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자고 갈래?
(10/31)
10. 자고 갈래?
(10/31)
10. 자고 갈래?
2023.04.01.
‘현실감이 없네.’
짐을 챙기던 라일리는 문득 이곳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자체가 참 현실성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여기서 겪었던 모든 일이 꿈은 아닐까?
일단은 원래 살던 루플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지옥 같은 새장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무섭다.
이제 새장의 문이 굳게 닫혀 있을 일도, 발에 족쇄가 채워질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그 땅에 가면 이곳에서 겪었던 일들이 꿈이 되어버릴까 봐.
거짓이, 허상이 되어버릴까 봐. 아예 일어나지 않은 없던 일이 되어버릴까 봐 두렵다.
「돌아가면 결혼 준비를 할 것이다. 이사 준비도 해야 하고, 소영주 일도 정리를 하고 다른 적임자에게 인수인계를 해야 하니까. 그동안 너도 리안스터 가문의 안주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겠지.」
돌아가면 할 게 많았다. 이제 예전과는 다르다.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손수 가정교사도 구해주겠다고 하셨다.
정말 너무나 잘된 건데, 좋은 일인데.
‘가기 싫다.’
이제 떠나면 한동안 그를 볼 수 없을 텐데.
이상하게 그 반듯하고 수려한 얼굴이 떠올랐다. 떠나기 전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그에게 감사하단 말을 못 했다. 에르메인츠 백작에게서 구해준 것도, 파혼까지 진행된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그의 덕분인데…… 결혼까지 제안함으로써 독방에 감금당할 신세를 면하게 해주었으니까.
그러나 볼 수 없겠지. 그는 바쁜 사람이니까.
짐 정리를 끝낸 라일리가 방을 나섰다. 바로 그때 괴성이 들렸다.
“왜 쟤예요, 억울해! 왜 하필 쟤냐고요! 왜 내가 라일리를 두고 이런 비참한 기분을 느껴야 해요! 대체 왜!”
“클레어, 일단 진정하렴…….”
“결혼을 반대하셨어야죠! 왜 두 분 다! 라일리의 결혼을 찬성하신 거예요! 왜요! 왜! 친딸은 난데!”
서럽게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딱히 서러울 게 없는 일인데도, 클레어는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목놓아 통곡했다.
“짜증 나! 정말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진정하렴, 호라이즌의 마탑주가 생긴 게 멀쩡해도 소문은 안 좋아. 너도 알잖니. 그의 수많은 염문설을! 너에겐 아까운 남자라니까.”
“……그 수많은 염문설이 났어도 결혼을 결심했던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잖아요!”
“……일단 진정하렴. 어쩌겠니. 일이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됐어. 리안스터 가문과 사돈이 되면 네게 들어오는 혼담도 많아질 거야.”
“그럼 뭐해요! 리안스터 가문은 3대 공작가인데! 다른 공작가에서 저를 받아나 준대요?”
“그건…….”
“내가 왜 라일리보다 못한 집안에 시집을 가야 하냐고요!”
오, 이런. 이게 통곡할 일인가. 발악에 가까운 외침을 듣고 있자니 할 말이 없었다.
에르메인츠 백작과의 혼사가 결정되었을 때는 축하한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지금은 애처럼 울고불고 떼쓰고 통곡하는 꼴이라니.
“일단 진정하고 짐부터 싸, 지금 출발 시간이 다 되었으니까. 그리고 정숙하지 못하게 무슨 짓이니! 밖에까지 소리가 들리면 어쩌려고!”
이미 다 들려요.
얼마 지나지 않아 클레어가 짐가방을 든 사용인들과 함께 나왔다.
라일리는 그녀가 화풀이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라일리를 본 클레어는 이를 악물며 라일리를 지나쳤다.
웬일이야, 바로 패악질할 거로 생각했는데.
“라일리, 나와 있었구나. 그래! 얼른 가자.”
게다가 언제나 까칠하던 숙모의 목소리도 부드럽다.
하루아침에 처우가 달라진 건 좋은데,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지금에야 그들의 실상을 깨달았으니 웃음만 나올 뿐이지, 솔직히 그들의 애정에 목매던 시절에 이런 대우를 받았으면…… 정말 가족이라 생각하고 순종적으로 굴었겠지.
“저, 라일리 아가씨.”
이제는 하녀들마저도 깍듯이 대하는구나.
“왜?”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왜,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라일리는 방향을 꺾어 라이언이 묵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왔군.”
예상치 못한 인물이 반겼다.
“……공께서 여긴 어쩐 일로?”
기브넨 리안스터, 그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가.
당황하는 라일리에게 기브넨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냥 이렇게 보내기는 아쉬워서 말입니다.”
라이언의 앞이라 그런가? 그는 정말 깍듯하게 예를 갖췄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은 덤이었다.
뭐지?
잠자코 있던 라이언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공께서 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하시더구나.”
“……예?”
“짐 가방은 옮겨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저보고 여기 남으란 말씀이신가요?”
라일리의 물음에 기브넨이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건 안 된답니다. 준비할 게 많다고…… 그냥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아.”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어르신.”
“예, 제 여식을 잘 부탁드립니다, 공.”
기브넨이 앞장섰다.
그를 따라 묵고 있는 호텔을 나온 라일리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물었다.
“여긴 왜…….”
“보고 싶어서라고 조금 전에 말했는데.”
“그건 그냥 둘러대기 위한 말인 줄 알았는데.”
“둘러대기도 맞고, 진심도 맞고.”
“…….”
“그리고 꼭 서로 용무가 있어야만 만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지 않나.”
어차피 결혼할 사이니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건 계약 결혼 아니었나?
“……서로 편의를 위해 계약한 결혼이잖아?”
“그렇긴 해도 계약 결혼이라고 해서 꼭 서먹서먹하게 지낼 필요는 없지.”
그래, 맞는 말이다. 의무적인 결혼이라 해서 그 관계까지 의무적일 필요는 없긴 하다.
그렇긴 한데…… 이 남자는 공과 사의 구별이 확실한 남자가 아니었던가?
첫 만남에서 첫 관계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청혼서를 들고 찾아왔을 때 나눴던 대화를 더듬어봐도…… 명백하게 선을 긋는 느낌이 강했는데.
서로의 편의를 위해 결혼이라는 수단을 이용하고자 한다는 매정한 말을 남겼던 남자가 맞나?
“누구보다 공과 사의 구별이 확실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뭐, 그렇긴 해.”
“그런데 왜…….”
라일리의 물음에 기브넨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적인 관심이 생겨서.”
그 화사한 웃음에, 의례적일지도 모르는 그 웃음에 순간 숨이 멎었다.
바람을 등지고 선 채 웃는 모습이 근사했다. 그림 같은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현실성이 없었다.
그는 라일리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시간 좀 내줘, 누나.”
라일리는 홀린 듯 그의 손을 마주 잡을 수밖에 없었다.
***
라일리는 긴장해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뭐, 뭘 하면 되는 거지?’
어렸을 적에는 어울려 놀던 친구들이 많았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친구들과 어떻게 놀았는지 그 기억이 흐릿했다.
에아달린 가문에 양딸로 입적한 이후로는 타인과 교류를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친구도 아닌 남편 될 남자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한껏 긴장됐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왜 그렇게 긴장해?”
“……그냥 이런 건 처음이라.”
“이런 거?”
“……다른 사람이랑 단둘이 시간 보내는 거.”
“있잖아.”
“?”
“나랑 그날 시간 보낸 거.”
“아…….”
“따지고 보면 처음은 아니네.”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고. 지금은 너무나 멀쩡하게 제정신이고.
라일리는 이 상황 자체가 무척 혼란스러웠다. 호라이즌의 마탑주와 친구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상황이라니. 게다가 단둘이서 길을 걷고 있다니.
한껏 경직된 라일리의 모습에 기브넨이 피식 웃었다.
“긴장 풀고.”
“…….”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숙녀분을 리드하는 건 신사 몫이니까.”
그는 능숙하게 라일리를 안내했다.
리셉션장에서 도주할 때 탔던 부유석 마차에 타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잔뜩 긴장한 라일리의 시야에 거리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많은 것이 보였다.
마법 반딧불이 날아다니며 도시를 밝히고, 검은색의 작은 구체가 바닥을 굴러다니며 쓰레기를 빨아당기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구름이 집 안 곳곳에 놓인 화단을 돌아다니며 비를 뿌렸다.
원래 머물던 영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 같았다.
사람들이 기본으로 한 두 가지의 마도구를 들고 다녔으며, 거리 곳곳에서 일하는 마도구들이 흔히 보였다. 심지어 애완용 마수도 보였다.
이곳 사람들은 동물이 아닌 마수를 키우는구나.
“……결혼하면 여기서 살게 되는 거지?”
“그렇지. 왜, 별론가?”
“아니, 그냥 실감이 안 나서. 여기는 신기한 것들이 참 많아, 내가 살던 곳이랑은 아예 다른 세계인 것 같아.”
“마도구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블레스티지에서만 마도구 상용화가 되어 있는 편이니 생활 환경의 차이가 크긴 하겠지.”
낯선 것, 경험해보지 못한 것투성이다. 아마 결혼하면 그 틈이 더 실감이 나겠지.
“내가 뭘 준비하면 될까?”
“준비?”
“당신의 아내로 살기 위해 뭘 준비하면 될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배운 것이 없으니,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결혼 제안이 에르메인츠 백작에게서 벗어날 좋은 기회라 판단해 덥석 받아들였지만, 이제 와보니 조금 겁이 났다.
아예 살아온 세계가 다를 텐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고 너무 아는 게 없다는 게 염려되었다.
계약 결혼이라 해도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했지. 이는 곧 리안스터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감당해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은가.
잘할 수 있을까.
에아달린 가문에 있을 때보다 더한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건 아닐까.
“준비 같은 거 할 필요 없어.”
“하지만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했잖아. 내가 당신의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직무를 잘 소화할 자신이 없어.”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했지만, 완벽한 아내의 모습을 바란 건 아닌데.”
“…….”
“그래, 뭐. 준비해야 하는 것보단, 앞으로 하고 싶은 걸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네.”
“하고 싶은 거……?”
“해보지 못한 것들, 많잖아.”
라일리는 망치로 머리를 가격당하기라도 한 듯 멍하니 넋을 놓았다.
뭐랄까,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라일리, 넌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돼. 나는 네가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그럼요, 전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거예요! 하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은걸요!」
아버지는 하고 싶은 걸 하며 살라고 했고,
「뭐 하는 짓이냐!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넌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냥 숨만 쉬면서 가만히 있어. 네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시키는 것만 해.」
숙부님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이 남자는 아버지와 같은 말을 한다. 해야 하는 게 아닌, 하고 싶은 걸 생각해보라고.
별거 아닌 말이, 왜 이렇게 와닿는 걸까. 이게 뭐라고.
“……생각해볼게.”
라일리는 그의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인지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눈을 마주치기 조금 쑥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
·
·
도착한 곳은 라일리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그와 하룻밤을 보낸 호텔 인그시니아.
다만 이번에는 목적지가 방이 아닌, 꼭대기 층 전망대에 자리한 음식점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스터,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발아래로 블레스티지의 화려한 야경이 한눈에 보였다.
“골라.”
그가 메뉴판을 라일리에게로 밀었다.
죄다 모르는 이름의 음식들뿐이라 라일리는 메뉴판을 다시 그에게 건넸다.
“난 이런 거 잘 몰라서, 당신이 적당하게 골라주면 안 될까?”
“그러지.”
퍽퍽한 빵과 싱거운 수프로 끼니를 때우기 일상이었던지라, 사실 뭘 먹든 맛있을 것이다.
기브넨이 음식을 주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고상한 재즈 클래식이 나오는 공간에서, 도시의 화려한 야경을 보며 듣도 보도 못한 진수성찬을 맛보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라일리는 소심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식사 예법에 대해서는 귀에 닳도록 잔소리를 듣고, 혼이 나서 정식으로 배우지 않아도 익힌 부분이 있었지만, 혹여 실수할까 긴장됐다.
그래서 섣불리 음식을 먹지 못하던 그때, 기브넨이 피식 웃으며 고기를 썰어 라일리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식사 자리에서까지 긴장하면 너무 무안해지는데.”
“아? 미안…….”
혼나는 게 너무 익숙했던지라,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라일리는 끝말을 애써 삼켜내고 고기를 입에 넣었다. 별로 씹지도 않았는데 육즙이 터지면서 고기가 사르르 녹았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존재하는구나.
“와.”
순간 감탄사를 터트린 라일리가 황급히 입을 가렸다. 기브넨이 이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입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맛있는 음식이 입에 들어가자, 긴장이 풀리고 식욕이 돋았다.
라일리는 본격적으로 식사를 즐겼다. 그러다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손님이 없네.”
이런 곳에서 파는 음식은 엄청 비싸겠지. 그러니 아무나 여기 와서 먹을 수 없어 손님이 없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브넨이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여기 통째로 빌렸거든.”
“……?”
“편하게 식사하라고.”
보는 눈이 많으면, 불편할 테니까.
무심한 목소리나 다정한 대답이었다. 이에 라일리는 곧바로 기브넨과의 염문설을 떠올렸다.
‘배려…… 해준 거구나.’
그것도 아주 남다른 규모로.
메뉴판에 적힌 가격만 해도 엄청 비싸던데, 여길 통째로 빌리려면 대체 얼마를 써야 하는 거야?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고마워.”
“별말씀을.”
수많은 염문설을 휩쓸고 다니는 남자인데도, 왜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무심한 듯 보이나 세심한 부분이 있다. 무성한 소문과는 달리 정말로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소문이 사실이고 꽤 방탕한 망나니여도 상관없긴 했다. 그가 도와준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
“즐거웠어, 식사 너무 맛있었고.”
식사가 끝나고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라일리는 그와 헤어져야 하는 게 왠지 아쉽게 느껴졌다. 이제 한동안 못 볼 텐데…….
“그리고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이만 갈까?”
라일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기브넨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곤 피식 웃으며 물었다.
“자고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