인은 내 정혼녀라니까!”
“정식으로 공표되지도 않은 결혼, 당장 입으로 떠들어봐야 효력이 있을 리가.”
“……자, 자네! 이런 예의가 어디 있는가! 이런 몰상식한 짓을 하다니, 아주 개망나니가 따로 없군!”
“파티에서 아름다운 레이디께 애프터 신청을 하는 건 흔한 관례인데 뭐가 몰상식한 짓이란 겁니까?”
기브넨은 잔뜩 열이 오른 에르메인츠 백작을 아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 상황을 당황스럽게 지켜보던 라일리는 에르메인츠 백작이 날뛰는 모습에 속이 통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브넨이 라일리에게 눈짓했다. 누구든 얼른 선택하라는 재촉의 눈빛이었다. 이를 정확히 받아들인 라일리는 기브넨에게 손을 내밀었고, 기브넨은 그녀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오, 이런. 유감스럽게도 레이디께서 저를 선택하셨는데.”
“……내게 이런 모욕을 주면 후회할 걸세.”
기브넨은 그저 피식 웃었다.
작정하고 약 올리는 모습에 에르메인츠 백작은 목덜미를 잡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런, 결혼 공표보다 제 염문설이 더 빠르겠습니다.”
“이, 이런 개망나니 같은 놈! 자네에게 이렇게 고약한 취미가 있는 줄 몰랐네.”
“그럼 이번 기회에 깨달으면 되겠습니다. 제가 남의 여자를 뺏는 고약한 악취미가 있다는걸.”
에르메인츠 백작의 격렬한 외침을 가볍게 무시한 기브넨은 라일리를 이끌며 유쾌하게 말했다.
“자, 개망나니 짓 하러 갑시다.”
***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죽음을 결심해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려던 여자도, 잠시 쉬러 탑 꼭대기에 갔다가 덜컥 이름도 모르는 여인의 손을 이끌고 나오게 된 남자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기브넨의 손에 이끌려가기만 하던 라일리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기,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라일리의 물음에 기브넨은 라일리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히 대답했다.
“호텔.”
“……예?”
“에르메인츠 백작에게 그렇게 호언장담을 해놓고 여기 남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아직 리셉션이 끝나지 않았는데…… 자리를 비워도 괜찮은가요?”
“도망칠 구실이 생겼으니 차라리 잘 됐지. 잠시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옷을 가지고 나올 테니.”
기브넨은 라일리를 자신의 집무실 앞에 잠시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가 겉옷을 챙겨 입고는 외투 하나를 더 챙겼다. 그러곤 깃펜을 집어 들어 종이에 뭔가를 쓰기 시작한 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곧 발에 불이 나게 자신을 찾을 삭에게 남기는 메시지였다.
방에서 나온 그는 챙겨 나온 외투를 라일리의 훤히 드러난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밖이 춥습니다, 일단 급한 대로 이거라도 걸치십시오. 맨몸으로 나가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그러곤 텔레포트기로 가 마력 주입구에 손을 뻗은 후 순식간에 1층 중앙홀로 내려왔다. 그러곤 아주 대담하게 홀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매우 노골적이고 대담한 행보에 라일리는 할 말을 잃고 물끄러미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아예 대놓고 보란 듯 손을 잡고 이끄는 그의 행보에 수많은 시선이 꽂혔다.
이번 리셉션의 주인공이 대놓고 이름 모를 여자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모르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라일리는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이 무서워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만 바라보았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관심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에르메인츠 백작에게 보여주기식의 행보를 보이고자 했다면 굳이 이렇게 사람들의 눈에 띄면서까지 파티장을 나서는 것이 아닌, 은밀히 나갔어도 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굳이! 굳이 사람들의 눈에 띄는 행보를 보였다.
대체 왜?
파티장을 나와 최신형 부유석 마차에 올라탈 때까지 그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마스터.”
부유석 마차에 올라타자 운전기사가 넌지시 물었다. 창밖으로 소란스러워진 파티장을 넌지시 바라보던 기브넨이 태연하게 말했다.
“인그시니아로 가지.”
“알겠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대형사고였다. 대서특필되고도 남을 만큼의 대형사고. 그런데 그 대형사고를 저지른 남자는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아예 남의 일인 양, 조금의 근심 걱정도 없는 표정에 라일리는 말문이 막혔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목 끝까지 차올랐는데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건지, 아니면 젠틀하지만 묘하게 서늘한 남자의 분위기에 위화감을 느껴서인지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둘을 실은 부유석 마차가 블레스티지 내 최고급 호텔인 ‘인그시니아’의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다.
***
호텔 인그시니아.
마탑 호라이즌의 사업 확장의 일환으로 세워진 이 호텔은 직원 전부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이며, 마탑 호라이즌을 비롯한 다른 마도구 개발사들이 내놓은 최신 마도구가 구비된 최신식, 최고급의 호텔이었다.
라일리는 입구부터 웅장한 호텔의 압도적인 자태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내가 어쩌다 여기…….’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마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이런 최고급 호텔에 들어서게 된 것일까? 그것도 마탑주씩이나 되는 엄청난 남자와 함께.
“어서 오십시오, 마스터. 오랜만에 뵙습니다.”
“준비는?”
“바로 사용하실 수 있게끔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내를 도맡은 중년 남자의 명찰에는 지배인 직함이 표기되어 있었다. 그 뒤로 안내를 도울 직원들이 일렬로 서서 기브넨의 방문을 환영했다.
아주 부담스러운 연출이었으나, 기브넨은 이러한 상황이 매우 익숙한 모양인지 거리낌 없이 이동했다.
최신식 텔레포트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있는 로열 룸에 도착한 그는 제집인 양 외투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벗은 외투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기 직전 별안간 둥둥 떠오르더니 옷걸이에 날아가 가지런히 진열되었다. 동시에 목욕가운과 수건이 담긴 발 달린 바구니가 욕실 앞 진열대 위로 이동해 멈춰 섰고, 욕조에는 물 받는 소리가 들렸다.
기브넨이 별다른 것을 하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척척 진행되는 광경에 라일리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랐으나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굳이 변두리 촌구석에서 온 티를 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레이디 퍼스트?”
그가 욕실 쪽으로 눈짓했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라일리는 왠지 머리 언저리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요, 먼저 씻으세요.”
“그러죠.”
그는 욕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잠시 멈췄다. 그러곤 허공에 대고 말했다.
“귀빈께서 편히 옷을 갈아입을 수 있게 좀 도와줘.”
혼잣말인가? 아니면 주위에 누가 있나?
라일리가 두리번거림과 동시에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밖에서 직원들이 다가왔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습니다, 아가씨. 벗기기 편하게 잠시 팔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네? 아, 네…….”
아마도 바깥으로 연결된 통신 기구가 이 방 어딘가에 있거나, 마법을 썼거나 둘 중 하나인 게 분명했다. 그는 어쨌든 마법에 능수능란한 마법사니까.
드레스란 자고로 입는 것이든 벗는 것이든 손이 많이 간다. 혼자서 착용할 수 있는 드레스가 있긴 하겠지만 파티에서나 입을 법한 그런 드레스 종류는 아닐 것이다.
기브넨의 세심함 덕분에 라일리는 편하게 드레스를 벗고, 목욕가운을 받았으며 임시로 입고 있을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물소리가 들렸다. 홀로 덩그러니 남아 남이 씻는 소리를 듣는 건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이상했다. 몸 전체가 달뜬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기도 했다.
그때, 샤워를 끝마친 기브넨이 샤워가운만 걸친 채 나왔다. 라일리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살짝 벌어진 샤워가운 사이로 드러난 가슴은 척 보기에도 탄탄했다. 동적인 활동을 등한시하는 마법사들은 대체로 마르고 비실거린다는 편견을 완전히 깨부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대다수의 마법사는 육체 단련보다는 정신 단련에 힘쓰는 데다 마법이 주는 편의성 때문에 동적인 움직임과는 거리가 먼 부류라 체구가 왜소하고 마른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기브넨은 마법사임에도 기사 못지않게 훌륭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 육체 단련을 해야만 가질 수 있는 탄탄한 몸. 하필 갓 샤워를 끝마치고 나와 촉촉한 물기가 남아 있는 몸은 유달리 자극적이었다.
단단한 가슴 근육 곳곳에 맺힌 물방울을 바라보던 라일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당황했다.
“씻어요.”
“……네.”
욕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던 부분이 새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사고 회로 자체가 마비됐다. 씻는 내내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긴장감에 털을 쭈뼛 곤두세웠다 긴장을 풀길 반복하는 미친 짓은 샤워가 끝나고 욕실 밖으로 나오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욕실에서 나오자 테이블 위에는 와인과 함께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디저트들이 놓여 있었다. 기브넨이 자리를 잡고 앉았고, 이윽고 라일리에게 앉으라 눈짓했다.
라일리는 쭈뼛쭈뼛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아니, 여유로운 기브넨과 달리 라일리만 유달리 어색했다.
아무 이야기도 오가지 않는 적막이 숨이 막힌다 생각하던 그때, 기브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거 내일 아침까지 편히 머물렀다 가십시오.”
“아, 네…….”
“그리고 되도록 외출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한동안 꽤 시끄러울 것 같으니까.”
젊은 마탑주의 사생활만큼 좋은 가십거리가 없긴 하다. 아마 내일이면 수많은 추측성 기사가 쏟아지며 나라가 발칵 뒤집힐 게 뻔했다.
“왜 굳이 홀을 가로질러 나오셨어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이동할 방법이 있었을 텐데…….”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레이디께서 또 제 마탑에서 자살 소동을 벌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살 소동이라니…….”
“에르메인츠 백작과 결혼할 바에야 죽는 게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
“…….”
“호라이즌에서 사망자가 나오는 건 제 스승 하나로 족합니다.”
그는 스승의 죽음을 곱씹으며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라일리는 그제야 자신이 세웠던 계획이 얼마나 민폐였는지를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캔들 기사가 퍼지고 나면 에르메인츠 백작 측에서 결혼 공표를 고사하게 될 겁니다. 다른 남자와 추문에 휩싸인 여인을 정혼자로 내세우기 상당히 껄끄러울 테고, 꼴에 자존심은 있는 놈이니 아마도 꽤 높은 확률로 파혼까지 가게 될 것 같은데. 그 뒤처리까지는 해줄 수 없습니다. 온전히 그대의 몫이지.”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스캔들이 터지면 공께서도 난감한 상황에 놓일 텐데…….”
“괜찮습니다. 그런 귀찮은 일이 내게는 아주 흔한 경우라.”
기자들이 귀찮게 구는 건 짜증이 나겠지만, 사실 이런 상황은 기브넨에게 아주 숱하게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기브넨은 그간 온갖 스캔들에 휩싸여 왔다. 어지간한 귀족 여성들과는 다 엮여본 것 같다. 사업차 미팅으로 만나도, 우연히 마주쳐도, 집안끼리 화목을 도모하는 자리에서 밥을 먹었다는 이유로, 또 실제로 잠깐씩 사귀다 헤어진 경우까지.
온갖 스캔들로 다 엮여본 터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스캔들 목록에 성명 불상의 여인 한 명이 더 추가될 뿐이니까.
“제가 아주 큰 빚을 졌습니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됐습니다, 덕분에 돈 주고도 못 볼 재미난 광경을 구경했으니.”
기브넨은 잔뜩 열이 오른 에르메인츠 백작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와인을 마셨다.
사실 이런 눈속임으로 그 늙은이의 속을 뒤집어놓은 것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 상황이라면 누구든 나섰을 겁니다.”
“…….”
“그렇게 무시하고 돌아서기엔 당신은 진짜 죽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되면 찝찝함은 오롯이 제 몫이 될 거 아닙니까.”
라일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일이 어쩌다 이지경이 되어버린 걸까. 뒤늦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쯤 숙부님은 뭘 하고 있을까. 에르메인츠 백작은 또 어떨까…… 아마도 발칵 뒤집어졌겠지.
그 후환이 두렵긴하나 지금 당장은 눈앞의 남자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날 도와주시다니.’
외면했어도 될 문제다.
마탑에서의 자살이 염려되었다면 굳이 이런 귀찮은 수를 쓸 게 아니라, 마탑 밖으로 내쫓기만 했어도 될 일인데…….
굳이 염문설까지 자처하며 도움을 주다니.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그 자신만만한 모습이 굉장히 멋있었다.
‘구세주 같아……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겠지.
다음 날 신문 1면에 이름을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았을까.
이름 모를 변방 귀족 가 출신의 여자가 호라이즌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는 제목으로.
술이 목 뒤로 넘어가는 소리만이 간간이 정적을 깼다. 일면식이 없던 그들은 딱히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더 술이 잘 들어간 걸지도 모른다. 가만히 앉아 할 수 있는 거라곤 어색함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래서 술을 계속 마셨다. 잠이라도 오면 좋으련만 그런 것도 아니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진득하게 올라온 술기운에 기분이 좋아져 더더욱 술에 손댈 수밖에 없었다.
‘기분 좋다.’
어색함을 안주 삼아 무리하게 술을 넘긴 탓일까.
취기가 상당히 올랐다.
온몸을 감싸는 뜨거운 열감,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입안 가득 퍼지는 씁쓰름한 느낌, 타오를 듯한 식도.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듯 혼미한 느낌.
취기가 오르자 긴장이 풀렸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나? 싶었다.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실실거리며 웃을 수 있다니.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지금 기분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간의 근심과 걱정, 스트레스가 싹 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즐거운 기분에 취해 있던 라일리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살짝 달아오른 붉은 볼이 그 역시 상당히 취했음을 짐작게 했다.
라일리는 눈을 끔뻑거리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은은한 방안의 조명을 등지고 선 채로, 느긋하게 술을 마시는 그 모습은 하나의 예술작품을 연상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똑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생김새.
그저 가운 하나만을 걸치고 있을 뿐인 남자가 핏줄이 돋아난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술잔을 살짝 흔드는 모습은 그 어떤 것보다도 시각적으로 자극적이었다.
그 모습을 넋 나간 듯이 바라보던 라일리의 머릿속에 아주 무모한 의문이 솟았다.
“……저기요.”
“?”
“하나만 여쭤봐도 되나요.”
“말씀하십시오.”
기브넨의 말에 라일리는 속에 구겨두었던 무모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와 하실 건가요?”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서야 감히 입 밖에 낼 수조차 없는 맹랑한 질문이었다. 말 그대로 술에 취해 반은 제정신이 아니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기도 했다.
폭탄같이 쏟아진 물음에 기브넨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선 라일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글쎄, 어쩔까.”
기브넨의 시야에 라일리의 관능적인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샤워가운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속살, 완전히 마르지 않아 촉촉한 물기가 남아 있는 탐스러운 머리카락. 새하얀 두 볼 위에 자리 잡은 홍조.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코끝을 자극해오는 비누 향.
제정신이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세세한 부분들이 차례차례 시선을 자극하며 뇌리에 박혔다.
고가의 술, 호텔 방, 그리고 취기 어린 남녀. 달빛이 어스름한 새벽 시간대까지.
썩, 아니, 상당히 좋지 않은 조합이었다.
사실 그는 눈앞의 여인과 당장에 뭘 하려고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불과 삼십 분 전까지만 해도 이 여인과 잠자리를 가진다거나 하는 상황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과음으로 인한 취기가 문제였던 걸까.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저렇게 맹랑한 질문을 던져버리면…….
“할래?”
없던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술은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수많은 탄생을 낳았다. 흔히들 말하는 예기치 못한 사고, 한 번의 실수, 그렇게 찾아온 생명.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흔한 사고가 아닌가.
유감스럽게도, 지금 각기의 사정으로 한 호텔 방에 머물고 있는 남녀는 ‘술에 취한’ 상태였으며, 매우 젊었다.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라는 소리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 이곳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사고’가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뇌를 지배한 취기가 아슬아슬한 선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남녀에게 속삭였다.
오늘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모든 것을 잊으라고, 지금의 즐거운 기분, 지금의 느낌! 지금의 본능과 흥분에만 충실하라고.
“좋아요.”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
아이러니하게도 이 충동이 라일리와 기브넨을 동하게 했다. 통제된 일상에서 지긋지긋하게 시달리던 답답한 마음이 해방될 기회.
그 어떤 통제장치도 없이 주어진 일탈. 고삐 풀린 말이 되긴 충분했다.
입술과 입술이 동시에 맞닿았다. 서로를 끌어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푹신한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스르륵, 몸을 가리고 있던 가운이 침대 아래로 흘러내리고 은은한 조명 아래 기브넨의 탄탄한 가슴 근육이 드러났다.
침대가 꺼지는 느낌과 함께 라일리는 등 뒤에 닿는 푹신한 느낌과 위에서 눌러오는 묵직한 무게감을 동시에 느끼며 자신의 위에 올라탄 남자의 눈부신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손끝, 입술 끝이 닿는 곳마다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쾌감. 짜릿한 전율. 마음이 편안해지는 뜨거운 온기.
격정적인 흥분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툭, 이성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