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감춰두고 나만 봐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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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감춰두고 나만 봐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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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감춰두고 나만 봐야 하는 건데
2023.06.03.
식사가 끝나고 라일리는 기브넨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기브넨은 저택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이번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손을 잡고 걸어서 이동했다.
“고생 많았어, 자리 지키고 있기 힘들었을 텐데.”
“……내가 신경 쓰여서 여기 왔어?”
“응. 걱정돼서.”
라일리는 우물쭈물하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 너와 네 가문에 피해가 가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더는…… 숙부님께 휘둘리며 살지 않을 거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돼.”
라일리의 말에 기브넨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찡그리더니 검지로 라일리의 이마를 가볍게 툭 쳤다.
“내 말을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한데.”
“……이 뜻이 아니야?”
“내가 걱정한 건 누나가 나 모르게 그곳에 가서 고초를 겪을 수 있으니까 그걸 걱정한 거고.”
“……아.”
“쓸데없는 걸 신경 썼네. 설마 날 걱정한 건가? 나와 내 가문에 피해를 끼칠까 봐? 그게 걱정됐어?”
“나는 숙부님 뜻에 휘둘리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숙부님을 통제할 자신은 없어. 숙부님은 교활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야. 항상 남 등쳐먹는 데 혈안이 된 사람이지. 이번 결혼도…….”
“남작이 나와 내 가문을 벗겨 먹으려고 평생을 발버둥 쳐도, 남작은 감당 못 해. 돈도 제대로 벌어본 놈이 쓸 수 있는 법이니까. 고작 그깟 결혼 지참금에 눈 돌아간 남작? 그는 애초에 나와 내 가문을 벗겨 먹을 만한 그릇이 아니야.”
“…….”
“그거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그래도 일단 그들은 내 가족이니까. 인정하기 싫어도 법적으로는 그래. 너와 내 이름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기브넨이 한숨을 내쉬며 라일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련하긴.”
“…….”
“그들을 가족이라 생각하지 마. 법적인 가족? 그거 결혼식 치르자마자 내가 무효화시킬 거니까.”
그가 라일리의 손을 꽉 붙잡았다.
“명심해. 이제 가족은 나뿐이야.”
라일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말하는 가족과 자신이 생각하는 가족은 너무나 달라서.
혈연으로 엮인 친척들조차도 진짜 가족이 되어주지 못했다.
하물며 기브넨은 완벽한 타인. 애초에 그와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친절하고 과분할 만큼 잘 대해주지만 사실 이건 진짜 가족이라기보다는 후견인으로서의 지원에 더 가까웠다.
결혼조차도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맺어진 게 아닌, 단순히 서로의 편의를 위해 이익을 위해 끌어다 놓은 수단에 불과하지 않은가.
‘……우린 가족이 될 수 없어.’
라일리에게 기브넨과 이곳은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이었다.
이 관계가 영원할 수 없고 언젠가 이 집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지금은 이해관계가 맞아 함께 있는 거지만, 결국 이 불완전한 관계는 이해관계가 어긋나는 순간 깨지겠지.
완벽한 갑과 을.
너무도 명백하게 기울어져 있는 관계. 이런 관계는 절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라일리는 기브넨이 없는 미래를 상상했다. 언젠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미래였다.
‘……뭘까, 우리는.’
같이 잠을 잤고, 입을 맞추고, 함께 살지만, 가족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야.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지. 이상한 관계다. 뭔가 말로 콕 집어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관계.
따지고 보자면 그저 즐기기만 하는 관계에 더 가깝지 않나. 역할 놀이? 뭐 그런 거지. 각자 역할을 정해놓고 그 역할에 기대할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사는 것.
그런 사이에 ‘가족’이란 말이 가당키는 한 걸까. 애초에 이 관계는 뭘까.
결혼을 하고 부부의 연을 맺고 그 의무를 다해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겨도, 이 관계는 평생 물음표겠지. 평생 진짜가 될 수 없다. 그저 연극일 뿐이지.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거야.
라일리는 머나먼 미래를 그려보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누구와 어디에 있는지. 그 어떤 것도.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녀의 머나먼 미래에 기브넨 리안스터라는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의 미래에는 내가 있어?’
전해지지 않을 물음표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
한편 에아달린 남작가의 분위기는 기묘했다.
기브넨과 라일리가 나란히 떠나고, 라이언 남작과 남작 부부는 예상보다 훨씬 다정해 보이는 둘의 모습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계했다.
파혼은 없을 거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훗날이 걱정된 것이다.
“라일리가 벌써부터 저렇게 오만방자하게 구는데…… 솔직히 걱정이에요. 나중에라도 해코지를 하면 어쩌죠?”
남작 부인의 우려에 라이언도 동의했다.
‘평생 함께 갈 사이는 아니고, 그렇다고 당장 버릴 수도 없고…….’
“일단은 수도에서 자리를 잡고 입지를 다지는 게 최우선이야.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야겠지. 라일리가 아무리 우리를 미워해도 당장에 어쩌지는 못할 거요.”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라일리가 리안스터 가문에 시집가고 중앙 귀족계에 입성해도 가문에 힘이 없다는 것은 앞으로의 생활에 큰 걸림돌이 될 거야. 고아보다는 남작가라는 배경이 나을 테니 당장 우릴 어쩌지는 못할 거요.”
“……그럴까요?”
“그럼. 다만…… 언젠가는 우리와 가족의 연을 끊고 우릴 칠 거요. 다만 시일은 꽤 걸리겠지. 우리는 그때까지 라일리를 이용해 이득을 보면서 라일리를 쳐낼 방법을 강구해 보면 될 일. 당장 걱정할 일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라이언의 말에 남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고, 라이언은 클레어를 향해 일렀다.
“너도 상황이 이러하니 그 성질머리 좀 죽이고 최대한 조용히 지내려고 노력해.”
라이언의 말에 클레어는 눈을 크게 떴다.
클레어는 그간 라이언이 자신을 홀대한다고 생각했다.
라일리가 기브넨 리안스터와 약혼한 이후 눈에 띄게 냉대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는 언제나 라일리를 두둔했다. 매번 라일리 앞에서 혼나야 했던 클레어의 자존심은 뭉개질 대로 뭉개진 상태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저를 미워하던 거 아니셨어요?”
“내게 딸은 너뿐이다.”
“……아버지.”
“누구는 좋아서 라일리를 감쌌겠느냐. 나도 그 계집을 감싸고 싶지 않아. 그런데 네가 계속 라일리를 감싸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으니 나라고 별 수 있겠느냐?”
“…….”
“그러니 너도 라일리에게 최대한 고분고분하게 굴어. 괜히 시끄러운 일을 만들지 말고.”
라이언의 말에 클레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니 그렇죠.”
“누군들 좋아서 그 계집의 비위를 맞춰주는 줄 아느냐? 지금은 일단 굽혀야 한다. 너도 이제라도 굽히는 법을 배우도록 해라.”
“……노력해 볼게요.”
클레어는 도망치듯 방으로 올라왔다.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거면 이렇게 골머리 앓을 일도 없었지!’
클레어도 모르지 않았다.
지금 자신과 라일리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걸. 라일리에게 어떻게든 납작 엎드려야 한다는 걸.
하지만 머리로는 이를 알고 있는데 행동은 계속 감정을 따라 움직였다. 클레어는 유독 라일리의 앞에서는 감정적으로 변했다.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산 건 난데.’
클레어는 라일리를 생각할 때마다 욱했다. 밑바닥부터 치밀고 올라오는 분노는 이성으로 다스리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깊었다.
블레스티지에 상경하고 나서는 더 심해졌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깨달아버렸으니까.
나름 좀 ‘산다’고 자부했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몸소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는 라이언에게 더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야욕을 불태우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클레어에게 엄청난 회의감을 가져왔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밑바닥에서 바짝 엎드리며 살던 라일리가 한순간에 인생 역전한 채 풍족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있으니 화병이 날 수밖에 없었다.
라일리가 지금 누리는 삶은 클레어가 한평생 꿈꿔오던 삶이었다. 최고로 멋있고 신분이 높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고생 없이, 무시당하지 않고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 이것만이 변변찮은 가문 태생이 가진 자격지심을 눌러버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더 나은 가문에 시집가서 그 가문의 안주인으로 사는 것. 이를 위해 클레어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아가씨, 울지 마세요.”
“……억울해, 분하고 억울해 죽겠어. 왜 하필 라일리야? 왜 하필!”
클레어의 직속 하녀인 리즈는 안절부절못하며 클레어를 달래려 노력했다.
“저희도 당황스러워요, 정말 마탑주께서 정신이 나가버린 게 아니고서야 대체 큰 아가씨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서…… 애초에 이게 말이 되는 결혼이냔 말이죠. 집안 격차가 이렇게 심한데 아무런 문제 없이 순탄하게 결혼 준비가 진행되는 것도 이해가 안 가요. 뭐가 이렇게 쉽고, 뭐가 이렇게 일사천리인지.”
“걔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우리 집에 눌러앉아서 밥만 축내던 게, 그 멍청한 게…… 이젠 리안스터 가의 안주인 노릇을 하고 있잖아. 오늘 입은 옷, 장신구. 그 값비싼 것들이 걔한테 어울리기는 해?”
“솔직히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였어요. 전혀 안 어울렸어요.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은 듯이 부자연스러웠다니까요?”
클레어는 욕을 쏟아내고도 성에 차지 않는지 이윽고 소리를 내 울음을 터트렸다.
살면서 이렇게 울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한평생 흘린 적 없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억울하고 분했다.
자신은 평생을 노력하면서 살았다.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고, 인간 관계에 힘쓰면서 자신을 가꾸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라일리가 모든 걸 가져갔다. 그토록 꿈꾸고 바라던 삶은 클레어 에아달린이 아닌, 라일리 에아달린의 차지가 된 것이다.
차라리 건너 건너 아는 정도의 지인 일이었으면 배가 아플지언정 이렇게 분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필이면 라일리라서! 그 행운의 주인공이 빌어먹을 라일리라서! 클레어는 속에서부터 들끓어 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라일리의 앞에만 서면 계속 말이 엇나갔다.
“쌍으로 재수 없어. 그놈은 겉으로 보기에는 착한 신사인 척하더니, 사실은 쓰레기…… 라일리도 여태 고분고분하던 모습이 다 가식이었던 거지!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니까 죽여버리고 싶어.”
“아가씨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당장 결혼이 결정된 것도 아니잖아요.”
“결혼이 결정된 거나 다름없지! 당장 내일이 상견례인데!”
“또 모르죠. 큰 아가씨와 에르메인츠 백작의 혼사도 하루 만에 파투났잖아요? 결혼은 혼인 신고서에 도장 찍지 않는 이상 모르는 거랬어요.”
“…….”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내일 상견례 말이에요. 리안스터 공작가에서 큰 아가씨를 마음에 들어 하겠어요? 그 상견례가 오히려 파혼의 자리도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확실히 상견례 자리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것이다.
이를 걱정해 부모님도 라일리를 이곳에 불러 사전에 말을 맞추기로 한 것이다.
제아무리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라도, 기본 교육조차 받지 못한 가방끈 짧은 여자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 하는 집안이 얼마나 될까?
리안스터 가문이 보통 가문은 아니지 않은가. 역사적으로 이름을 새긴 위대한 위인들을 많이 배출한 엘리트 집안에서 한미한 남작가의 양녀에 무식하기까지 한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할 확률은 낮았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기브넨 리안스터만 미친 거지. 그 집안 식구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일 거야. 라일리 따위가 성에 찰 리가 없어. 그렇지?”
“그렇죠.”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냐고!”
“예민해져서 그래요,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계속 부정적인 생각만 나는 거예요.”
“……정말 그런 걸까?”
“예, 그럼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결혼이잖아요. 모두가 잠시 마탑주의 정신 나간 행동에 놀아나고 있는 것뿐이에요. 마탑주께서도 상견례까지 가면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요?”
“…….”
“식 치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 너무 고심하지 마세요!”
클레어는 눈물을 닦으며 이를 바득 갈았다.
그녀는 반쯤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그래,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상견례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아니! 절대 안 돼!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야 돼, 라일리와 호라이즌 마탑주의 결혼은…… 절대 용납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