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난 여기서 이 여자를 죽여야 하나? (22/31)


22. 난 여기서 이 여자를 죽여야 하나?
2023.05.13.



 


“한동안 얌전하시더니 대체 왜 또 말썽이십니까.”

마법부에 소환당한 기브넨은 딴청을 피우며 눈앞에 놓인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조사원은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제어 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빼지 말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도 그러고야 싶었지.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나. 이게 얼마나 불편한 줄 알아?”

“불편할 게 뭐 있습니까. 그냥 몸에 박아놓기만 하면 되는 거.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가 불편하다는 겁니까?”

“이물감은 느껴져.”

“그 정도 이물감도 못 견디시겠다 하시면 할 말이 없네요.”

“사람마다 예민함의 정도가 다르잖아. 난 남들과는 다르게 극히 예민한 기질을 타고났다고 누누이 말했고.”

“그렇다고 해서 위법 행위를 눈감아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

“루플라, 이 먼 곳까지 가서 뭘 하신 겁니까? 무슨 용무로 방문하신 겁니까?”

기브넨은 심술이 난 상태였다.

마법부에 자진 참석해 조사를 받겠다 했지만, 참을성 없는 마법부 소속 조사원은 기어코 기브넨을 소환했다. 그것도 아침 일찍.

덕분에 ‘라일리에게 호라이즌을 구경시켜주겠다’는 약속 이행에 차질이 생긴 상태였다. 뭐든 계획 안에서 통제되는 환경을 좋아하는 기브넨의 성격상 마법부의 돌발 소환은 아주 불쾌했다.


“내가 어딜 가든 내 마음이지. 사적인 이유까지 말해야 하나?”

“이곳에서 제어 침이 빠졌고, 루플라 측 마력 측정기를 확인해 본 결과 총 두 번의 강한 파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기 충분한 수치입니다.”

“그 말은 내가 마법으로 사람을 해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곳에서 제어 침을 빼야 했던 경위, 어떤 마법을 무슨 목적으로 사용하셨는지에 대해서는 해명해 주셔야 합니다. 간단한 마법도 아니지 않습니까.”

마법부의 조사는 항상 이런 식이다.

강압적이고, 일단 사람을 죄인으로 몰고 간다. 물론 이번에는 위법 행위를 저지른 것이 맞지만.


“루플라에는 아내 될 사람을 만나러 갔어.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 혼사가 오가고 있거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외부로 발설되는 일이 없게끔 해줬으면 좋겠네. 기사가 나면 아주 곤란해지는 상황이라.”

“아내 될 사람이 누구입니까?”

“라일리 에아달린, 에아달린 남작의 첫째 여식이지. 에아달린 남작은 루플라라는 지역의 소영주고. 루플라는 키예프 후작령의 영지이니 확인해 보면 나올 거야.”

“하면 마법은 어떤 마법을 사용하신 겁니까? 무슨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고요?”

기브넨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글쎄 나도 그곳에 처음 가봤는데 내 생각보다 심각할 정도로 낙후된 지역이더군. 텔레포트기를 사용할 수도 없고, 인력거와 마차만 이용할 수 있지 뭔가. 갈 길은 멀고, 아내는 빨리 보고 싶고. 그러니 어쩌겠어?”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셨다는 겁니까? 그런 것치고는 마나의 파동이 큰데요?”

“하도 마력을 억제당한 지 오래되었잖아. 오랜만에 마법을 사용하려니 마나 제어가 쉽지 않더라고.”

“태어날 때부터 마나 제어에 능숙하던 당신 같은 사람이 마나 제어가 힘들었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오랜 세월 통제되어 있었잖아. 그 통제된 상태에 몸이 익숙해졌던 거지. 인식 침이 마력의 90%를 제한하고 있는데, 그걸 뺐어. 넘쳐흐르는 마력이 한순간 통제가 안 되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닌가?”

“그래서요?”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했는데, 알다시피 내가 그곳은 처음 방문한 거라 엉뚱한 곳에 좌표가 설정되어 숲 한가운데 떨어져 버렸지 뭐야. 그런데 웬걸, 그 숲은 온갖 맹수가 서식하는 숲이라 사람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더라고.”

“…….”

“거기 맹수들은 크기도 참 크더군. 딱 재수가 없게도 집채만 한 곰 두 마리를 마주쳤지 뭔가. 그래서 어쩌겠어? 난 내 몸을 지켜야 하잖아. 내 몸이 오로지 내 것인가? 아니지, 난 국가적 자산인데 목숨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지.”

“그래서 마법을 쓴 겁니까?”

“이건 정당방위였어.”

“마력 수치만 보면 맹수가 아닌 마수를 잡고도 남을 정도인 것 같습니다만.”

“그럼 그 곰이 마수였나 보지.”

조사원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기브넨을 바라보다가 이내 진술서에 진술 내용을 적었다.

그러곤 새로운 제어 침을 건네주었다.


“꽂으세요.”

“오래간만에 자유 좀 누리나 싶었더니 너무하네.”

“벌금 청구는 호라이즌 앞으로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증거가 없어서 그냥 넘어가지만, 계속 비협조적으로 굴면 곤란합니다.”

“이번에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니까.”

“조사는 이번이 끝이 아닙니다. 추가적으로 문의할 사항이 생길 경우 호출할 테니 미루지 말고 제때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알다시피 내가 워낙 바쁜 몸이라, 최대한 노력해서 시간 맞추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네. 자진 출석하겠다는 내 생각도 존중해 줬으면 해.”

“……가보세요.”

기브넨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세상 친절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그럼 수고해.”

조사원은 그의 꽃 같은 미소에도 정색했다. 저 웃음에 넘어갔다가 여러 번 고초를 겪은 뒤로는 다시는 저 잘생긴 낯짝에 넘어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덕분에 가능한 대응이었다.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는 아니었지만, 직접적인 증거가 있는 이상 본인의 입에서 나온 진술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하필 변방의 낙후된 지역에 가서 마법을 쓴 거라 목격자를 찾는 것도, 증인을 찾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차피 저 능구렁이 같은 놈이 사실을 술술 털어놓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호라이즌의 마탑주씩이나 되는 국가적 인재를 탈탈 털어먹으려 해봤자,


‘내 자리만 위험해지겠지.’

조사원은 조사서에 종결 도장을 찍었다.

***

기브넨의 스캔들은 단순히 외부만 떠들썩하게 만든 건 아니다. 따지고 보자면 훨씬 시끌벅적한 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였다.

특히 그가 오너로 있는 ‘호라이즌’의 소속원들은 마탑주께서 이번에는 누구와 연애를 하는 건지 여전히 갑론을박이었다.

이들 중 치정설에 대한 추문을 믿는 이들은 거의 없었지만, 이번에는 여태까지와 달리 여자 쪽이 베일에 싸여 있어 그런가 관심도가 최대치라 해도 무방했다. 원래 대놓고 오픈하면 금방 식지만, 아예 꽁꽁 감싸두면 더 궁금해 미치는 게 인간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삭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결근이라면서요.”

“결근 맞아.”

“근데 왜 오셨습니까? 그것도 혼자도 아니고…….”

염문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남녀가 나란히 출근이라니.

미쳤냐? 삭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억누르며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내 아내가 내 마탑을 구경하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직접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보여줘야지.”

무심한 얼굴로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진짜 미친 건가. 삭은 입이 쩍 벌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누구보다도 아가씨의 신상을 감추고 싶어 하던 분이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그렇게 대놓고 다닐 거면 아예 공개적으로 밝히던가.


“감추기에 여기만큼 제격인 곳이 있나?”

“보는 눈이 많습니다.”

“딱히 신경 쓸 것 같지는 않은데.”

“…….”

“그 눈과 입. 어차피 다 내 거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호라이즌의 마법사들은 입이 가볍지 않다. 아니, 가벼울 수가 없다.

마탑, 그것도 대마탑은 기술유출이나 여러 가지 문제로 보안이 철저하다. 호라이즌에서 보고, 들은 그 어떠한 것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조항이 근로계약서에 명시되어 있고 이는 계약을 해지하고 계약 시 걸었던 마법을 해지하기 전까지 유지된다.

계약자는 마력을 걸고 계약을 한다. 계약을 어기면 특수한 마법이 발동하고 몸에 있는 마력의 상당수를 갉아먹게 되어 있다. 마력이 갉아 먹힌다는 건 생명력이 갉아 먹힌다는 것.

죽음이 두렵지 않고서야 함부로 입을 놀릴 머저리는 없었다.

당장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래도 굳이 많은 사람의 눈에 띄어 좋을 게 있나. 당장 마탑 소속 마법사를 그만두게 되면 일반인 신분이 되는 탓에 주둥이 단속 마법도 효력이 없는데?

게다가 마탑 1층은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특종 거리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있는 기자들이나, 다른 경쟁 마탑에서 보낸 이들도 섞여 있다.

물론 생각이라는게 있으면 개방된 1층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 아닌가.

애초에 그가 사적으로 관계를 맺은 인물을 호라이즌에 데려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삭은 당황스러웠다.

물론 라일리는 사실상 정혼자나 다름이 없지만, 그래도…….


“어차피 그들은 라일리를 내가 데리고 온 비즈니스 손님으로 보겠지. 아니면 정말 네 말대로 연인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뭐 어쩔 거지? 자기들끼리 떠드는 것밖에 더 되겠어? 뜬소문으로 남겠지. 애초에 염문설조차도 내가 인정하지 않은 이상 뜬소문에 불과한 것인데, 안 그래?”

굳이 그 소문을 부풀릴지도 모르는 행동을 왜 해야 하냐는 겁니다.

삭은 기브넨의 거침없는 행보에 당황하면서도 적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통탄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라일리에게 1층을 제외한 마탑을 구석구석 구경시켜줄 생각이니, 삭 너는 학술원에 좀 다녀와야겠어.”

“학술원이요? 갑자기 왜…….”

“평의회를 소집하겠다고 해.”

“평의회는 갑자기 왜…….”

“중대한 일이야. 은밀히 소집해.”

“……알겠습니다.”

학술원은 호라이즌 부속 기관이긴 하지만 워낙에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다. 게다가 그의 여동생인 리브네가 학술원 일을 관리하고 있어 사실 기브넨의 입장에서는 얽힐 일이 거의 없는 곳이긴 했다.


‘학술원과는 도통 교류가 없으신 분이 대체 무슨 생각이지…….’

“자, 그럼 가볼까.”

결근계까지 내고 출근을 해서 농땡이를 피우는 모습이 가관이라 생각하며 삭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브넨은 라일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혹시 내가 여기 오면 당신이 난처해지는 거야? 그런 거라면 구경시켜주지 않아도 돼. 돌아갈게.”

“그런 거 아니야.”

“……저분은 난처해 보이는 눈빛이었어.”

“어차피 대부분의 직원은 1, 2층에 몰려 있어. 그 이외의 층은 허락된 자들만 출입할 수 있고 극소수야. 그리고 그들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라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브넨이 라일리를 잡아끌었다.

·
·
·

대마탑 호라이즌은, 지상만 20층 지하로는 3층이 더 존재했다.

1층과 2층은 외부인에게도 개방되어 있는 상태였고, 3층에서 7층까지는 각 부서별로 나눠진 업무공간이었으며 8층에서 13층까지는 마탑 종사자를 위한 생활 편의 시설이, 14층에 18층까지는 교육 및 연구시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19층에서 20층은 마탑의 임원들과 마탑주 기브넨의 개인 업무공간 및 귀빈 접견 시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고층으로 갈수록 사람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여긴 지하야?”

“지하 3층.”

“저 거대한 마법진은 뭐야?”

“대규모 텔레포트 마법을 발동할 수 있는 마법진. 한 번에 최대 만 명까지 이동시킬 수 있지.”

지하로 갈수록 외부에는 알려져서는 안 될 극비 시설들이 가득했다.

대규모 텔레포트를 발동시킬 수 있는 마법진뿐만 아니라, 마도구 개발 연구실을 비롯해서 마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력 저장소까지 있었다.


“여기가 마력 저장소야?”

“응.”

“저 거대한 게 다 마력이야?”

기브넨은 거대한 마나 저장소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거점으로 모여드는 마력이지. 여기서 정제한 후 다시 분리해서 마력이 필요한 곳에 공급하고 있어.”

“다른 마탑도 이런 저장소가 다 존재해?”

“응, 원래 마탑의 시작은 저장된 마력을 관리하는 기관이었으니까.”

“……신기하다. 그런데 사람이 한 명도 없네?”

“여기 관리자는 한 명뿐이야. 아무나 관리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리고 그놈 지금은 자고 있을 시간이라 저기 숙면실에서 자고 있을걸.”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크고 넓구나.”

라일리는 거대한 마나 저장소를 빤히 바라보았다. 푸르른 빛이 감도는 거대한 수정체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에 시선을 뺏긴 라일리를 빤히 바라보던 기브넨이 말했다.


“라이스턴 님이 당시 여길 관리하셨다고 들었어.”

“……아버지가?”

“응, 대용량의 마나를 관리할 수 있는 건 대마법사급 인재만 가능해. 그런 마나 저장소의 관리자란 직책은 마탑주 바로 아래 직책이라 볼 수 있지.”

‘상상이 가지 않아.’

이런 곳에서 아버지가 일했다니.

언제나 허름한 옷만 입고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채 나무를 하러 다니고, 약초를 캐고, 짐승을 사냥하는 그런 모습만이 내가 아는 전부였는데.

라일리는 이곳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했다.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마력 저장소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기브넨은 그런 라일리를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이곳에서 죽어가던 스승을 생각했다.


「나는 네게 내 자리를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제게 모든 걸 떠넘기셨군요.」


「어쩌겠느냐, 그 많은 제자 중 눈에 밟히는 게 너인 것을.」


「눈에 밟혔다면 더 자유롭게 살게 놔뒀어야지. 나를 이 감옥에 가둬놓고, 잔인하네, 노인네.」


「너라면 잘할 것 같았으니까.」


「저는 스승님 기대에 부흥 못 합니다. 대체 뭘 믿고 절…….」

 
스승은 이곳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라이스턴의 여식, 그녀가 눈에 아른거리는군.」


「왜 계속 미룬 것입니까.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사정이 있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라이스턴 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요.」


「라이스턴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그게 뭡니까.」


「나는 그릇이 작다는 것.」


「제국을 주름잡는 대마법사가 그릇이 작다니, 다른 사람들은 전부 종지 그릇만도 못하겠습니다.」


「나는 그놈도, 그놈의 여식도 감당하지 못한다. 하지만 넌 다르지.」


「제 그릇은 종지 그릇입니다, 스승님.」

 
죽어가는 그는 편안해 보였다. 비로소 해방된 느낌. 비로소 자유로워진 듯 편안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스승의 죽음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모른다고,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라이스턴은 참 잔인한 놈이야. 나에게 자식을 떠맡기고 가다니. 그게 얼마나 잔인하고, 무섭고, 끔찍한 일인지…….」


「…….」


「난 그놈의 자식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

라이스턴은 융에게 여식을 잘 부탁한다 했지만, 스승은 그 여식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녀를 거두는 것을 미루고, 미루고 미뤘던 것은 그가 스스로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가 맡기고 간 여식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그렇기에 차라리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겠지. 차일피일, 미루고 미루다 보니 꽤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것이다.


「기브넨.」


「예, 스승님.」


「네게 맡기마.」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라이스턴의 자식을 찾아, 그리고 데려와. 적당히…… 데리고 있거라. 철저히 간수해.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누구도 그녀가 라이스턴의 핏줄임을 알지 못하게. 절대 그놈들 손에 넘어가지 않게. 그러다 네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이곳 호라이즌으로 데려와. 그리고…….」

 
스승은 피를 토해가며 간절히 부탁했다.


「네 손으로 직접 죽이거라, 쥐도 새도 모르게. 흔적조차 남기지 말고. 이곳에서…… 라이스턴이 핏덩이를 거두고 아내를 직접 죽였던 것처럼. 너도…….」

 
그리고 지금 이곳 호라이즌에 그녀가 있다.

라이스턴의 핏줄, 하나뿐인 여식. 라일리 에아달린이.

스승이 피를 토해가며 죽었던 바로 그 자리에.

라일리를 빤히 바라보던 기브넨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럼 난 여기서 이 여자를 죽여야 합니까? 스승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