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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상견례
2023.06.10.



“모두 왜 그러시오?”

앨튼의 물음에 모두 흐린 눈을 하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물론 라일리는 여전히 식사를 못 하고 있었다.


“예.”

“아가, 몸이 안 좋은 것이냐? 먹는 것이 시원치 않은데.”

“아, 아닙니다, 정말 열심히 먹고 있습니다.”

“하하, 딸아이가 원래 입이 짧습니다. 식사가 느리기도 하고요.”

라이언의 말에 앨튼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렇소? 그래서 저렇게 작은 거로군, 좀 더 신경 써서 잘 챙겨 먹어야 할 텐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이거 먹거라. 몸에 좋은 귀한 것이란다. 바다 깊숙한 곳에서만 잡히는 놈의 알인데 맛이 아주 좋아. 영양가도 풍부하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상상하지도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앨튼 공작이 라일리의 접시 위에 친히 음식을 덜어 챙겨주었다. 애정이 묻어나는 그 행동에 모두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순간 기브넨은 라일리의 앞접시에 놓인 해산물을 자신의 그릇으로 덜어갔다.


“제가 챙겨줄 겁니다. 그리고 누나는 해산물 안 좋아합니다.”

이번에는 기브넨이 얇은 피에 속이 꽉 채워진 만두를 라일리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많이 먹어, 누나.”

앨튼이 코웃음을 쳤다.


“흥, 굼뜬 놈. 이런 건 나보다 네가 먼저 챙겼어야지. 네가 그리도 굼뜨고 눈치가 없으니 여자들에게 차이기나 하는 것이다.”

“말은 바로 하십시오, 저는 차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찼으면 모를까.”

어째서 상견례 자리에 부자가 신경전을 펼치는 유치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거지.

여러모로 황당한 상황이었으나, 오히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딱딱해진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상견례 자리이니 서로 필요한 대화만 나누는 게 어떨까요. 알맹이가 없잖아요.”

마지못해 리브네가 한소리하고, 그제야 앨튼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뭐, 길게 말할 것 있나. 알 거 다 아는 사이에. 결혼은 최대한 빨리 진행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앨튼의 말에 라이언과 남작 부인이 주춤했다. 특히나 옆에 있던 클레어는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화난 것처럼 보였다. 라일리는 순식간에 가라앉은 클레어의 표정에서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최대한 빨리.”

“너보고 물은 게 아니다, 이놈아.”

“장인어른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이실 겁니다.”

기브넨의 눈짓에 라이언이 황급히 대답했다.


“무, 물론입니다. 저흰 빨리 진행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그럼 서둘러 가능한 날짜 조율해 보고 최대한 빨리 진행하지.”

“저, 정말이십니까?”

“결혼에 대한 대략적인 논의는 아들놈과 다 한 걸로 알고 있고, 나도 대강 그 이야기는 전해 들었소. 아들놈과 이야기했던 조건 그대로 진행하지. 결혼 준비는 우리 측에서 다 알아서 할 거고, 필요한 게 있으면 아들놈에게 말씀하시오."

결혼에 대해 논의하러 온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일 앨튼 리안스터는 너무나 쿨하게 이 결혼을 허락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굳이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요점만 콕, 콕 집어 전달한 그의 말에 기브넨은 만족스럽다는 듯 손뼉을 쳤다.


“역시 시원시원합니다. 저는 이래서 아버지가 좋습니다.”

“넌 끝나고 남거라, 할 얘기가 많으니.”

“그렇게 하죠.”

“이왕이면 며느리도 같이.”

“그건 누나의 의사를 들어봐야 합니다. 전 몰라도 누나는 아버지가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원래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가 편할 순 없지 않습니까.”

라일리가 불편해할 수도 있다는 말에 앨튼은 잠시 눈을 굴리다 다소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크흠, 그럼 나중에라도…….”

또다시 화제가 다른 곳으로 샜다.

라이언과 남작 부인은 이제야 한시름 덜었다는 듯 편안한 모습으로 식사를 즐겼다.

다만 클레어는 폭발 직전의 화산 같은 상태였다. 입맛이 뚝 떨어진 모양인지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표정 관리에 들어갔지만 경직된 근육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이 돌변했다. 이에 라일리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기세였다.

그리고 라일리의 예상대로 클레어가 앞으로 나섰다.


 


“공작 각하, 정말 이대로 괜찮으신가요?”

라이언과 남작 부인은 갑작스러운 클레어의 돌발 행동에 나이프와 포크를 든 채 돌처럼 굳었다. 그들의 불안한 시선이 클레어를 향했지만, 클레어의 눈에는 평소와 다른 이채가 가득했다.

이에 라이언과 남작 부인은 짧게 탄식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 것이다.


“뭐가 괜찮냐 묻는 거지?”

앨튼의 물음에 클레어는 다소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상견례 자리인데. 결혼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도 없이 이렇게 간단하게 결혼을 결정하고 진행하는 게 괜찮으신가 묻는 겁니다. 물론 저희야 좋은 일이지만 공작 각하께서는 좀 더 고심해 볼 부분이 많은 위치에 계시지 않습니까.”

“클레어!”

남작 부인이 급히 클레어를 뜯어말렸으나, 클레어는 굴하지 않았다.


“어머니, 결혼이란 가문의 중대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 같은데 이렇게 얼렁뚱땅 넘기면 저희야 좋겠지만, 리안스터 가문에서 나중에라도 변심해서 우리 언니를 헌신짝 취급하며 내버리면요?”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아니, 계속하게 놔두시오.”

앨튼은 라이언을 만류하며 클레어에게 계속 말해보라 눈짓했다.


“솔직히 그렇잖아요. 저 둘이야 세기의 사랑 놀음이겠지만 집안 어른들 입장은 다르잖아요? 귀족들의 결혼은 가문의 결속과 번영이 1순위 목표이자 궁극적 목표인 거고, 이를 위해 급이 맞는 사람들, 비슷한 신분의 사람들끼리 모여 결혼을 하고 결속을 다지는 거잖아요. 결국 결혼 자체가 ‘가문’의 격을 높이는 대외행사인 건데 남의 이목을 누구보다 신경 쓰셔야 할 위치에 계신 분께서 가문의 대소사를 너무 속단적으로 결정하신 건 아닌가 우려되어 말씀드리는 겁니다.”

클레어의 맹랑한 발언은 정말 돌아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라이언은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개져서는 목덜미를 잡고 비틀거렸고, 남작 부인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만 살폈다. 그리고 라일리는 클레어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라일리에게 있어서 클레어의 행동은 정말 무모하지만 동시에 용기 있는 것이었다. 그게 비록 이 상견례를 망치고 싶은 악의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는 실로 가상했다.

대체 얼마나 속이 뒤집어졌으면 이런 무모한 행동까지…… 라일리는 평생을 가도 클레어를 이해하는 날은 오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저는 언니가 너무 걱정됩니다.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을 따지면 따질수록 이 상황 자체가 이해 가지 않아요. 그렇잖아요? 결혼에 필요한 모든 준비, 비용도 다 알아서 하겠다 하시고 몸만 덥석 가는 결혼 당장엔 문제가 없어도, 나중에는요? 이미 균형이 어긋난 관계로 들어가는 건데…… 또 결혼을 하면 대대적인 언론 보도도 있을 거고, 사람들에게 그대로 노출되는 건데…… 저희 가문은 그 후폭풍을 감당할 여력도 없고…….”

저 입에서 언니가 걱정된다는 말이 나오다니.

수준급의 연기에 라일리는 할 말을 잃었다. 뻔뻔함으로는 클레어를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라이언과 남작 부인은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로 보였다. 그들은 반쯤 혼이 나가 있는 듯했다. 반면 앨튼과 기브넨은 매우 태연했고 리브네는 무슨 생각인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면서도 나서지 않고 침묵했다.


“그리고 또…… 우리 언니는 배움이 모자라요, 솔직히 리안스터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감당할 그릇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기초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고…… 또 다른 남자와 약혼했다가 파혼까지 간 전적도 있고, 결혼하고 나면 이게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텐데 그럼 우리 언니의 명예는 지켜주실 건가요? 전 모르겠어요, 이 결혼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안 가고, 또…….”

클레어는 점점 횡설수설했다.

사실 부모도 가만히 있는 판에 동생이 현실적인 문제를 들먹이며 나서는 상황 자체가 웃긴 상황이긴 했다. 게다가 꼬투리랍시고 잡는 것도 처음에는 그럴 듯했지만 점점 결혼하면 안 되는 이유를 쥐어짜 내는 느낌이 강했다.

클레어는 기브넨과 라일리가 결혼하면 안 되는 100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에 빙의라도 한 듯 필사적이었다.

클레어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앨튼이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자네도 같은 생각인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는군.”

앨튼은 턱을 어루만지며 클레어를 향해 웃었다.


“뭘 걱정하는지는 잘 알겠네. 하지만 자네 주장은 전제부터 틀려먹었어.”

“…….”

“이 결혼은 우리 입장에서는 그다지 손해인 결혼이 아니니까. 덥석 몸만 가는 결혼이란 표현은 적절치 못한 것 같군.”

“……어째서죠?”

“확실히 귀족의 결혼은 비슷한 수준의 가문끼리 맺어오던 게 관례이긴 하지. 당장 우리 가문만 해도 그랬고. 하지만 이젠 별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

“우리 가문은 제국의 시작을 함께하면서 그 명맥을 깊게 이어왔고 지금에 와서는 번영을 이룰 만큼 이뤘다. 앞으로 우리에게 가문의 번영이란 고귀한 혈통, 그러니까 순수 마법사의 혈통을 잇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는 결혼 시장에서 가문을 따지기보다는 마법사 여부를 따지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만큼 마법사라는 인재는 무한한 가치를 가졌지. 우린 그 미래에 투자하려는 것이고. 출신 가문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아.”

클레어는 황당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앨튼은 그녀의 의문을 해소해 주기 위해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마법사의 씨가 갈수록 마르고 있다. 우리 사람들은 ‘마법’이 주는 편의를 누리며 살고 있는데 ‘마법’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해 줄 인재는 씨가 말랐어. 앞으로 마법사 인구 고갈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마법사를 확보하기 위해 싸우는 시대가 오겠지. 마법사의 가치가 가문과 재산을 뛰어넘는 시대가 와. 실제로 마탑들은 벌써부터 마법사 인재 영입에 큰돈을 지출하고 있고.”

“……아무리 마법사가 씨가 말랐어도, 번듯한 귀족 가문 소속 마법사들도 적지 않을 텐데요? 리안스터 가문 정도면 원하는 혼처를 찾는 건 식은 죽 먹기 아닌가요?”

“왜 굳이 그런 귀찮은 일을 해야 하지?”

“…….”

“내 아들놈이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고, 마법사야. 그거면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는데.”

“이왕이면 힘 있는 가문 소속인 게 좋잖아요.”

클레어의 말에 앨튼은 웃음을 터트렸다.


“리안스터 가문은 마탑 호라이즌의 인수로 이번에 전례 없는 최대 번영기를 맞았어. 가문의 수준을 따진다고 치면 성에 차는 가문이 단 한 군데도 없지. 기껏해야 3대 공작가 정도일까? 게다가 리안스터 가문의 일원이 어디 기브넨 뿐이던가. 우리 가문은 이미 예전부터 굵직한 가문과의 결혼을 통해 가문의 기반을 다져왔네.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네. 제국 건국 시절부터 이어온 우리 가문의 명맥을 무시하면 곤란해.”

“…….”

“게다가 상인이 돈을 주고 귀족의 작위를 사는 시대다. 이제는 작위도 정통성을 잃어가고 있고 귀족이라는 신분이 서서히 몰락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어. 이는 더 가속화될 것이다. 그러니 ‘힘 있는 가문’이라는 것이 그렇게 가치가 있는 자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클레어는 당황하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떻게든 이 결혼을 엎으려는 이유를 쥐어 짜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어, 언니를 마법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슨 뜻이지?”

“언니는 마법사 등록도 되어 있지 않아요! 마법사인 줄도 모르고 살았고, 마법도 쓸 줄 모른단 말이에요. 순수 마법사 혈통을 잇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언니는 제대로 된 마법사도, 뛰어난 마법사도 아니에요. 마법사라는 걸 알게 된 것도 최근 리셉션 참석 건으로 알게 된 사실이고요. 마법사 등록이 안 되어 있다는 것부터가 마법사로서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닐까요?”

클레어의 말에 앨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가 뛰어난 마법사 인재라는 건 내가 보증하지. 뭔가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

“게다가 내 아들놈이 다른 건 몰라도 가치 있는 걸 알아보는 눈 하나는 뛰어나지. 난 내 아들의 안목을 믿고.”

“…….”

“더 궁금한 점은 없나?”

클레어는 새하얗게 질렸다.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온 건지 자신이 저지른 상황을 자각한 듯했다. 게다가 미친 척하며 미친 짓을 저질렀지만, 정작 수확조차 못 본 상황이니 얼마나 심란할까.


“……없습니다.”

“이 결혼을 납득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군.”

클레어는 고개를 푹 숙였고, 기브넨이 대화를 최종 마무리했다.


“결혼식 날짜는 제가 일정을 잡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해산할 시간이 되자 인그시니아 직원들이 라이언에게 다가왔다.

기브넨이 짤막하게 명령했다.


“안전하게 모셔다드려.”

“알겠습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안내에 따라 라이언 가족이 사라지고, 앨튼이 라일리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고생 많았겠구나.”

“…….”

“이제는 걱정 말거라, 우리 가문이 너를 안전하게 지켜줄 테니.”

호의적인 걸 넘어서 애정이 느껴지는 태도에 라일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앨튼는 그런 라일리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라이스턴보다는 에밀리를 더 닮았구나.”

“……에밀리?”

“그 고얀 놈이 네 어머니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더냐?”

“……저를 낳자마자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려주셨어요.”

“하긴 이해는 간다. 에밀리가 죽고 라이스턴은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까. 그래도…… 꽤 열심히 살았던 모양이군. 그 갓난아기를 이렇게 어엿한 레이디로 키워낸 것을 보면.”

“…….”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시간이 늦었구나. 이야기는 앞으로 차차 나누면 되니까 조심해서 들어가도록 해라. 기회가 되면 네 아버지가 그간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고.”

걱정과 달리 앨튼는 참 따뜻하고 자상했다.

그의 아들 기브넨만큼이나.

라일리는 안도하며 그에게 몸을 굽혀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앨튼가 먼저 앞장서고, 뒤따르던 리브네가 라일리를 흘겨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이만 가볼게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리브네가 엘튼을 뒤따르고,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라일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라일리를 기브넨이 가볍게 토닥였다.


“고생했어.”

“응.”

중간에 사고가 있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상견례는 잘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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