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이번엔 술 핑계도 못 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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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번엔 술 핑계도 못 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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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번엔 술 핑계도 못 댈 텐데
2023.04.22.
명백한 충동이었다.
그러나 전과 다른 점은 이번엔 술기운도 뭣도 없는 완벽한 맨정신이란 사실이었다. 그러나 술에 취했을 때보다 훨씬 더 온전하지 않은 상태임은 분명했다.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던 잠옷이 스르륵 아래로 떨어지고 따뜻한 물줄기가 나신 위를 적셨다. 물줄기에 흙과 피가 뒤엉킨 덩어리들이 흘러내리고, 새하얀 몸 군데군데 피멍과 찢어진 상처가 드러났다.
물이 닿자 욱신거리는 통증이 그대로 전해졌고 이를 버티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몸을 기브넨이 가볍게 받아냈다.
“도와줄게.”
라일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옷을 입은 채 물줄기를 등지고 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브넨을 빤히 올려다보기만 할 뿐.
함께 씻는다는 것, 누군가 씻는 걸 도와주는 상황은 분명 부끄러운 상황일 텐데도 라일리는 부끄러움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그와 더 가까이 닿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라일리가 손을 뻗어 물에 흠뻑 젖은 그의 셔츠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열 때문에 돌아버린 게 분명했다. 그러나 몸은 머리를 따라주지 않고 철저하게 감정적으로 움직였다.
기브넨은 그녀의 상처를 마법으로 치료해 주었다. 새하얀 몸을 가득 뒤덮은 멍과 상처들이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통증도 멎었다.
“이제 안 아프지?”
“……응.”
기브넨은 축 늘어진 라일리를 끌어안았다. 젖은 셔츠의 축축한 느낌이 맨살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렇게 다시 입을 맞췄다.
물기를 닦을 새도 없이 욕실에서 나와 침대로 직행했고, 침대로 가는 과정에서 기브넨이 입고 있던 옷도 하나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작스럽게 덮쳐온 한기와 부끄러움에 몸을 떨기도 전에 뜨거운 몸이 바짝 밀착되었다.
'생각보다 크고…… 생각보다 무겁고, 생각보다 따뜻하네.'
술에 취했던 첫날밤과 달리, 이번엔 그의 몸이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의외인 것은 그의 몸이 생각보다 크고, 단단한 근육질이라는 사실이었다. 청순하고 아름다운 얼굴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남자다운 몸에 조금 놀랐다.
골격이 큰 몸은 근육이 다부진 만큼 짓눌러오는 무게감이 상당했다.
게다가 특이한 것은.
“……흉터가 많네?”
전장을 휩쓸고 다니는 용병이나 기사도 아닌데 기브넨의 몸에는 흉터가 많았다.
마법사들은 힘쓰는 일, 특히나 몸을 쓰는 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더 의외라고 여겨졌다.
“흉한가.”
“아니…….”
흉터, 흉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 전혀 흉하지 않았다. 그는 얼굴만큼이나 흉도 예뻤다. 그의 다부진 골격과 잘 어울렸다. 좀 더 야성적이고, 거친 느낌을 자아냈다.
라일리는 저도 모르게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손에 닿는 단단한 느낌. 구조가 전혀 다른 남자의 상반신이 주는 그 생경한 느낌…… 손끝으로 전해지는 그 짜릿함만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기브넨의 손이 라일리의 머리카락을 헤집었고, 그의 입술이 목 언저리에 닿았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짜릿한 전율과 함께 열감이 피어올랐다.
라일리는 자꾸만 베베 꼬이고 움츠러드는 몸을 바로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자 그 모습이 웃기다는 듯 기브넨이 웃으며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힘 빼.”
“…….”
“긴장하지 말고.”
라일리는 있는 힘껏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이젠 모르겠다. 복잡한 생각도 완전히 날아갔다. 될 대로 되란 식이었다. 사람이 너무 기분이 좋아도 몸이 주체되지 않을 정도로 떨릴 수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이번엔 술 핑계도 못 댈 텐데.”
괜찮겠냐 묻는 것 같다.
라일리가 반문했다.
“……그만하라면, 그만할 거야?”
그러자 그가 웃었다.
“아니.”
그의 손가락이 목덜미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라일리는 그런 기브넨의 몸에 매달린 채 눈을 감았다.
***
“아…….”
목이 찢어질 것만 같은 갈증에 라일리는 눈을 번쩍 떴다. 순간 납덩이를 수백 개는 달아놓은 것 같은 무게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뿐만 아니라 뼈 마디마디가 쑤시고 아팠다.
'뭐지?'
첫날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에 라일리는 당황했다.
두 발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몸은 심지어 펄펄 끓기까지 했다.
“뭐 줄까.”
옆에서 기브넨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단정하게 옷을 입은 상태였다.
“무, 물…….”
기브넨이 호텔의 직원을 부르고 물과 약, 그리고 미음을 부탁했다.
멍하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일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
“스스로 몸 상태에 대한 자각이 없나?”
“…….”
“사람을 아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던데.”
“?”
“도중에 시체처럼 축 늘어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내가 뭔가 잘못했나 심각하게 고민했지. 살면서 침대 위에서 상대가 기절하는 일을 경험할 줄이야.”
그는 전날 밤의 일을 회상했다.
·
·
·
“이봐.”
기브넨은 축 늘어진 라일리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는 라일리를 흔들었지만 미동도 없었다.
“누나.”
아무리 애타게 불러봐도 묵묵부답.
자세히 보니 안색이 시체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덩달아 기브넨도 사색이 되었다. 그는 당황해서 라일리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불규칙적이긴 해도 호흡하고 있다. 그렇다면 심장은? 쿵, 쿵, 쿵. 규칙적으로 뛰고 있다.
그럼 자는 건가?
기브넨은 문득 그녀의 몸이 상당히 뜨겁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히 흥분감 때문에 달아오른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몸이 안 좋았던 건가.
마법으로 간단한 외상은 치료할 수 있지만 내상은 치료할 수 없다.
“하.”
그렇게 기브넨은 침대 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경험에 할 말을 잃었다. 이 심정, 이 느낌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후 급히 호텔의 여자 직원을 불러와 새 옷을 갈아 입히게끔 지시했다. 의사를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의사가 와서 맥을 짚고,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몸살 기가 심한 모양입니다. 잘 먹고, 푹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기브넨은 안도했다.
동시에 허탈했고 어이가 없었다.
여러 의미로 잊지 못할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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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끔찍한 경험이야, 코아푸 열매 수프를 삼시 세끼 내내 먹을 때보다 더 끔찍한 경험을 선사해 줘서 고마워.”
코아푸 열매는 쓴맛이 나는 열매로, 해독작용이 탁월해 독에 중독되었을 때 주로 사용하는 약재였다.
“아프면 말을 했어야지. 마법은 외상은 고쳐도 내상은 못 고쳐.”
“……기절했다고 내가?”
“그래.”
“아…….”
생각해 보니 확실히 납치당하기 전에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
“이게 말로만 듣던 복상사인가 싶어 순간 심각했어.”
“미, 미안…….”
“아픈 게 미안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다음부턴 신경 좀 써. 아무 데서나 픽 쓰러지면 곤란해.”
“……응.”
풀이 죽은 라일리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기브넨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
“이건 뭔데.”
기브넨이 라일리의 앞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꾸깃꾸깃한 편지였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아서 썼던, 기브넨에게 주려 했던 편지. 편지를 쓰고, 버리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겨우 완성하고도 차마 전할 용기가 없어 감춰두었던 편지였다.
“옷 갈아입힐 때 소매 주머니에서 발견한 건데.”
“……읽어봤어?”
“어.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피랑 흙으로 범벅이 돼서 읽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복원 마법은 아주 간단한 마법이지.”
“……아.”
“편지 내용대로라면 나랑 파혼하고 싶다는 뜻 같은데.”
“…….”
“왜.”
“그야…….”
라일리는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싫어서 파혼을 요구할 거였으면 어제 그렇게 매달리지도 않았을 거고.”
“…….”
“뭔데.”
“당신이…… 곤욕을 겪고 있는 것 같아서.”
곤욕?
무슨 말인가 라일리의 말을 곱씹던 기브넨이 뭔가 생각이 난 모양인지 짧게 반문했다.
“설마 가십지?”
끄덕.
소심한 끄덕거림에 기브넨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깟 게 뭐라고 신경 쓰지? 신경 쓸 거리도 안 되는데.”
“…… 좋은 일은 아니니까.”
“내가 그런 구설수에 오르는 게 하루 이틀이던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이 이걸 신경 썼어?”
“이번엔 경우가 다르니까.”
“치정설이라?”
끄덕.
기브넨은 라일리를 빤히 바라보더니 들고 있던 편지를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그럼 이 편지도, 여기 적힌 내용도 사양하지.”
“…….”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야. 심각한 일도 아니고. 그리고 곧 잠잠해질 거야.”
더 큰 가십으로 뒤덮어버릴 예정이니까.
기브넨은 뒷말을 생략했다.
“마음고생 했겠네.”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다정한 말투에 라일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왜인지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괜찮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해주는 게 기뻤다.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니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울먹이는 그때 물과 약이 도착했다.
“약 먹자.”
라일리는 동그란 알약과 물 한 컵을 받아들고 꿀꺽 삼켰다. 이윽고 미음이 도착했다. 그는 자연스레 숟가락을 쥐더니 미음을 떠서 라일리 앞으로 내밀었다.
“아 해봐.”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라일리는 당황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먹여주려고?”
“물 마실 때도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던데.”
“…….”
“먹여줄게.”
“원래 이래?”
“뭐가.”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래? 원래…… 이렇게 다정한 편이야?”
분명 처음 그를 보았을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신사적인 느낌은 있었으나, 다가가기 꺼려지는, 명백하게 선을 긋는 느낌이었지. 다정하고 자상한 모습도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라일리가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기브넨이 피식 웃었다.
“어떤 것 같은데.”
“…….”
“내가 아무에게나 이렇게 자상한 사람으로 보여?”
그는 뜨거운 미음을 호, 호 불었다. 그러곤 적당히 식은 숟가락을 입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아무한테나 이런 짓 안 해.”
“그럼 왜…….”
“누나는 아무나가 아니잖아.”
라일리는 말없이 미음을 받아먹었다.
느낌이 이상해. 괜스레 간질간질거려.
'별다른 의미가 없는 말인 걸 알면서…….'
“옳지, 잘 먹네.”
“…….”
“착해.”
라일리는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그가 먹여주는 미음을 다 받아먹었다.
기본적인 간조차 되지 않은 미음일 뿐인데, 이상하게 맛이 좋았다.
***
약 기운이 돌아 다시 잠에 빠져든 라일리의 모습을 보고 기브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텔레파시로 삭을 불렀다.
- 부르셨습니까, 마스터.
- 거기 좌표 연결해, 포탈 열 거니까.
- 좌표 연결했습니다.
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브넨이 포탈을 열고 이동했다.
포탈을 지나 도착한 곳은 울창한 숲이었다. 나무들만 무성하게 자라있는 숲은,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도 없어서 길조차 나 있지 않았다.
“총 다섯 명, 이게 다인가?”
“예.”
기브넨은 나무에 묶여 있는 다섯 명의 장정을 바라보았다.
어제 마법으로 날려버린 여파 때문인지 그들은 피투성이였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그러나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달리 입은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사,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저, 저희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발…….”
기브넨은 우습다는 듯 실소를 흘리며 쪼그리고 앉아 그들과 눈을 맞췄다.
“사람 목숨 가지고 돈 벌어먹는 버러지들이 가족을 운운하고,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 살려달라?”
“…….”
“누가 보면 억지로 떠밀어 하는 일인 줄 알겠군. 이런 일을 선택한 건 너희 자유의지일 텐데?”
이놈들은 항상 이런 식이다.
살려달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을 놈들이 과연 몇 명이나 살려줬을까.
사람을 죽이는 의뢰를 받아 돈을 버는 작자들이 '살려달라'라는 그 간절한 외침을 무시하지 않고 돌려보낼 정도의 양심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을 하지도 않았겠지.
기브넨은 라일리의 몸을 더듬던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더니, 이윽고 한 놈의 목을 움켜잡았다.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
“크어억!”
“너희가 자주 하는 말이잖아.”
어렸을 때부터 온갖 자객들을 상대해야 했다.
새파랗게 어린 시절, 자신을 감싸다 죽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들은 살려둘 가치가 없는 쓰레기들이다.
살려준다면, 이 일을 그만둘까? 아니 그들은 또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돈을 벌겠지.
그리고 어차피 여기서 이놈들을 살려둬봤자 에르메인츠 백작이 증거인멸을 위해 이들을 죽이겠지.
“내가 아니더라도 너흰 그 늙은이한테 죽을 텐데.”
“즈, 증언하겠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습니다, 자백하겠습니다. 전부…….”
“아니, 필요 없어. 그깟 증언 의미 없거든.”
애초에 삭을 통해 기자들을 부르고, 기사단을 부른 것은 목격자, 그러니까 증인 확보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쇼였을 뿐이다.
어차피 이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법정으로 끌고 간다 한들 묻힐 것이고 묻히지 않는다 해도 제대로 된 처벌조차 못 할 게 뻔한데 이들의 증언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목적은 거래지, 법적인 처벌이 아니다.
“내 손을 직접 더럽히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
“뭐 별수 없나.”
기브넨이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에서 뻗어 나온 빛이 그들을 감싸더니, 그들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져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말 그대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기브넨은 손을 털어낸 후 몸을 일으켰다.
“가자.”
“예, 마스터.”
삭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