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내 시간이 얼만 줄은 알고?
(17/31)
17. 내 시간이 얼만 줄은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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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내 시간이 얼만 줄은 알고?
2023.04.26.
라일리는 고열에 시달렸다.
약을 꾸준히 먹였음에도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 보았을 때보다는 안색이 좋았다.
기브넨은 일정이 바빴음에도 마탑으로 복귀하지 않고 라일리의 옆을 지켰다.
“이제 에아달린 저택으로 돌려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법부에서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블레스티지 복귀 즉시 마법부에 들르라고 말입니다.”
“노인네는 어떻게 됐지?”
“풀려나 자택 귀가 조치되었답니다.”
“예상대로군.”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자객들이 그녀를 겁탈하려는 상태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에르메인츠 백작이 자신은 직접 위해를 가한 적이 없고, 그 자객들도 갑자기 돌변해서 자신을 위협하고 그런 짓을 했다고 잡아뗀 모양입니다.”
“그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믿어 준다고?”
“쉬쉬하는 분위기이긴 합니다.”
“이 사실, 라일리는 모르게 해.”
아마 에르메인츠 백작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상심이 클 것이다.
“확실하게 에르메인츠 백작을 법정으로 끌고 가려 했다면, 조금 더 빨리 도착해야 했습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어요. 아니면 아예 작정하고 더 기다리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기브넨은 고개를 돌려 잠든 라일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야윈 모습. 그깟 치정설 하나에 마음고생 했을 게 눈에 훤하긴 했다.
이번 일에 대한 보도가 나가면, 라일리 에아달린의 신상이 노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할 생각이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게 맞는 건가 싶긴 하다.
한동안 떠들썩할 텐데 그 피해자인 그녀는 그 시끄러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최대한 막는다고 막아도 일이 커지면 그녀의 신상이 노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어차피…… 실질적으로 에르메인츠 백작을 재판까지 넘겨서 벌을 받게 하는 게 쉽지 않다.
그 사건의 당사자였던 자객들은 전부 죽여버렸고 에르메인츠 백작은 거대 변호인단을 꾸려 최대한 유리하게 법정 싸움을 이끌 것이 뻔했다.
확실한 증거와 증인이 부족하고, 무엇보다도 피해자인 라일리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
라일리가 살아 있는 데다 살인의 주최자였던 자객들이 모두 죽어버려 살인 미수죄는 어림도 없고, 기껏해야 상해죄 정도로 끝날 게 뻔한 싸움. 그 형량도 한없이 가볍겠지. 대충 막대한 벌금을 물리고 끝내는 정도로 마무리될 것이다.
그런 싸움에 굳이 라일리를 참전시켜 구정물을 뒤집어씌울 필요가 있을까. 가뜩이나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상태인데.
“하.”
짧게 한숨을 내쉰 기브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삭.”
“예, 마스터.”
“기자들 입 다 막고, 사진 수거해와.”
“……예? 갑자기요? 왜요?”
삭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 사건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면 기브넨에게 따라다니는 치정설에 대한 여론을 한 번에 뒤집을 수가 있는데?
전 약혼녀를 죽이려 했던 에르메인츠 백작은 치정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타격을 입을 게 분명한데?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왜?
“그냥.”
“…….”
“흥 떨어졌어.”
미친놈이야?
뭐라 말을 하려던 삭은 라일리를 바라보는 기브넨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이 모든 걸 덮고 가겠다는 이유.
“마스터.”
“뭐.”
“거짓말을 참 잘도 하십니다.”
“뭐가.”
“말과 행동은 더 따로 노시고요.”
그런 자상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다른 분들에게도 보여주셨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요. 제 명예도, 남의 명예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자가 맞나 싶은 선택이었다.
“그래도, 좋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그는 이 모든 사건을 덮어버리기로 했다.
오로지 한 레이디를 위해서.
“나는 남작가에 다녀오지. 라일리가 사라져서 집안이 발칵 뒤집혔을 테니.”
***
“라일리가 없어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게…… 창문은 열려 있고, 이부자리는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 라이언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휘청였다.
아침부터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남작 부인이 옆에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도망친 건 아니겠죠……?”
“도망? 대체 무슨 이유로?”
“그야…… 앞에선 좋은 척해놓고 뒤로는 이 결혼이 싫었을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우리에게 남아있던 억하심정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 애 안 지켜보고 뭐한 거요?”
“어머, 전 무슨 놀고먹는 줄로만 아세요? 저도 모임에 참석하고 이제 막 집에 오는 길이라고요!"
라일리가 사라졌다는 걸 저녁이 되고서야 알게 된 라이언과 남작 부인은 패닉에 빠졌다.
저택의 사용인들 역시 라일리가 사라진 사실을 어제저녁부터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필이면 어제 일 때문에 라이언은 귀가하지 않았고, 남작 부인 역시 저택을 비운 탓에 오늘 오전에야 라일리가 사라졌다는 보고가 전해진 것이다.
“아가씨께서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부르기 전까지는 방에 아무도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또 최근 워낙 무리하셔서 그저 잠을 좀 오래 자는 것인 줄 알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래도 방을 들여다봤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걸 꼭 사용인들만은 탓할 수 없는 노릇인 게, 한평생 관심 밖이었던 아가씨를 습관적으로 챙기는 건 그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습관이란 오랜 시간 굳어져야 한다고, 최근 라일리를 향한 대우가 변하긴 했지만 클레어처럼 지극정성으로 챙기기엔 조금 더 적응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탓도 있다. 백만장자 아니 억만장자에게 시집을 가게 생겼는데 그녀가 가출을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라일리가 ‘납치’ 당했을 거란 가정은 애초부터 배제한 상태였다.
창문을 열고 자객이 침입해 납치하거나 암살하는 이야기는 그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에 불과했다. 거리에서 유행 중인 소위 ‘막장극’에서나 볼 법한 일이 아닌가.
라일리가 스스로 도망쳤다는 쪽에 무게가 실렸다.
“당장! 당장 나가서 라일리를 잡아 와! 당장!”
라이언은 새하얗게 질려 소리쳤다.
이에 저택의 사용인들이 총동원되어 라일리 찾기에 투입되었다.
이번 결혼이 파투나면 정말 모든 게 끝이다. 에아달린 가문의 미래는 오로지 라일리의 손에 달렸다.
당장 출세 길이 코앞이었는데…… 그렇게 갈망하던 중앙 진출이 바로 코앞까지 당도했는데!
“우리가 좀 홀대하긴 했어도,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게 어딘데! 하!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이 딱 맞다니까요!”
“시끄럽소! 그런 소리 할 시간에 당신도 나가서 라일리나 찾아보시오!”
“어머, 왜 저한테 화를 내요? 애초에 당신이 그 노인네한테 시집보내려고만 안 했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됐죠. 걔가 천성이 순한 애라 여태 고분고분하게 굴었는데 당신이 그 노인네한테 시집보내려고 한 다음부터 애가 이상해진 거잖아요.”
“당장 어디든 보내버리라고 닦달한 게 누군데!”
서로를 탓하며 언성이 높아진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클레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드디어 제 주제를 파악한 모양이네. 그래, 진작 이랬어야지.'
클레어는 라일리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주인님, 그, 저…… 호라이즌의 마탑주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라이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리안스터 공이?”
오늘은 무슨 날인가?
왜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줄줄이 쏟아지는가. 하필 라일리가 사라진 지금 이 먼 곳까지 행차한 이유가 뭐지?
“호라이즌의 마탑주께서 왔대요? 여기까지요?”
어느덧 아래층으로 내려온 클레어가 기브넨의 방문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파혼하려는 거지!’
클레어는 그가 파혼을 위해 친히 여기까지 왔다고 확신했다.
라이언 역시 클레어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덜컥 겁이 났다.
“당장 접견실에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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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서 오십시오, 리안스터 공.”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장인어른.”
‘자, 장인어른?’
순간 라이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짜릿한 전율이 온몸에 흘렀다.
호라이즌 마탑주가 장인어른이라고 불러주다니. 어감이 참 좋았다. 라이언은 어쩌면 그가 파혼 이야기를 목적으로 이곳에 방문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드, 들어오십시오. 공.”
라이언이 부랴부랴 그를 접견실로 안내했다.
‘라일리가 없는데 라일리를 불러 달라 하면 어쩌지…….’
라이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라 변명을 해야 할까 머리를 쥐어짜는 동안 접견실에 도착했다. 기브넨은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인 마냥 느긋하게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라이언은 초조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다과를 내어왔다.
라이언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께서 이 먼 곳까지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아내 될 사람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있어야지 말입니다.”
'역시 라일리를 보러 왔구나. 이를 어쩐다…….'
“아? 하하, 그러시군요. 하면 라일리를 보러 이 먼 곳까지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허허, 이를 어쩌나. 타이밍이 좋지 않아 서로 엇갈리게 되었군요. 유감스럽게도 지금 라일리는 외출 중이라 집에 없습니다.”
기브넨이 의아하다는 듯 라이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갔습니까?”
라이언은 찔린 탓인지 급히 횡설수설하며 핑계를 댔다.
“그, 그것이…… 아, 그렇지. 안사람과 옷을 사러 나갔습니다.”
“그렇습니까.”
기브넨이 담담하게 대답한 후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곤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
“여식을 늙은 변태에게 팔아넘기려 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장인어른께선 여식에게 너무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라이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손을 달달 떨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 무슨 말씀이신지…….”
“여식이 실종된 마당에 태연하게 절 맞이하는 걸 보면 그녀가 이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잘 알 것 같습니다.”
“……자, 잠깐 그, 그걸 어떻게……?”
“그야 라일리는 제가 안전하게 잘 데리고 있었다고 말해주러 온 거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라이언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물었다.
“왜 공께서 저희 라일리를……?”
기브넨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그러는 장인어른께선 여식이 납치당하고 꼬박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 뭘 하신 겁니까?”
“……나, 납치요?”
“보아하니 여식이 납치당한 것도 몰랐던 모양이네. 아무리 양부모라지만 그래도 아예 남도 아니고 엄연한 혈연관계인데 너무한 거 아닌가.”
라이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런 그를 향해 기브넨은 조곤조곤하게 쏘아붙였다.
“내가 조금만 늦었으면, 내 신부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겠네.”
“…….”
“가족이란 사람들이 이렇게 무신경해서야. 이렇게 내 아내를 홀대하는데 안심하고 여기 맡겨둘 수야 있겠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공. 저희도 애가 갑자기 사라져 너무 당황했던지라…….”
“그렇다면 이 상황을 모면하려 할 게 아니라 솔직하게 털어놨어야지. 왜 감당하지도 못할 거짓말을 합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라이언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기브넨은 그런 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실망입니다, 장인어른.”
“…….”
“신뢰가 바닥난 이상 제 아내를 여기 계속 두는 건 불가능합니다.”
“예? 그 말씀은…….”
계획했던 일은 아니지만, 기브넨은 여기 와서야 확신이 섰다.
“아내를 데려가겠습니다.”
“예? 라, 라일리를 블레스티지로 데려가서 같이 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기브넨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은 당황스러움에 눈만 깜빡하며 기브넨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결혼 전 동거를 하겠다는 폭탄 발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제아무리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하나, 결혼 서류에 도장을 찍기 전까지는 그저 남일 뿐인데. 요즘 어린 것들은 다 이렇게 파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건가?
게다가 라일리는 아직 준비된 상태가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아직 상견례도 하지 않았고, 식전 동거부터 시작하는 건 좀…….”
“요즘 누가 그런 걸 따집니까?”
폭탄과도 같은 발언에 라이언은 어질어질했다.
“이사도 서두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아니면 몸만 오셔도 좋습니다. 몸만 오셔도 살 수 있게 필요한 것들은 전부 마련해놓을 테니까.”
기브넨의 말에 라이언은 움찔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러니 이곳 일은 정리하고 서둘러 수도로 올라오시길 바랍니다. 그전까지 아내는 제가 데리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라이언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 꼭 전통을 고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요즘 시대가 많이 변하기도 했고. 게다가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무슨 고집을 더 피우겠나.
좀 더 준비를 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그래도, 데리고 가서 알아서 잘 가르쳐주겠지, 뭐.
게다가 파혼 요구가 아닌 게 어디인가. 그의 치정설로 워낙 시끄러운 상황에 굳이 이 결혼을 강행할 필요도 없는 입장에서 이렇게 나와준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 아닌가.
희망 회로 돌리기를 끝낸 라이언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 그렇게 하십시오.”
“사람을 보낼 테니 아내의 짐을 인편으로 보내주십시오. 뭐, 짐이라 해봤자 거의 없겠지만.”
이 집 안에 그녀의 것이 몇 개나 될까 기브넨은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
'일이 쉽게 풀렸네.'
기브넨은 만족스러운 장사 수완에 미소 지었다.
단순히 라일리를 데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몸이 좋지 않으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자택에 돌려보내겠다고 할 생각이었지만 라이언 남작이 멍청한 짓을 함으로써 굳이 그녀를 돌려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그것이…… 아, 그렇지 안사람과 옷을 사러 나갔습니다.」
멍청한 대답.
터무니 없는 남작의 말을 들은 순간 기브넨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잘만 하면 조금 더 빠른 시일 내에 라일리를 손 안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했다. 그리고 남작은 스스로 구멍을 팠다. 멍청하고, 미련해서 여식이 납치된 것도 모르는 무능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내보였으니까.
이젠 라일리를 수중에 둘 수 있게 되었으니 이런 귀찮은 일에 휘말릴 필요도 없겠지. 관리가 좀 더 편해질 것이다.
“저, 저기.”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던 기브넨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느릿하게 뒤를 돌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디?”
그는 최대한 신사적인 태도로 대답하며 그녀가 누구인지를 떠올렸다.
분명 라일리의 동생이었나. 라이언 남작 부부의 실질적인 친딸이기도 하고.
이름이 뭐였더라.
“아버지랑 대화는 잘 끝내셨나요?”
“예, 뭐.”
기브넨의 대답에 클레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너무 죄송하게 됐어요. 언니 때문에 문제가 커진 걸로 아는데…… 폐를 끼쳐서 가족 모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답니다.”
“그렇습니까.”
“일이 이렇게 되어서 유감이에요. 그래도 서로에게 파혼은 최선인 건 맞으니까. 공께서도 너무 상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언니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꼬였지만, 그래도 언니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너무 탓하지는 말아주세요. 언니도 알고 보면 참 가엾은 처지거든요.”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기브넨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다가, 이내 그 뜻을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그는 벽에 살짝 기대어 선 채로 물었다.
“파혼?”
“파혼하러 여기까지 오신 거 아닌가요?”
라일리의 동생이니까 적당히 예를 갖추고자 했던 기브넨은 아예 존칭을 집어치우고 빈정거렸다.
“내가 왜?”
“그, 그야 요즘 그 치정설 때문에 난리잖아요?”
왜 자매가 쌍으로 치정설에 신경을 쓰는 걸까. 물론 둘은 전혀 다른 의미로 신경 쓰는 것 같지만.
“그게 왜 파혼으로 연결되는지 모르겠네.”
“……그럼 공께서는 그 불명예스러운 추문을 안고 가겠다는 건가요?”
“레이디께서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공, 너무 어리석은 선택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건 아니에요. 두 가문의 입장에서 결혼을 진행하는 건 최악의 수를 두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쪽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니까.”
“……전 언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전 동생이니까. 지금 언니가 불쌍하셔서 이러는 거죠? 언니 혼삿길이 막혀버렸으니 미안해서. 그렇죠?”
잠자코 클레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기브넨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그가 웃음을 멈추고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디께서는 언니와 내가 결혼하는 게 싫나?”
“……그게 아니라.”
“돌려 말하는 건 그만두고. 멍청이 취급도 적당히 해야지.”
“…….”
“심보가 고약하네.”
자상한 목소리였으나 비아냥거리는 투에 클레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같은 집에서 자랐는데 자매가 이렇게 달라서야. 누구는 욕심이 너무 많고, 누구는 욕심이 너무 없고.”
“공, 저는 그저 염려가 되어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저의 의견을 그런 식으로 곡해하시면 곤란해요.”
“누굴 위한 염려인데?”
“……그거야 당연히 저희 가족과 공을 위한 염려죠.”
“그 가족에 언니는 포함인가?”
“…….”
“유감스럽게도 난 그녀가 가여워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야.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쓸 사람도 아니고. 나를 너무 자상하게 보셨네. 난 그렇게 자상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은 사람인데.”
기브넨은 클레어의 어깨를 손으로 톡, 톡 두드리며 말했다.
“나이 차이는 얼마 안 나는데 수준 차이는 좀 심한데.”
“……그야 언니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내가 말하는 수준이 떨어지는 쪽은 당신인데. 이해력의 차이도 큰가 봅니다.”
“뭐, 뭐라고요?”
모욕적인 언사에 수치심을 느낀 클레어가 부들부들 떨며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이건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이렇게 비신사적인 언행이라니!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말투라니!
“할 말 끝났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 잠깐만 기다려요!”
“아직 주제 파악이 안 되나 본데.”
기브넨이 정색하며 말했다.
“그쪽이랑 대화하고 있는 1분 1초가 시간 아까워. 내 시간이 얼만 줄은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