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무슨 상관이야, 결혼할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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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무슨 상관이야, 결혼할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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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무슨 상관이야, 결혼할 사이에
2023.05.24.
남자는 거지꼴이었다.
그리고 거지꼴에 걸맞은 매우 저급하고 거친 언변을 구사했다. 비속어는 기본에, 다혈질에 행동이 거칠었다. 게다가 수시로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열이 받을 대로 받은 그는 쩌렁쩌렁하게 기브넨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기브넨이 아닌 그의 대리인인 삭이 대신 찾아왔다.
“아르페지오 님, 귀빈께서 방문한 상황이라 좀 조용히 해달라는 마스터의 전언이십니다.”
“왜 네가 와? 당장 가서 기브넨 개자식 이리 데리고 오라니까.”
“마스터께서는 지금 호라이즌에 중요한 귀빈을 접견 중이십니다, 이후에는 파티 참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마스터와의 만남을 원하시면 따로 약속을 잡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새끼 의도적으로 나 피하는 거잖아. 이딴 핏덩이 던져두고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건데. 장난해?”
삭은 잔뜩 겁에 질린 라일리를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어깨를 토닥였다.
“말버릇은 험악하나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야, 내 말 무시하냐고.”
“아르페지오 님, 이분은 핏덩이가 아니라 라이스턴 님의 여식이십니다.”
노발대발하던 남자, 그러니까 아르페지오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곤 당황하며 라일리의 앞에 바짝 다가와서 라일리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 재수 없는 놈의 딸이라고?”
“예, 마스터의 말로는 그렇습니다.”
“……살아 있었던 건가.”
“그렇답니다.”
“믿을 수가 없는데. 이게? 대체 어디를 봐서? 그놈의 자식이라는 거지?”
“부정하고 싶으셔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사실입니다.”
아르페지오는 눈을 두어 번 깜빡하더니 라일리의 이마에 검지를 댔다.
그는 미간을 좁혔다.
“마력이 있는 건 맞아? 아예 순환 자체가 안 되고 있잖아. 뭐야, 이 별종은? 어떻게 살아서 여기 서 있는 거야?”
“마스터께서도 그것이 의문이라 하십니다.”
“이 정도면 일반인 수준인데, 마법사가 맞긴 한가?”
“마법사가 맞다고 하십니다.”
“이런 상태로 호라이즌 학술원 입학을 하겠다?”
“그래서 아르페지오 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셨습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정신 나간 놈들 투성이군.”
“제가 보기엔 아르페지오 님께서 가장 정신 나가셨습니다.”
삭의 악담을 아르페지오는 귓등으로 흘려보내면서 라일리를 일으켜 세웠다.
“알았어, 일단 가봐. 쓸모 있는 놈인지 확인부터 해봐야겠으니.”
“마스터께서 거칠게 다루지 말라 하셨습니다, 약간의 외상이라도 생길 시 호라이즌에서 내쫓겠다 하셨으니 유념해 주시길 바랍니다.”
“흥, 날 대타할 놈은 구해두고 쫓니 마니 하는 건가?”
“그럼 가보겠습니다.”
라일리는 삭을 애달픈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내보내 달라는 그녀의 간절한 외침을 삭은 가볍게 무시한 채 나가버렸다.
그리고 아르페지오는 라일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러곤 대뜸 발밑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 서봐.”
라일리는 당장 도망치고 싶다 생각했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괜히 말을 듣지 않았다간 얻어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라일리는 아르페지오가 시키는 대로 마법진 가운데에 섰다.
“네가 정말 라이스턴의 자식이라면 너 스스로 증명해 봐. 네가 키울 만한 가치가 있는 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증명하면 되는데요?”
“곧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 답은 누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네가 찾는 거고.”
그가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마법진이 빛나더니 거대한 빛기둥이 마법진을 덮쳤다.
눈앞이 새카매지고, 암전이 찾아왔다.
***
‘여기는……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 손을 펼치고 이리저리 흔들어봐도 보이는 것은 새카만 어둠뿐. 빛이 완전히 차단당한 어둠 속에 홀로 고립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자마자 숨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좁은 공간에 갇힌 듯 몸을 움직이기 불편해지고 답답했다.
폐쇄된 밀실, 한정된 산소,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
여러 개의 단어가 겹쳐지면서 이윽고 극도의 공포와 혼란이 찾아왔다.
“헉, 헉…… 헉.”
라일리는 본능적으로 목을 움켜잡았다. 기도가 점점 좁아지는 것인지, 아니면 산소가 부족한 것인지 이윽고 숨이 턱 막히는 느낌과 동시에 폐가 팽창하다가 급속도로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죽는다, 이대로라면 죽고 말 거야.
라일리는 목을 움켜잡은 채 도와달라고 외쳤다. 살려달라고,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달라고. 그러나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움직임마저 둔해졌다. 몸을 움직이려 하면 할수록 납덩이 같은 무게감이 몸을 압박했다.
장기가 뒤틀리고, 속이 메슥거렸다. 심장 박동이 점차 느려지면서 한기가 찾아왔다. 추워. 추워, 무서워.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하면서 뼈 마디마디가 시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죽음에 대한 압도적인 공포.
절망적인 기분에 휩싸였다.
‘시, 싫어…… 괴로워, 죽고 싶지 않아. 싫어…… 싫어, 싫어, 싫어!’
라일리는 악에 받친 채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목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고, 몸이 한계점에 다다르자 공포와 절망은 이윽고 분노로 바뀌었다.
‘놔줘, 당장 놔줘, 날 내버려 둬, 날 그냥 놔줘…… 사라져, 죽어버려. 싫어.’
라일리는 딱 세 가지를 염원했다.
첫째, 어둠이 사라졌으면 했다.
둘째, 숨을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셋째, 이 불편한 공간이 통째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사라져.”
순간 입 밖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와장창!
공간에 금이 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부서진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꽉 막혀 있던 숨통이 트였다. 차가운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요동치는 심장만큼이나 격한 혈류는 가면 갈수록 냉기를 머금고 차가워졌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춥지 않았다. 몸 안 가득 한기가 순환하고 있는데 춥다기보다는 한 여름날의 얼음물처럼 시원하고 쾌청했다.
납덩이같이 무겁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쾅!
부서지기 시작하던 공간이 완전히 팽창되더니 이윽고 폭발하면서 엄청난 빛이 쏟아졌다. 라일리는 눈부심에 눈을 가렸고, 빛이 옅어질 때쯤 천천히 눈을 떴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저를 바라보고 있는 아르페지오의 모습이 보였다.
“허억, 헉…….”
아르페지오는 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히 1분.”
“…….”
“이제야 마법사 태가 나는군. 마법사 주제에 ‘마혈’이 막혀 있었으니 일반인과 차이가 없을 만도 했어. 마혈이 막힌 상태로도 죽지 않고 용케 살아 있는 걸 보면 네 아버지가 뭔 짓을 한 모양이야. 하긴 온갖 기상천외한 마법을 쓰던 놈이니.”
라일리는 아르페지오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고작 1분간의 경험이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마력은 개방됐고, 본능적으로 그 엄청난 마력을 운용하는 걸 보면 쓸 만은 하네. 물론 아직 불안정하지만.”
아르페지오가 주저앉아 있는 라일리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 어때?”
라일리는 아르페지오의 손을 잡았다. 아르페지오가 라일리를 일으켜 세웠다.
“좋아요,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고 개운해요.”
“그렇겠지, 마력을 가둬둔 무거운 몸뚱어리를 20년 넘게 유지하고 있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별건 없어, 너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가 강제로 마력을 개방했을 뿐.”
“…….”
“어떠한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너는 마력이 순환하는 혈류가 아예 막혀 있었어. 흔히 마나 회로가 꼬여 있다고 하지. 보통의 인간이라면 고여 있는 마력이 몸속에서 폭발해서 몸이 산산조각 났을 텐데, 넌 멀쩡한 걸 보면 네 몸뚱어리가 돌연변이거나 아니면 라이스턴이 네 몸에 뭔 짓을 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아마도 후자 같은데, 이해는 가. 왜 마력을 노출하면 안 되는 상황인 건지.”
몸이 폭발할 수도 있었다는 말에 라일리는 섬뜩함을 느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건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네가 하기 나름이지.”
“……아, 그럼 증명은…… 저는 증명된 건가요?”
분명 아르페지오는 증명해 보이라고 했다.
그는 답을 알게 될 거라 했지만, 사실 지금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매일 저녁 6시에 여기로 와. 그전에는 오지 마. 내 수면 시간이니까.”
“절 제자로 받아주시는 건가요?”
“제자는 얼어 죽을, 내 나이가 몇인데 벌써 제자를 들여? 난 아직 젊어. 게다가 내 제자가 되고 싶어서 안달 난 놈들이 한 둘인 줄 알아? 그 귀한 자리를 코흘리개 따위가 넘본다고? 어림도 없지.”
“그럼…….”
“호라이즌 문턱은 밟을 수 있게 도와주지. 애초에 딱 이 정도가 협의된 부분이니까.”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라일리의 감사 인사에 아르페지오는 몸을 돌리며 손을 내저었다.
“이제 볼일 끝났으니 썩 꺼져. 그리고 내일부터 나와.”
말본새가 고약하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라일리는 꾸벅 인사를 하고 마력 저장소를 나왔다.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분 같았지…… 그런데도 무서워서 아버지에 대해서는 물어볼 수가 없었어.’
이건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다만…… 그에게 당장 아버지에 대한 걸 캐낼 수는 없을 것 같다. 성격이 너무 다혈질인 데다가 아직 서로 서먹한 관계이니 더 관계를 돈독하게 한 후에 나중에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물론 질문에 곧이곧대로 답해줄지도 의문이기는 하지만.
“즐거워 보이네.”
익숙한 목소리에 라일리는 걸음을 멈췄다. 라일리가 돌아서자마자 뭔가가 라일리를 덮쳤다. 순식간에 벽 뒤로 밀려난 라일리는 자신을 끌어안은 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브넨?”
“나 말고 다른 남자랑 있으면서 즐거워하는 꼴을 보이면 곤란한데.”
기브넨이 라일리를 품에서 떼어내며 눈을 맞췄다.
“……여긴 어쩐 일이야? 손님 응대 중이라고 삭이 그러던데.”
“귀빈께선 조금 전에 갔어. 누나 데려다주려고 기다렸어.”
“아, 나 혼자 갈 수 있는데.”
“나랑 같이 가는 게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너 바쁘잖아.”
“데려다줄 시간 정도는 있어. 할 얘기도 있고.”
벽과 기브넨의 몸 사이에 갇힌 꼴이 된 라일리는 혹여나 누가 볼세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전에 말했잖아, 여긴 아무나 못 온다고.”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무슨 상관이야, 결혼할 사이에.”
그의 표정은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조금 심통이 나 보였다.
위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잠시 당황하던 라일리가 손을 뻗어 그의 등을 감싸고 토닥였다. 이에 기브넨이 라일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분 나빠 보여서.”
푸흐흐, 기브넨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뭐가 웃긴 거지? 라일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기브넨이 그녀의 손에 깍지를 꼈다.
“기분 안 나빠, 좋아졌어.”
“……갑자기?”
“가자, 데려다줄 테니.”
즐거워 보이는 기브넨의 모습에 안심하며 라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
데려다준다는 것이 걸어서 데려다준다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언제나 부유석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그가 오늘은 웬일로 걷는 것을 택했나 했더니.
“일찍 도착하면 빨리 헤어져야 되잖아.”
그저 단순히 일터에 빨리 복귀하기 싫다는 이유로 다리 노동을 택한 것이다.
덕분에 라일리는 기브넨과 깍지를 낀 채로 인파 사이에 뒤섞여 걷고 있었다.
“왜 그렇게 주위 눈치를 봐.”
“……사람 많은 곳을 걷는 건 처음이라서. 그리고.”
“그리고?”
“당신이 너무 눈에 띄잖아.”
“내가 눈에 띈다고? 모르겠는데.”
“너만 모르겠지. 세상 사람들 다 알아.”
물론 과장된 표현이긴 하다. 그가 아무리 유명 인사라 한들, 모든 제국 사람이 그의 얼굴을 알고 있을 확률은 낮았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 않은가. 또 설사 그가 누군지 모른다 한들 그의 외모나 키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리셉션에 참석했던 날.”
“…….”
“당신밖에 안 보였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팩트였으나, 이것이 기브넨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걸까. 기브넨이 걸음을 멈췄다.
“왜?”
“진짜 나만 보였어?”
“응. 혼자 다른 세상 사는 사람 같았어. 그러니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치든 알 바 아니지만, 뭐 상당히 듣기 좋은 말이네.”
“아무튼 눈에 띄는 당신이랑 이렇게 걷고 있는 상황이 부담스러우니까, 주위를 의식할 수밖에 없지.”
“그래서 싫어?”
“싫은 건 아니야.”
“나는 이렇게 단둘이 걷는 거 좋은데.”
“…….”
“애초에 누군가랑 단둘이 이렇게 걸어보는 게 처음이거든.”
기브넨의 말에 라일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되지?”
“여태 수없이 많은 데이트를 했을 텐데 나란히 걸어본 적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라일리의 말에 기브넨이 눈을 찡그렸다.
“왜 수없이 많은 데이트를 했다고 단정 짓는 거지?”
“그야…….”
수많은 염문설이 있었으니까.
라일리는 차마 끝말을 내뱉지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기브넨이 알만하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그 염문설 전부를 믿는 바보가 여기 있었군.”
“다 믿는 건 아니지만, 당신이 전에 그랬잖아. 팔 할은 거짓이고, 이 할은 맞다고.”
“그 이 할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적어. 그리고 그마저도 기간이 짧고. 데이트란 걸 한 적은 더욱더 손에 꼽지.”
“그렇구나.”
“내가 왜 이런 것까지 설명하고 있어야 되는 건지. 내가 누나랑 나누고 싶던 대화는 이게 아닌데.”
“아, 그렇지. 할 말 있다고 했었지. 할 말이 뭔데?”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어. 뭐 먼저 들을래.”
기브넨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라일리가 대답했다.
“나쁜 소식.”
“라이언 남작 일가가 오늘 블레스티지에 도착했다더군.”
“……참 빨리도 정리하고 왔네. 그럼 좋은 소식은?”
기브넨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상견례 날짜 잡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