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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마음 둘 곳이 나밖에 없구나 (15/31)


15. 마음 둘 곳이 나밖에 없구나
2023.04.19.



 
텔레포트기를 이용해 소보스터로 도착한 기브넨은 곧바로 라일리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대도시인 소보스터에 보급된 텔레포트 기기는 단 한 개. 마법을 이용한 마도구는 찾아볼 수가 없고, 마차나 인력거가 이동 수단으로 쓰이는 등 블레스티지에 비하면 낙후한 환경이었다.

소보스터에서 라일리가 사는 루플라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마법으로 이룩한 문명의 편의를 누리며 살던 기브넨에게는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기브넨은 자유자재로 이동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으나 이곳의 땅덩어리가 워낙에 큰 탓에 마법으로 한 번에 이동하는 건 불가능한 데다, 처음 오는 곳이라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마법을 쓰기 적합한 상황도 아니었다.


“지금 마차를 잡아서 가면 반나절 정도면 루플라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반나절.”

“마법을 쓸 생각이시라면 지금 마법부에 마법 사용 허가 요청을 받아야 합니다만 여기서 요청에 대한 답을 받는 데도 반나절 정도 소요되지 않을까요.”

“…….”

“아님 제어 침을 뽑아버리셔도 됩니다. 물론 빼는 즉시 마법부에서 파견된 이들이 감사를 나오겠지만…… 말입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에게는 제어침을 심지 않는다. 허가되지 않은 마법사용은 불법이라 명시되어 있으나, 대다수의 마법사가 자신의 편의를 위해 간단하게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대체로 눈감아주는 분위기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이 마법 통제는 소수의 마법사에게 강하게 적용되었다. 소수의 엘리트들. 편의를 위한 마법만이 아닌 더 고난도의 위험 마법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의 인재들.

나라에서는 이 소수를 제어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본보기를 보였다. 모든 마법사를 하나하나 통제할 수 없기에 내린 방법이었지만, 이 제어침이 이식되는 마법사들은 지나칠 정도로 심한 통제를 받았다.

마법을 쓸 때마다 마력 데이터가 마법부로 전송되며 감시를 받았고, 편의를 위한 간단한 마법의 사용은 몇 번 눈감아주고는 했으나 기준 이상의 마법을 사용했다 판단할 경우에는 감사를 나와 사람을 들들 볶으며 조사하고 엄청난 벌금을 부과했다.

벌금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감사를 나와 사람을 볶아대는 짓거리는 스트레스였다.


“……마차 잡지.”

마법의 편의성이 극대화된 시대에, 마법사의 마법 사용을 통제하는 아이러니한 세상에 환멸을 느끼며 기브넨은 마차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

·

·

그가 루플라, 그러니까 라일리의 집에 도착한 것은 새벽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삭은 루플라에서 가장 좋은 호텔 방을 잡기 위해 이동했고 기브넨은 라일리가 무사히 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에아달린 남작가로 향했다.

그는 사뿐히 나무 위로 뛰어올라 이윽고 밖에서 투시 마법을 사용했다.

라일리는 어느 방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신경이 거슬리는 방 하나가 있었다.


‘……누군가 침입한 흔적.’

어질러진 방, 활짝 열린 창문.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흙과 나뭇잎 부스러기.

이질적인 방의 모습, 에르메인츠 백작의 동선. 보이지 않는 라일리의 모습. 타이밍 좋게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기브넨은 라일리에게 위험이 닥쳤음을 확신했다.

기브넨은 귀에 꽂혀 있던 제어침을 있는 힘껏 뽑아내고 마력을 확장해 투시 반경을 넓혔다.

그러곤 서둘러 라일리를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삭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

극적인 순간 등장한 극적인 인물.

에르메인츠 백작은 너무 놀란 탓인지 뒷걸음질 치며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둥둥 뜬 자객들 사이로 유유히 걸음을 옮긴 기브넨이 라일리의 앞에 멈춰 섰다.

밧줄에 묶인 채, 흙먼지를 뒤집어써 엉망이 된 꼴을 마주하는 그의 얼굴에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그는 조심스레 밧줄을 풀고, 그녀의 옷을 털어줬다. 그러곤 바들바들 떠는 작은 몸을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괜찮아?”

“…….”

당연하게도 괜찮지 않았다. 라일리는 너무 놀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자,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기브넨은 대답 대신 라일리를 품에 안은 후, 하늘에 붕- 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향해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자, 허공에 떠 있던 이들의 몸이 순식간에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살수들 전부 몸에 가해진 엄청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했다.


“아내가 보고 싶어 먼 타지까지 달려왔더니.”

“…….”

“내 사랑스러운 아내는 없고 야밤에 아내를 보쌈해 가버린 쓰레기들만 있지 뭡니까.”

“……아내?”

“모르셨습니까? 아실 줄 알았는데. 저와 그녀의 결혼을 치정극에 엮어 기사를 낸 게 그쪽 아니었나.”

에르메인츠 백작은 할 말을 잃었다.

결혼? 아내?


「그놈이 정말 그 여자와 결혼한다는 말이 있는가?」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건 그냥 자극적으로 보도하기 위해서 부풀린 겁니다.」

분명 매수한 기자는 자극적인 보도를 위해 지어낸 말이라 했는데?


“자네가 저 계집과 결혼을 한다고?”

“그렇습니다만.”

“……왜?”

에르메인츠 백작은 둘의 결혼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네가 뭐가 아쉬워서?”

“제가 누구와 결혼하건 어르신께서 상관하실 일은 아니라 보는데.”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 그러네. 자네처럼 아쉬울 게 없는 놈이 대체 왜? 미천한 남작가의 여식과 결혼한다는 건가. 앨튼은 이를 알고 있는 건가?”

“언제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제 아버지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는 겁니까.”

“…….”

“그러는 그쪽은 뭐가 아쉬워서 대체 이 같은 멍청한 짓을 저지른 건지. 거동도 불편한 몸으로 멀리까지 나와 무슨 추태입니까.”

“그, 그건…….”

에르메인츠 백작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얼마나 당황한 것인지 누런 기가 돌던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터질 것 같았다.


“노망이 났으면 얌전히 집구석에 처박혀 있던가.”

기브넨이 입꼬리를 비틀며 에르메인츠 백작을 비웃었다. 평소 가지런히 정돈된 신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한때는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자가, 가녀린 레이디의 목숨을 뺏으려고 전문 살수까지 고용하다니. 정말 없어 보입니다, 어르신.”

“…….”

“이 정도면 군중들도 ‘남의 여자를 뺏어야 했던’ 저를 이해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기브넨이 어디론가 손짓했다. 숨어 있던 삭과 함께 다수의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의 대다수는 무장한 기사. 소수의 몇몇은 손에 펜과 수첩,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기자구나!

에르메인츠 백작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아뿔싸.’

그를 향해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기브넨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어르신, 더러운 언론전은 당신만의 특기가 아닙니다.”

“…….”

“내 주특기이기도 하거든.”

“자네…… 정말 우리 가문이랑 척이라도 지겠다는 건가?”

“그건 본인이 결정할 일입니다.”

“…….”

“얌전히 입 닥치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아예 척을 지던가. 어느 쪽 출혈이 더 클지 의문이긴 합니다. 아드님께서 아직 마탑주 자리를 두고 경쟁 중이지 않습니까.”

“…….”

“그쪽 마탑주 후계자들 싸움이 쟁쟁하다던데…… 그 실력으로 가능성 있습니까?”

에르메인츠 백작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하나 그뿐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새파랗게 어린놈이 쏟아내는 막말에 찍소리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둘의 대화를 구경하던 이들이 눈치를 살폈다. 제아무리 요즘 잘나가는 마탑주라 한들, 한때는 구국의 영웅이었던 이에게 너무 심한 언사가 아닌가 싶어서였다.


“뭐 하나, 얼른 모셔가지 않고.”

기브넨의 말에 삭이 데리고 온 기사들이 급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

에르메인츠 백작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당황하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거동조차 쉽지 않은 그의 발버둥은 날개 찢긴 나비의 날개짓같이 초라할 뿐이었다.

그가 뒤늦게 발악하듯 소리쳤다.


“왜 나만 잡아가나! 저놈이 사람을 상대로 마법을 썼어! 이것도 엄연한 불법인데, 왜 나만 잡아가냐니까!”

이에 기사단이 멈칫했다. 그러자 기브넨이 으쓱하며 말했다.


“자진 출석할 테니 가지. 여기 증인들도 많은데.”

잠시 주춤한 기사단이 에르메인츠 백작 일행과 함께 기절해 있는 살수들도 전원 포박해 끌고 갔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기브넨은 라일리를 품에서 떼어냈다. 그 순간 라일리가 그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가느다랗고 새하얀 손가락이 처량하게 떨렸다.

잔뜩 겁을 먹은 모양새에 기브넨이 그녀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무서웠겠네.”

“…….”

“이제 괜찮아.”

흙과 피로 엉망이 되어버린 걸로도 모자라 날도 추운데 얇은 잠옷 하나만을 달랑 걸치고 있어 더 가녀리고 위태로워 보였다. 기브넨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다.


“감기 걸리겠다.”

“…….”

“일단 이동하지.”

그가 손을 뻗자 푸른 포탈이 생성되었다. 삭이 급히 예약한 호텔 룸과 연결해놓은 포탈이었다.

기브넨은 포탈로 들어가기 전에 몸을 돌려 삭에게 명령했다.


“저놈들 다 붙잡아놔.”

“네.”

그렇게 기브넨은 라일리를 안은 채 포탈 속으로 사라졌다.

·

·

·

라일리는 기브넨의 품에 안긴 채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여기가 어디?”

“잠깐 머물고 있던 호텔.”

“……왜 여기로?”

“그 집이 누나한테 편한 장소는 아닌 것 같아서.”

그의 말에 라일리는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확실히 에아달린 저택은 편한 장소는 아니었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동이 트면 데려다줄게.”

“……응.”

“일단 이거부터 마시고.”

그가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아주 향긋한 냄새가 나는 차였다. 기분 좋은 향이라 긴장했던 몸이 조금 풀렸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에르메인츠 백작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여서 동태 확인도 하고 겸사겸사 누나도 보고.”

“……..”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그 정신 나간 노인네가 설마 이런 짓까지 저지를 줄이야.”

“……구해줘서 고마워. 이 빚을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빚이라니, 아내 될 사람을 보호하는 건 남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

“어쨌든, 이렇게 다시 보니 좋네.”

그가 피식 웃으며 라일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얼마 만이지? 거의 한 달하고도 보름 만인가.”

잘생겼다.

오랜만에 본 그는 이전보다 더 잘생겨진 것 같았다.


“……살이 좀 빠졌어?”

“그런가? 요즘 꽤 바쁘긴 했는데.”

“…….”

“나 안 보고 싶었나?”

“…….”

“섭섭하네.”

그가 답지 않게 입술을 삐죽이며 경직된 분위기를 풀었다.

그런 그를 빤히 응시하던 라일리는 충동적으로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잠시 움찔하던 기브넨이 피식거리며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어리광이야?”

“……옆에 있어줘.”

라일리는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기브넨은 그런 그녀를 밀어내지 않고 얌전히 앉아주었다.

밀착된 몸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뜨거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 추워서, 정말 죽겠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따뜻함을 넘어선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감쌌다.

그의 너른 품은 맞춤형으로 제작된 것처럼 편안했다.

그 어떤 푹신한 침대나 이불도 이보다 따뜻하고 포근하진 않을 것 같다.


“……죽을 거라 생각했어.”

“…….”

“……정말 무서웠어.”

생전 처음 겪어보는 극한의 공포.

아득해진 정신 너머로 여태 살아왔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죽음을 실감했고, 살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살아온 인생의 파노라마는 죽음에 임박한 이들에게나 보이는 거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마지막에 떠오르는 것은 기브넨의 얼굴이었다.

아버지도, 10여 년을 함께 했던 숙부님 일가도 아닌, 고작 3일. 단 3일을 함께했던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마지막에는 아버지가 아닌 당신이 떠오르는데…… 미친 듯이 보고 싶었어.”

“…….”

“……나도 모르게 당신한테 의지하고 있었나 봐요. 서로 아는 것도 없는 사이인데. 단 한 번, 아니 두 번의 호의를 받은 사이일 뿐인데. 딱 그 정도 사이일 뿐인데 아버지 얼굴이 아닌 당신 얼굴이 아른거리는 게 너무 어이가 없었어.”

“…….”

“……그런데 진짜 와줬네.”

힘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아기의 옹알치럼 들리기도 했다. 기운이 없는 탓인지, 제정신이 아닌 탓인지 발음이 뭉개져 나왔지만, 기브넨은 단어 하나하나 전해지는 의미를 곱씹었다.

그는 라일리를 품에서 떼어내 눈을 맞췄다. 잔뜩 겁에 질린 그 얼굴을 보고 기브넨은 가엾다는 듯 살며시 웃으며 피 묻은 입술을 엄지로 지분거렸다.


“가엾게도.”

“…….”

“마음 둘 곳이 나밖에 없구나.”

그는 어째서인지 매우 기뻐 보였다. 순간 반짝이는 눈동자가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으나 입술을 지분거리는 손길은 무척 부드러웠다.


“그래, 계속 날 의지해.”

“…….”

“나만 보고.”

“…….”

“나만 믿고.”

“…….”

“나만 사랑해.”

나만을 위해 살아봐.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은 언령처럼 단호했다. 언뜻 들으면 어린아이 같은 투정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그 속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것은 분명한 그의 사심이자 집착이었다.


“그럼 지켜줄게.”

“…….”

“평생.”

순식간에 입술이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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