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침대에 있다는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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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침대에 있다는 상상
2023.04.29.
해주의 목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영재로선 그녀가 원하는 요구를 섣불리 여길 게 아니었다.
“이해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아요.”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매니저님은 저한테 이런 대우를 받으실 분이 아니잖아요.”
해주도 이 상황이 안타깝긴 했다.
영재 정도의 능력과 경력이면 얼마든지 유능한 배우를 맡을 수 있었다.
곳곳에서 그를 영입을 못 해 안달이었다.
그런데도 GN에서 영재를 스카우트할 수 있었던 건 돈의 힘이었을 거라 예상했다.
“현성 씨를 밀어내겠다는 게 아닙니다. 인력이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좋은 거고요.”
“저는 현성이면 충분해요.”
“GN에서 요구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죠?”
“해주 씨가 세계적인 배우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해주 씨에게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영재의 얘길 듣는 해주의 눈빛은 서글픔으로 물들었다.
다른 배우였다면 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주는 아니었다.
“그걸 빌미로 GN에서 영재 매니저님을 붙잡았을 거예요.”
“무슨 말이죠?”
“그분들은 저를 통제하고 싶어 하거든요.”
영재는 GN엔터테인먼트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사실을 GN 측에 보고했었다. 그러자 한진태는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일 처리 방식이 뭔가 이상했다.
다짜고짜 현성을 찾아가 겁을 줬다고 들었다.
영재도 이 업계에서 비합리적인 처사들을 더러 겪어 왔었다. 안타깝긴 해도 이런 상황에는 더 큰 힘에 줄을 서는 게 현명했다.
“이해주 씨가 우려하는 일은 없게끔 제가 중간 역할을 하겠습니다.”
“저의 모든 걸 그들에게 보고하는 게 중간 역할인가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영재 매니저님을 원하지 않아요.”
“그럼 현성 씨와 제가 함께 일하는 건 괜찮겠어요?”
도통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어쩌면 영재는 애초에 해주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계속 시간을 끌 순 없었다. 뒤에선 스텝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어 대화를 중단했다.
해주가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자리로 갔다. 딱딱한 표정으로 거울을 응시하는 그녀를 영재가 지켜보았다.
“현성아, 나 마실 거 좀.”
“네, 누나.”
현성이 일어나 테이블에 놓인 테이크 아웃 음료를 들 때였다. 앞으로 걸어 나온 영재가 해주의 손에 물병을 쥐여 줬다.
“당이 많은 건 갈증을 유발하니 촬영 후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봐요!”
영재는 해주에게 음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서 생크림이 올라간 음료를 들고 있던 현성만 뻘쭘해지고 말았다.
메이크업이 끝나고 영재가 통화하느라 스튜디오를 나갔다.
그 틈에 현성이 해주에게 음료를 건넸다.
“현성아, 이사님께 전화 걸어 봐.”
해주도 화가 났다.
머리를 하는 동안 현성은 해주의 핸드폰으로 진한에게 전화했다.
-응, 해주 씨.
“이사님, 저 현성입니다. 잠시만요.”
해주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바깥에 있는 영재의 동태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사님, 영재 매니저가 막무가내예요. 아침에 한진태 실장이 현성이를 협박했나 봐요.”
-그게 사실이야?
“어떻게 좀 해 봐요. 지금 촬영장인데 불편해 죽겠어요.”
어지간해선 해주가 이러지 않았다.
하지만 영재와 다니면 사사로운 것까지 보고가 들어갈 거란 생각에 괴로웠다.
-영재 매니저와는 대화해 봐야 소용없을 거야.
“그럼요?”
-내가 GN에 다녀올게.
“……알겠어요.”
진한이 유 회장을 직접 만나 담판을 짓겠다는 거였다.
더 조를 수도 없어 핸드폰을 내려놨다.
“현성아, 오늘은 어쩔 수 없겠다. 조금만 참아.”
“네.”
통화를 끝낸 영재가 돌아왔다.
그는 해주가 변해가는 과정을 세세하게 지켜보았다.
“유니크한 건 좋지만 난해한 건 안 됩니다.”
“사전에 정해진 부분이라서요.”
“편집장님은 어디 계시죠?”
영재가 깐깐하게 굴며 촬영 콘셉트를 살폈다.
처음 왔던 날, 회의가 있다는 말에 참석하려다 그냥 돌아간 탓이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편집장과 사진작가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편집장이 영재의 말을 잘랐다.
“결과물을 보고 다시 얘기하시죠.”
“이왕이면 이번 영화와 사진 분위기가 맞았으면 했어요.”
“그걸 이제 와서 말씀하시는 건 좀…….”
“조명이라도 바꿀 수 없나요?”
듣다가 못한 해주가 걸어 나왔다.
영재 앞을 가로막고서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만 해요! 뒤늦게 이러는 거 굉장한 실례라고요.”
“앞으로는 이렇게 중구난방은 안 돼요.”
“뭐라고요?”
“화보는 개봉될 영화와 연계해서 찍어야 해요. 그게 홍보에도 좋고요.”
“의상이 웨딩드레스여도 로맨틱한 설정이 아니에요.”
“편집장님 말대로 결과물을 보고 다시 상의해 봅시다.”
좋던 분위기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영재로 인해 현성은 끼어들 틈이 없어 그저 바라만 봤다.
드디어 첫 의상을 입은 해주가 나왔다.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으려는 그녀를 현성이 다독였다.
“누나, 촬영에만 집중해요.”
자칫 흔한 웨딩 사진으로 나올 수 있었다.
우려와는 달리 사진작가는 소품과 조명으로 몽환적인 느낌을 연출했다.
그에 어울리게 해주의 눈빛이 돌변했다.
처음엔 뻣뻣하던 포즈에도 시간이 갈수록 유연하게 변화를 주었다.
“좋습니다! 고개 들고 한 컷 더…… 굿!”
카메라에 찍힌 사진은 실시간으로 컴퓨터 모니터로 띄워졌다. 편집장과 스타일리스트는 해주의 프로페셔널한 감각에 한껏 만족했다.
영재도 결과물들을 보고서야 수긍하는 듯했다.
“다음 의상 준비해 주세요.”
다행히 시작이 좋았다.
해주가 의상을 바꿔 입고서 메이크업을 수정하는 동안 편집장은 현성에게 갔다.
“우리 약속한 거…… 알고 있죠?”
“그럼요.”
해주가 오늘 입을 드레스는 총 네 벌이었다.
그새 오후를 넘기며 세 번째 의상도 완벽하게 소화했다.
서서히 지쳐 갈 무렵이었다.
해주는 허기가 질 때마다 테이블에 놓인 간식거리를 입에 넣었다.
“이제 마지막 의상?”
“네, 조금만 더 힘내요. 해주 씨!”
스텝들의 응원을 받으며 해주가 세 번째 드레스를 탈의했다.
스타일리스트가 조심스럽게 들고 온 드레스는 레이스가 인어의 비늘을 닮도록 짜였다.
“L 브랜드 수석디자이너 루카가 직접 제작한 작품이에요.”
작은 무늬 하나에도 아름다움과 품위가 느껴졌다.
특히 적당히 몸매를 드러내면서도 우아하게 퍼지는 스커트 선이 고아했다.
돈으로는 매길 수 없는 작품이었다.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의상을 입어 보는 건 모델로서 큰 영광이었다.
영재 때문에 착잡하던 참에 처음으로 미소가 그려졌다.
해주는 선 채로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이번엔 내추럴이 콘셉트라서 머리를 풀 거예요.”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해주의 머리카락은 적당히 부풀었다. 인공적인 염색이 전혀 돼 있지 않아 청초했다.
그녀가 스튜디오로 등장하자 스텝들의 함성이 터졌다.
도톰한 입술과 눈망울이 조명을 받는 순간 그 자체로 작품이 되었다.
“해주 씨, 이 드레스는 같이 찍을 모델이 있어요.”
“아, 그래요?”
다른 모델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해주는 낯을 가리긴 해도 일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모델분 나와 주세요!”
편집장의 부름에 스튜디오 밖에서부터 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며 해주도 관심을 보였다.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턱시도를 입은 도준이었다.
“도준 씨!”
칼같이 떨어지는 매끈한 선이 도준의 압도적인 피지컬을 돋보이게 했다.
아침에 대충 넘겼던 머리엔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해주를 바라보는 눈빛이 유독 야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그의 모습은 세상에 둘도 없을 잘생긴 개망나니였다.
“이해주, 예쁘다.”
종일 심란하던 차에 해주가 그만 눈물을 머금었다.
도준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부풀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해주의 물음에 편집장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박도준 대표님 캐스팅하느라 얼마나 애먹었다고요.”
“그랬구나.”
“워낙 바쁘셔서 시간 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편집장의 인사에 도준이 예의를 갖춰 화답했다.
그 모습조차 빛이 나자 스튜디오에 있던 스텝들이 난리가 났다.
이런 중에도 영재는 웃지를 못했다. 도준을 실물로 마주한 그의 표정은 메말라 갔다.
“촬영 들어갈게요.”
도준이 성큼성큼 걸어 해주 곁으로 갔다.
따스하게 손을 잡아 주자 온기가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정말 괜찮겠어요?”
“난 잘 못하니까 네가 리드해.”
“자연스럽게 하면 돼요.”
도준은 며칠 전 잡지사 편집장의 연락을 받았다.
서프라이즈로 해주와 화보 촬영을 하는 게 어떠냐며 제의했었다.
워낙 일이 많아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계속 대답을 미루다 어제야 겨우 전화해 일정을 맞췄다.
어렵게 온 자리지만 해주가 무척 기뻐했다.
그럼 된 거였다.
“자, 시작할게요!”
사진작가의 외침과 함께 촬영이 시작했다.
도준의 눈빛이 살아 있어 화려한 포즈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두 분 더 가까이 마주해 볼까요?”
도준이 해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윽고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거처럼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됐다.
해주는 도준과 침대에 있다고 상상했다.
숨이 막혀 오는 그의 집요함을 떠올리며 야릇한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많이 찍을 것도 없이 사진작가가 외쳤다.
“여기까지!”
해주의 몸에 힘이 빠지며 도준에게 기댔다.
그 모습조차 어여뻐 사진작가가 놓치지 않고 찍어 주었다.
“이번 컷은 선물이니까 두 분 평소처럼 해 보실래요?”
도준이 해주의 손에 깍지를 꼈다.
카메라를 향해 나란히 서는가 싶더니 그의 고개가 해주에게 기울어졌다.
그러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사진작가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부러워서 더 찍을 수가 없네요. 진짜 끝!”
애교 섞인 푸념에 폭소가 터졌다.
감사의 마음을 전한 도준은 해주를 부축해 대기실로 갔다.
“고생했어.”
“나 배고파요.”
“현성이 데리고 저녁 먹으러 가자.”
“그전에…… 문제가 있어요.”
“문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재가 다가왔다.
뒤로는 현성이 기가 죽어 서 있었다.
도준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껏 스텝인 줄만 알았던 영재를 보곤 미간을 좁혔다.
“누구십니까?”
“김영재 매니저라고 합니다. 이번에 GN과 별도로 계약해 이해주 씨와 함께하게 됐습니다.”
“소속사와 합의가 있었습니까?”
“GN엔터테인먼트는 GN의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합의나 허락은 중요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한진태 실장이 그러던가요?”
“그렇습니다.”
도준의 입매가 얄궂게 뒤틀렸다.
며칠 전 해주에게 영재에 관한 얘길 듣긴 했어도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다.
진한이 적당히 정리해 주어 그러려니 했는데 아니었다.
“당신은 옷부터 갈아입어.”
해주가 탈의실로 향했다.
그 사이 도준은 영재를 데리고 스튜디오 밖으로 나왔다.
그새 날이 저물어 하늘이 어둑했다.
“김영재 매니저라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유 회장님을 만나본 적은?”
“아직 그분은 뵙지는 못했습니다.”
“한진태 실장이 특별한 조건을 제시하며 계약하자고 했겠군.”
“파격적이긴 했습니다.”
“계약금을 받았나?”
취조에 가까운 도준의 질문에 영재가 잠시 입을 닫았다.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위압감에 할 말을 곱씹었다.
도준에게 그럴싸하게 둘러대자니 금세 들통이 날 것 같았다. 이에 어느 정도는 사실을 털어놨다.
“이해주 씨가 저를 매니저로 받아들이면 약속한 인센티브의 50%를 먼저 받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계약서에 도장은 찍었고?”
“더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한진태 실장이라면 자기가 피할 구멍은 만들어놨을 거 같아서.”
“무슨 뜻이죠?”
“계약서에는 도장 찍기 전 아닌가?”
최근 도준은 한진태에 관해 알아봤다.
손해 보는 거래는 하지 않기로 유명해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이들이 많았다.
영재에게 한진태가 제시한 조건이란 뻔했다.
실체가 없는 달콤한 제안을 한 후 원하는 결과를 요구하는 거다.
그 미션이 성공하면 그때야 선심 쓰듯 은밀한 비용을 줄 가능성이 컸다.
그것도 전부가 아닌 부분만.
“어떻게 아셨죠?”
“그 새끼 사기꾼이야.”
“……!”
영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저도 모르게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자 영재가 애써 헛기침을 했다.
이런 그에게 도준은 적당한 먹이를 던졌다.
“한진태가 약속한 인센티브의 두 배를 주지. 그러니 나와 손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