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아내가 남편이 보고 싶다는데 어떻게 안 와 (21/31)


21. 아내가 남편이 보고 싶다는데 어떻게 안 와
2023.05.10.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리첼의 닦달에 못 이겨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답장을 기대한 것도, 그가 귀가할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보고 싶어.」


‘잠시 미쳤었나 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편지를 보낸 뒤였다.

보고 싶어라니.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본심이 펜촉을 따라 전해졌다. 뒤늦게 생각하니 당황스러웠다. 왜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적어버린 걸까. 그가 뭐라고 생각할까.

애초에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도 아닌데. 너무 바보처럼 들떠서 순간적으로 선을 넘어버린 것 같다. 편지를 받은 그가 얼마나 어이없을까.

미적지근한 열기가 정신을 헤집었다.

쪽팔려.

아무래도 깊이 잠들기는 글렀다 생각하던 그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지금은 사용인들도 모두 숙소에 돌아가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라일리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러자 뭔가 불쑥 뛰어들어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기, 기브넨?”

“안녕.”

씻은 걸까. 가운을 입고 있는 그는 촉촉했다. 좋은 향유 냄새도 났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안 올 줄 알았는데.”

“그럴 예정이었는데.”

“…….”

“보고 싶다며.”

“…….”

“그래서 왔어.”

라일리는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당황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을 만큼 충동적으로 보낸 쪽지였다. 무시해도 상관없을 그 쪽지를 보고 한걸음에 이곳까지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 편지 하나로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왜……?”

“보고 싶다며.”

라일리는 당황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렸다.


“……리첼이 편지를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었어.”

“그녀가 아주 좋은 걸 권유했네. 앞으로 자주 써줘.”

“그런데 이렇게 바로 달려올 줄은 몰랐어.”

“아내가 남편이 보고 싶다는데 어떻게 안 와.”

“……그냥 무시해도 됐을 텐데. 너 많이 바쁘잖아.”

라일리의 말에 기브넨이 그녀를 벽 쪽으로 밀어붙여 팔 사이에 가뒀다. 그러곤 고개를 살며시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나도 보고 싶었어.”

그가 한 손으로 라일리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그러곤 손을 코에 갖다 댔다.


“이 향이 그립더라. 한 번씩 정신이 번쩍 드는 향이야.”

“……무슨 향인데?”

“모르겠어, 누나 살 냄새. 내가 여태 맡아봤던 냄새 중에 가장 좋아.”

“…….”

“뭐 하고 지냈어?”

“……그냥 계속 저택에서만 지냈어. 딱히 뭘 하진 않았어.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하고 싶은 거 생각해 보라고 했잖아. 생각해 봤어?”

이런 일상 얘기를, 가까이 밀착한 채 손깍지를 끼고 해야 할 말인가 싶다.

라일리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생활에 불편한 건.”

“없어. 과분해 모두가 착하고 날 잘 챙겨줘.”

“다행이네.”

“……그런데 이것 좀, 너무 가깝잖아.”

등은 벽에 기대어 있고, 앞은 기브넨의 몸에 가로막혀 있는 이 상황이 라일리는 꽤 난감했다.


“부끄러워?”

“……조금.”

라일리의 대답에 기브넨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같이 자고, 같이 씻고…… 그런 것보다 이게 더 부끄럽나 보네.”

“……그,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서운하네, 난 너무 멀쩡하게 제정신이었는데. 나만 진심이었던 거네.”

그가 또 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이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라일리는 당황하다가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진심이었어. 딱히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 그냥…….”

“농담이야.”

기브넨이 라일리에게서 떨어졌다.


“한 잔?”

기브넨은 방의 주인인 양 의자에 착석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유리잔에 투명한 얼음을 만들어 넣었다.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얼음은 어찌나 투명하고 깨끗한지 유리잔 안에서 크리스털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마법사들은 참 편하겠다.”

“마냥 편하진 않아. 이것도 엄연히 불법이라.”

“이런 간단한 마법도 금지야?”

“원래대로라면.”

“왜?”

“마법에 익숙해지면 사람은 사람답게 못 살거든.”

마도구의 발전.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마법사에 대한 핍박으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마법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편하게 만들지. 하지만 그만큼 의존도가 높아. 그 마법에 의존하고, 의존하다 보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멍청이가 되지.”

“아…….”

“옛날의 마법사들은 스스로 걷지를 못했다더군. 마법이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데 굳이 몸을 움직일 필요성을 못 느꼈던 거지. 근육량도 바닥에, 이런저런 지병이 많았다고. 우스갯소리로 그 당시 마법사들은 30을 넘기면 오래 사는 거란 말도 있었어. 마법 자체가 생체 에너지를 깎아 먹는 거기도 하고.”

“아.”

“그래서 허가된 경우가 아니고서야 마법을 사용하는 건 금지됐지. 물론 그걸 지키는 마법사들이 더 드물긴 하지만. 허가가 없으면 이렇게 간단한 마법 밖에 못 쓰긴 해. 특히 나 같은 소수의 특별 관리 대상에게는 더 엄격하지.”

“……그렇구나.”

“사실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대지만 다 말장난에 불과하지. 뛰어난 대마법사는 제국에 필요한 고급인력이지만, 동시에 황실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인물일 수도 있다 판단하니 대대적으로 통제를 가하여 견제하는 거지.”

기브넨은 라일리의 잔에 샴페인을 채워 건네줬다.


“단둘이 술 마시는 건 오랜만이네. 그날 이후로 두 번째인가.”

“……그러네.”

야심한 시각인 것도, 단둘이 방에 있는 것도 같다.

그때도 그는 샤워가운을 입고 있었지. 물기가 채 마르지도 않은 채로 촉촉한 머리를 찰랑이면서 묵묵히 술만 마시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취하고……


「혹시 저와 하실 건가요?」

 
멍청한 질문에,


「글쎄, 어쩔까.」


「할래?」

 
예상치도 못한 대답까지.

아, 얼굴이 홧홧해졌다. 라일리는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감춰보려 샴페인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러자 기브넨이 턱을 괸 채로 피식 웃었다.


“그렇게 먹으면 훅 갈 텐데.”

“?”

“술도 못하는 것 같던데 괜찮겠어?”

라일리는 조금 당황한 채로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혹시 하게?”

“뭘?”

“그거…….”

“그거?”

“그…… 너랑 나랑 했던 거.”

술이 독해서인지 아니면 단둘이 방에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괜스레 목이 타는 느낌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멍청한 질문이 나갔다. 라일리는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이놈의 주둥이는 정말…… 답이 없다.


“못할 건 없지.”

“…….”

“하고 싶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보시면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해요.

물론 하고 싶은 것도, 하기 싫은 것도 아니지만.


“그럼 싫어?”

“그, 그것도 아닌데…….”

기브넨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샴페인을 머금었다. 그는 이 상황 자체를 쥐락펴락하며 즐기고 있었다.


“난 하고 싶은데.”

“……어?”

라일리는 눈에 띄게 긴장했다. 동공은 확장되었고, 손 떨림은 수전증 환자처럼 심해졌다. 동그란 눈을 위로, 아래로 데굴데굴 굴리는 그 모습에 짓궂게 웃던 그가 라일리를 안아 올렸다.

그러곤 대뜸 침대가 아닌 테이블 위에 그녀를 앉혀놓고선 입을 맞춰왔다.

그의 단단한 팔이 라일리의 허리를 감쌌다. 말랑하면서도 뜨거운 것이 입안 가득 헤집어놓으며 정신을 쏙 뺐다. 부드럽게 치열을 훑으며,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진다. 뜨겁게 달아오른 달뜬 숨이 입술 사이로 퍼지고 몸이 점점 뒤로 젖혀졌다.

라일리는 완전히 넘어가지 않으려 양팔로 버티고 섰다. 그래서 다행히 테이블 위에 누워버리는 꼴은 아니었지만 지그시 눌러오는 무게감은 꽤 힘겨웠다.

목을 어루만지던 손이 어깨로, 어깨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배로, 이윽고 허벅지 부근까지 내려왔을 때. 라일리는 집 나간 정신줄을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자, 잠깐만.”

“왜.”

“가, 갑자기 이러니까 너무 당황스러운데!”

“보고 싶다며.”

“…….”

“이 새벽에 날 불러놓고.”

“그건…….”

할 말이 없다.

편지를 보낸 것은 자정에 가까운 시간대이긴 했다. 그러나 라일리는 그가 한걸음에 이곳에 올 거라는 것도, 이런 식으로 밀어붙일 거라는 것도 예상치 못했기에 억울한 면도 있었다.

처음이 아니다.

그와 이런 식의 분위기로 흘러간 건 기억하는 것만 세 번째. 첫 번째는 처음 만나 호텔로 갔을 때, 두 번째는…… 에르메인츠 백작에게서 구해줬을 때. 경험이 있기에 새삼스러울 것이 있겠냐만서도.


‘부, 부끄러워.’

한 번은 술 때문에 정신이 나갔었고, 다른 한 번은 납치극의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휩쓸리듯 저지른 짓이라 부끄러움이고 뭐고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맨정신이어서!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그의 존재감이 그의 손길이 훨씬 더 크고 자극적이게 느껴졌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게 뭔 내숭인가 우습겠지만, 라일리는 생각보다 자극적인 상황에 정신이 혼미했다.

기브넨은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거렸다.


“이 밤에 날 부르는 건 무슨 패기였던 거야?”

“……부, 부른 건 아닌데. 그냥 보고 싶다고 한 거지.”

“그게 그거잖아.”

라일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리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 하고 싶으면 해. 해도 돼”

이에 기브넨은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입술을 손으로 툭 쳤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

“자기 몸에 자기 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굴지 말라고.”

“…….”

“이런 것까지 내 눈치 살피지 말란 거야. 내가 제아무리 쓰레기라도 여자 억지로 안는 고약한 악취미는 없어.”

기브넨이 손가락을 한 번 까딱거렸다. 그러자 조금 전 행위로 엉망이 되어버린 테이블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러면서도 기브넨은 제 무릎에 앉힌 라일리를 품에서 놓아주지 않고 꽉 끌어안았다.


“뭐 단둘이 침실에서 담소만 나누는 경험은 생소하긴 한데 그것도 나쁠 건 없지.”

“……그럼 이것 좀 놔주면 안 될까?”

라일리의 말에 기브넨은 라일리를 안은 손에 더 힘을 줬다.


“안고만 있는 건 괜찮잖아.”

“…….”

“싫어?”

라일리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연하남을 보고 당황했다. 뭐지? 순간 꼬리를 축 늘어트린 강아지가 보였다.

고개를 숙인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안 싫어. 그냥 부끄러워서.”

“이 정도 부끄러움에는 익숙해져.”

그가 긴 손가락으로 라일리의 뺨을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다.


“이제 믿을 구석이라고는 나밖에 없잖아.”

‘……어?’

라일리는 순간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뭐랄까 왜인지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순간 아주 조금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위협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참, 라이언 남작이 루플라의 일을 전부 정리했다더군. 소영주 직도 사퇴하고 짐도 다 챙긴 모양이야. 이사만 남겨두고 있어.”

“아…… 언제 오신대?”

“늦어도 다음 주 아닐까 싶은데. 다음 주에 이사 상황 보고 상견례도 잡는 게 좋겠는데, 어때.”

상견례라니.

라일리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숙부님 일가와 재회한다는 것도 부담이었지만 그 부담스러운 사람들과 가족이 되어 기브넨의 가족을 만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영원히 남처럼 지냈으면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


“그렇게 해.”

만약 그의 가족들이 반대하고 나선다면 숙부님께서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그런 전개는 그런 전개대로 괜찮을 것 같기는 하다.

멍청한 클레어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설마 기브넨의 가족들 앞에서까지 멍청한 짓을 할까 싶긴 했다. 샴페인을 가볍게 머금은 라일리는 문득 그에게 하고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 물어볼 게 있어.”

“뭔데.”

“마법사들은 태어날 때 출생신고랑 같이 마법사 등록도 된다던데 난 왜 안 되어 있는 걸까? 혹시 넌 아는 거 있어?”

“…….”

“아버지도 마법사였다면 이걸 몰랐을 리는 없을 거고, 듣기로는 생명에 직결된 문제라던데…… 이거 지금이라도 등록 가능한 걸까?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라일리의 말에 기브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침묵은 꽤 오래 이어졌다.

이게 이렇게 심오한 질문인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라일리가 당황했다.

한참을 뜸 들이던 기브넨이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응?”

“언제까지고 그 상태로 지낼 수는 없겠지.”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아버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면서.”

기브넨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없어. 이상하긴 하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뭔가 누락 과정이 있었나 보지.”

“흔한 일인가 봐?”

“흔하진 않은데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니까. 사람이 하는 일에 어떻게 실수가 없겠어.”

“그렇구나. 그럼 마력 유무 검사는 어디서 받으면 되지? 근처 관공서로 가면 될까?”

“그건 안 돼.”

“……왜?”

“자칫하면 일이 시끄러워질 수 있으니까.”

그의 말이 무슨 뜻일까 고민하던 라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싶은 거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길 원하고. 내가 노출되면 결혼 사실도 알려질 수 있으니까 그럼 너나 리안스터 가문의 평판에 흠집을 낼 수도 있고. 알겠어, 이해했어.”

“그런 뜻이 아니라…….”

기브넨은 어째서인지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라일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아닌가? 리안스터 가문과 에아달린 가문은 그 격차가 크니까, 결혼 사실이 알려지면 당연히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공작가가 변방의 남작가와 결혼한다는 것만큼 세기의 스캔들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그는 최근 황녀와 혼담이 오고 갔던 사이가 아니었나? 그런 그가 남작 가의 여식, 그것도 양딸과 결혼한다는 것은 당연히 그의 평판에 안 좋은 쪽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 이 뜻이 아닌가?


“일단…… 마법사로서 관리가 필요한 부분은 동의해. 마력 유무 검사 및 관리는 호라이즌의 학술원에서도 받을 수 있어.”

“관공서에 가지 않아도 돼?”

기브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 유무 검사도 받고, 내 지인을 통해서 마법사로서 관리도 해줄게. 하지만 마법사 등록은 안 돼.”

“왜?”

“등록 안 된 채로 지냈다면 이제 와 등록해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

“평생 통제받은 삶을 살 필요는 없지. 마법사로서 관리받는 게 목적이라면 내가 해줄게. 굳이 관공서에 마법사 등록을 할 필요는 없어. 적어도 누나한테는 손해야. 이건 경험자로서 해주는 조언이니 내 말 들어.”

기브넨은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단호했다.

이렇게 단호한 태도는 처음이라 라일리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의구심은 남았다.

마법사 등록은 예외 없이 모든 마법사에게 부여되는 의무라고 들었다. 굳이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면서까지 마법사 등록을 거부할 이유가 있나?

아버지, 기브넨, 마법사, 전대 마탑주, 유서.

복잡한 키워드들이 연결될 듯하면서도 연결되지 않아 답답했다.

그런 와중 라일리는 문득 기브넨과 전대 마탑주, 그리고 아버지의 연결고리인 호라이즌에 대해 궁금해졌다.


“……있잖아.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뭔데.”

“호라이즌.”

“…….”

“구경해 보고 싶어.”

아버지에 대한 의구심도, 기브넨에 대한 의구심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 기브넨의 교집합이 ‘호라이즌’이며, 이곳에 가보면 뭔가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했다.


“안 될까?”

잠시 고민하던 기브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리가. 내일 당장이라도 갈까?”

쿨한 대답에 라일리는 오히려 당황했다.


“그래도 돼?”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럼 가볼래.”

“그래, 그럼.”

그는 날이 밝는 대로 호라이즌을 구경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라일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죽고 없는데 이제 와 아버지의 뒤를 캐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알고 싶었다.

지금은 뭔가 많은 게 꼬여 있어 답답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아버지와 남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아버지의 간극이 너무 큰 탓에 계속 아버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되는 상황이 싫었다.

뛰어난 마법사로 태어났지만, 산지기로 살아야 했던 아버지의 속 사정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알아볼 생각이었다.

남은 삶을 죽은 아버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 채로 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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