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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같이 살자 (18/31)


18. 같이 살자
2023.04.29.



 
수치스러움에 클레어가 울먹여도 기브넨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소란인가 싶어 나와본 라이언과 남작 부인이 둘을 보며 당황할 뿐.

라이언의 옆에 서 있던 남작 부인을 본 기브넨은 라이언을 향해 비꼬듯 말했다.


“큰딸이랑 쇼핑 가셨던 분께서 돌아오셨나 봅니다.”

“……크흠.”

“좀 더 가정교육에 신경 쓰셔야겠습니다. 둘째 딸을 더 각별히 여겼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치곤 상당히 무례합니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지만 한 번 더 내 아내를 모욕하는 언사를 보일 경우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결국 클레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에 당황한 남작 부인이 클레어를 감쌌고, 라이언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기브넨을 마중했다.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그가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까지 클레어의 통곡 소리와 라이언의 잔소리가 저택 안에 떠들썩하게 울려 퍼졌다.

***

에르메인츠 백작은 극심한 체력 소모와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해 앓아누워버리고 말았다. 그의 주치의를 포함해 다섯이 넘는 의사들이 들락날락하며 그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건강 악화라 진단이 났다.

이에 에르메인츠 가문의 장자이자, 후계자인 로셔 에르메인츠가 발작하며 의사들을 타박했다.


“순식간에 이렇게 건강이 나빠질 수가 있냐니까! 당신들이 대체 하는 게 뭐요!”

“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노화로 인한 몸의 쇠약은 인간이 거스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누가 그딴 소리나 듣자고 여기 부른 줄 아시오? 하, 의사란 놈들이 하나같이 다 똑같아…… 됐고, 가보시오.”

주치의와 남은 의사들이 도망치듯 방을 나가버리고, 로셔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아 아버지의 손을 꽉 붙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능한 마의사를 불렀으니 뭔가 차도가 있을 것입니다.”

에르메인츠 백작은 아들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로셔 에르메인츠는 이번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갑자기 건강 상태가 악화된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에르메인츠 백작이 이 지경이 된 건 장거리 텔레포트 사용으로 인한 극심한 체력 소모와 정신적 충격 때문.

에르메인츠 백작은 자신이 몸져 앓아누운 원인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아들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너무 쪽팔려서.


“……나가보거라, 혼자 있고 싶으니.”

“하면 저는 엘드라스로 먼저 복귀해 보겠습니다.”

“그래.”

아들은 가뜩이나 엘드라스의 차기 마탑주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 중이라 바쁜 몸인데, 그런 바쁜 아들의 시간을 낭비했으니…… 에르메인츠 백작은 자신의 무능을 실감하며 분노했다.


“젠장, 젠장!”

사건이 크게 번지는 건 막았으나, 무너져내린 자존심까지 회복하지는 못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 투성이었다. 호라이즌의 마탑주씩이나 되는 놈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녀를 감싸고 도는 것이며, 대체 그 여자가 뭐라고! 그 먼 곳까지 친히 행차했단 말인가.

그날 그렇게 도망쳐 호텔로 가서 진짜 서로에게 코가 꿰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 망할 XX들이.”

화풀이는커녕 오히려 덜미만 잡혔다.

게다가 호라이즌의 마탑주, 그놈이 이걸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기자까지 미리 매수해 현장에 불러놓았으니 머지않아 전국적인 기사가 쏟아져 내릴지도 모른다.

‘기브넨 리안스터’의 치정극이 전국을 도배했듯, 그 역시도 이번 사건을 만천하에 공개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에르메인츠 백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초조했다.

지금 시기는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믿고 의지하는 장남이 ‘엘드라스 마탑주’ 자리를 놓고 시험 중인 기간이었으니까.

어린 여자만 골라 결혼하는 특이한 성적 취향 때문에 군중들의 비난을 받긴 했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았던 건 결국 여자관계든 결혼이든 사생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사적인 추문이 발생하는 빈도가 높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경향도 있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지만 살해 교사는 얘기가 달라진다.

이는 불법 행위이자 범죄니까.


「기브넨 리안스터, 그놈이 마탑주가 되었습니다. 대마탑 중 최초로 소유주와 경영자의 단일화를 성공했단 말이지요. 호라이즌의 위상이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대마법사 융의 제자라는 것만 해도 위협적인데…… 융의 유언이 공개되고 차기 마탑주가 지명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리안스터 가문에서 거금을 들여 마탑을 인수해버리고, 폐하께서도 이를 눈감고 말았으니……. 이대로 가다간 호라이즌 독점 체제 아래 놓이게 될 겁니다.」


「융이 죽으니 더한 놈이 나타났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그 어린것에게 마탑주 자리를 넘겨주는 무리수를 왜 두나 했더니, 그놈 융보다 더한 괴물일세.」


「서둘러 에르메인츠 가문도 마탑 엘드라스의 단일화를 성공해야 하지요. 언제까지 전문 경영인을 마탑주 자리에 앉혀 둘 것입니까. 다른 마탑의 오너들도 마탑주 명맥을 후대까지 잇기 위해 뛰어난 후계 양성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로셔 님이 하루빨리 마탑주 자리에 올라 기반을 단단하게 다져놓아야, 재능이 있으신 막내 손자분께서 무리 없이 엘드라스를 이끌 것이 아닙니까.」

 
그의 아들 로셔의 마탑주 경쟁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했다.

다른 아들들은 마력을 타고나지 않은 일반인들이었고, 로셔만이 유일하게 마법사로 태어났다.

하물며 로셔의 막내아들이 대마법사 급 재능을 가진 마법사인 게 판명이 났고 이에 손자놈에게 마탑 엘드라스의 마탑주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로셔가 먼저 마탑주가 되어 입지를 확보해두어야 했다.

원래는 국가기관인 마탑이 사유화되기 시작한 후, 마탑의 오너 그러니까 마탑주 자리는 ‘뛰어난 마법사’만이 가질 수 있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때문에 에르메인츠 가문은 마탑을 소유하고도 실제로는 마법사 경영인을 따로 둔 탓에 반쪽짜리 신세였다.

이는 거의 모든 마탑이 해당 되는 부분이었으나 이번에 업계 1위의 마탑인 호라이즌이 소유주와 경영인의 단일화를 최초로 성공하면서 사실상 마탑을 독점하는 형태가 되었고, 이는 다른 마탑들의 위기의식을 키웠다.

에르메인츠 백작의 아들 로셔는 지금 마탑주로서의 자질을 검증받는 시험 기간이었다. 즉, 지금은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이며, 이는 가문의 번영으로 연결되었다.

최대한 조용하게 지내도 모자랄 판에, 하필 가장 껄끄러운 상대에게 흠이 잡혔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에르메인츠 백작은 머리를 쥐어 싸면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뭘 하겠는가. 물은 이미 엎질러진 후인데.

그렇게 끙끙 앓으며 고민하던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빅터! 빅터 당장 와보게!”

그가 소리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빅터라는 인물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경.”

“호라이즌의 마탑주에게 연락을 넣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만났으면 한다고.”

“알겠습니다.”

지금의 그에게는 이번 일을 ‘아무렇지 않은 일’로 만들 힘도, 여력도 없었다.

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전쟁영웅’ 시절은 이미 지나버린 영광일 뿐이니까. 이빨 빠진 호랑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파랗게 어린 호랑이에게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굴욕적이라 할지라도.

***

라일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대체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거지?

천근만근 무겁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불쾌한 두통도, 한기도, 축축한 땀이 주던 불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오래 잠을 잔 건지 몸이 조금 뻐근했다. 가볍게라도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 라일리가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왔다.


‘여긴 루플라가 아니라 소보스터겠지?’

루플라에는 이 정도의 고급 호텔은 없으니까.

물론 이곳은 전에 기브넨이 머물던 인그시니아에 비하면 고급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하긴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누군가 다가왔다.

아주 잘생긴 여자? 아니면 정말 예쁘게 생긴 남자?

아무튼 성별이 조금 모호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상대가 웃으며 자기 소개를 했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아가씨. 제 이름은 삭 벤돔. 호라이즌 소속이며 리안스터 경의 참모 겸 호라이즌의 총괄팀 소속입니다.”

아, 그래. 그때 기브넨이 청혼서를 들고 찾아왔을 때 뒤에 서 있던 사람.


“라일리 에아달린이라고 합니다.”

“예, 라일리 아가씨.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냥…… 몸이 찌뿌둥해서 걷고 싶었어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좋아요.”

“공께서는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시간이…….”

“둘 다 여기서 뭐 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삭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셨습니까.”

기브넨은 라일리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아? 응…….”

“저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삭이 눈치껏 자리에서 벗어났다.

삭이 사라지고 라일리는 기브넨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와?”

“남작한테.”

“숙부님?”

“응.”

“왜?”

“내가 안전하게 잘 데리고 있다고 전하려고.”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그래, 없더라고. 괜히 헛걸음했어.”

“무슨 뜻이야?”

“그냥.”

기브넨은 말을 아꼈다. 에아달린 남작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놔봤자 그녀에게 좋을 게 없었으니까.


“……그들은 어떻게 됐어?”

기브넨은 잠시 멈칫했다. 뭐라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라일리는 그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추해냈다.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차피…… 예상했던 부분이니까.”

“백작은 몰라도 그놈들은 확실히 처벌을 받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그런 일 다시는 없을 거고.”

“백작은 돌아갔어?”

“듣기로는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몸져누웠다던데. 그 몸을 끌고 이 먼 곳까지 온 걸 보면 그날 일에 앙금이 상당했던 모양이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도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할 작자가 아닌데. 답지 않게 멍청한 짓을 했어.”

라일리가 픽 웃으며 손을 뒤로 감췄다. 그러나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을 기브넨은 정확히 봤다.


“나랑 갈래?”

“……?”

“여기 있지 말고 나랑 블레스티지로 가.”

“숙부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걸.”

라이언은 어떻게든 기간 내에 라일리를 번듯한 집안의 여식으로 교육하려 혈안이 된 상태였고, 라일리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이 끔찍하게 싫은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어디 내보이기 남부끄러운 자식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할 줄 아는 것도, 잘하는 것도 없지. 이런 상태로 시집을 가봤자 애물단지 취급받을 게 뻔하다고…….’

그래서 더 교육을 악착같이 받은 것도 있었다. 스스로의 무능함이 부끄러워서.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익히고 싶었다.


“그깟 놈 의사 따윈 알 거 없고”

“…….”

“여기 계속 있고 싶어?”

“그건…….”

“내가 볼 땐 굳이 여기 남아 있을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

라일리는 고민했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존재, 그가 입는 옷, 그가 하는 일, 그가 자주 찾는 맛집, 그의 관심사…… 모든 것이 가십거리가 되는 이곳에서 기브넨 리안스터와의 결혼은 다른 의미로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있고 싶어.’

그냥 같이 있고 싶었다.

끔찍한 숙부님의 가족과 함께 한 공간에서 지내는 것보다야 이 남자랑 지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으니까.


“……같이 있고 싶어.”

굳이 먼저 손을 내밀어 준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라일리의 솔직한 표현에 기브넨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같이 살자.”

 

***



“아이고, 두야…….”

라이언 남작은 진이 빠진 채 의자에 털썩 앉았다.

고작 하루 동안 그는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 초췌한 몰골로 골골거리던 그는 여전히 남아 있는 숙제에 이마를 어루만지며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 이름을 떨쳐보지도 못하고 단명하겠어.”

신경 써야 할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누구도 납치 사건이 일어난 지도, 침입자가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것. 그것이 기브넨의 빈정을 상하게 했는데 거기에 무려 친딸인 클레어가 기름을 부었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공께서 그런 소리를 하나 싶어 클레어를 추궁해 보니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전 그냥 파혼이 잘 성사된 줄 알고, 위로의 말씀을 올린 것이 다예요! 」

 
정신 나간 것 같으니!

철부지인 줄은 알았지만 낄 데 안 낄 데 구분도 못 하는 화상인 줄은 또 몰랐다. 뭘 잘했다고 대성통곡을 하는지. 분명 그런 머저리로 키운 적이 없는데 대체 어쩌다 그런 똥 멍청이가…… 되어버린 것인가.

라이언은 정말 여러 의미에서 충격을 받았다. 친딸에게 정이 뚝 떨어질 만큼.

남작 부인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쩌죠? 지금이야 콩깍지가 씌어 눈에 보이는 게 없다지만…… 그 못 배운 것을 종일 데리고 있으면 정이 뚝 떨어지는 순간이 올 텐데요.”

라이언은 남작 부인의 말에 공감했다.

당장 20년을 키워온 딸의 멍청한 짓에 정이 뚝 떨어졌는데, 아예 남인 기브넨은 오죽할까.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최대한 서둘러 결혼을 진행시켜야지. 별다른 수가 있겠나. 그동안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게 비는 수밖에.”

 

***

라일리에게는 짐을 챙길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기브넨이 미리 짐을 챙길 사람을 에아달린 저택으로 보내 정말 '몸'만 이동하면 되었다.

텔레포트기 사용 금액은 모두 기브넨이 부담했고, 블레스티지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부유석 마차에 올라타 어디론가 이동해야 했다.

라일리는 한껏 긴장됐다.

지금 그의 저택으로 가는 거겠지? 가족들과 같이 살고 있는 걸까? 어르신들을 뵈면 어떻게 인사드려야 하지? 어르신들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당장 나가라고 문전 박대할지도 몰라. 아무래도 신분의 차이가 크니까…… 이 결혼을 환영해 주기는 할까?


“왜 그렇게 겁을 먹었어. 당장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당장'이라는 말은 나중에는 잡아먹겠단 뜻인가.


“어디 가는 거야?”

“내 저택.”

“그럼 나는…… 앞으로 거기서 사는 거야?”

“그렇지. 신혼생활 일찍 시작한다 생각해.”

“그, 가족분들은……?”

라일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브넨이 웃음을 터트렸다.


“뭘 걱정하나 했더니.”

“…….”

“혼자 살아. 진작에 독립했지.”

“그렇구나.”

“그리고 옛날부터 가족들이랑은 떨어져서 살았어.”

그럼 당장 상견례 전까지 그의 가족을 마주칠 일은 없는 걸까?

라일리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그의 가족을 만나는 건 부담이었으니까.


“그래서 여기서 하고 싶은 건 고민해 봤고?”

 


「준비해야 하는 것보단, 앞으로 하고 싶은 걸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네.」


「해보지 못한 것들이 많을 테니까.」

 
헤어지던 날, 식사 자리에서 했던 말이다.

뭘 하고 싶은지를 고민해 보라고.

그러나 그런 고민 하지 못했다. 당장 뭘 하고 싶은지보다는 해야 하는 것들을 고민했으니까. 그래서 가정교사를 통해 교육을 받았던 거고.


“아니, 아직.”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

“뭔가를 잘해볼 생각은 하지 마. 그게 나를 위한 일이라면 더더욱.”

부유석 마차가 멈춰 섰다. 그가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 그러곤 라일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쓸데없이 주눅 들어 있지 말고.”

“…….”

“하고 싶은 걸 해. 지원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으니까.”

라일리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와.”

 

 
으리으리한 저택이 라일리를 반겼다. 이게 사람이 사는 집인가?

이건 저택이라기보다는 성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정원의 잔디와 나무는 정원사의 정성 어린 손길로 아주 예쁘게 잘 가꿔져 있었고, 튤립, 장미 등 수십 가지 꽃들이 정원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분수대에 장식된 천사 모양의 조각은 대정원의 고풍스럽고 우아한 느낌을 한껏 돋보이게 했다.

비를 쏟아내는 미니 구름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며 화단에 물을 주는 광경이나, 옆으로 난 푸른 산책로를 날아다니며 빛 가루를 뿜어내는 나비, 알아서 나뭇잎과 쓰레기를 주워 먹는 쓰레기통 등 기상천외한 마도구들도 많았다.

게다가.


“저, 저건 뭐야?”

일반 가정집 크기와 맞먹을 듯한 검은 털로 뒤덮인 늑대 한 마리가 묶여 있었다.

압도적인 크기만 봐도 그게 일반적인 동물이 아닌 마물임을 알 수 있었다.


“아, 저거. 전리품.”

“……전리품?”

“달을 삼키는 늑대라 불리는 마수지. 지난 마물 토벌 원정을 나갔다가 생포해온 거.”

“설마 애완동물로 기르는 거야?”

“집 지키기 좋아 보여서.”

저게? 어딜 봐서? 당장 목줄이 풀리는 순간 이 저택은 물론 블레스티지까지 쑥대밭으로 만들 것 같은 모양새인데?


“무서워? 치울까?”

“아, 아니…….”

“사나워 보여도 착해. 누나한테 해 끼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어. 만져볼래?”

“아니, 거절할게…….”

“그래, 그럼 들어가지.”

정원이 워낙 넓다 보니 대저택까지 이동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현관까지 이어진 길 자체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특수한 길인지 한번 꿀렁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순식간에 현관까지 도착했다.

문이 활짝 열리고, 기브넨이 두 팔을 벌려 라일리를 환영했다.


“진심으로 환영해.”

라일리는 진심으로 웃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의미로 울고 싶어졌다.

그의 등 뒤로 온갖 기상천외한 마도구들이 보였다. 살짝 봐도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이건 다른 세계…… 아니 아예 다른 차원의 이 공간이 아닐까.

……이런 곳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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