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매일 밤 깊게 파고드는 (78/82)


78 매일 밤 깊게 파고드는
2023.05.30.


도준은 집으로 오기 전 샌드위치 전문점에 들렀었다.

해주가 좋아하는 메뉴로 포장 주문한 후 잠시 매장 밖으로 나왔다.

핸드폰을 드는 도준의 마음에 찬바람이 일었다.

이번 일로 혹여 해주가 지치진 않을까, 곱씹던 걱정은 한숨으로 쏟아졌다.

당장 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울리던 기계음은 어렵게 연결을 시켜 주었다.


-……대표님.

“왜 그랬니?”

-……죄송합니다.

이번만큼은 현성을 다그쳤다.

서글픔을 잔뜩 끌어안은 사과에 침음하던 도준이 입을 열었다.


“적어도 나한텐 말을 하고 저질렀어야지.”

-욱하는 마음에 그만…….

홧김에 저지른 현성의 미숙한 실수였다.

실수의 대가를 떠안기엔 가진 역량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혼내는 게 별 의미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수습이 관건으로 유 회장이 제풀에 지쳐 꺾이도록 해야 했다.


“다들 해주가 그 글을 적었다고 오해하고 있어.”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현성은 영재에게 폭력을 당했다. 그 순간만큼은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정신을 잃을 뻔했다.

최악의 순간에 도준이 와 주었다.

해주를 데려다줄 때만 해도 현성은 살았다는 안도감에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집으로 온 후 서서히 후유증이 나타났다. 괜찮다가도 목이 졸리던 공포가 떠올라 숨이 막히고 죽을 것만 같았다.


“병원엔 가 봤어?”

견디다 못한 현성은 주말을 앞두고 병원을 찾았다.

공황장애와 외상후 스트레스 판정을 받고서 아무것도 못 한 채 누워만 지냈다.

생각만 해도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죄 없이 당하기만 한 해주도, 그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도준도 안타깝기만 했다.


-목 졸릴 때 든 생각은 ‘내가 진짜 무능력하구나.’라는 거였어요.

매니저이기에 해주를 듬직하게 지켜내야 했다.

하지만 현성은 도준이 아니었다면 영재에게 굴복당했을지도 모른다.

이 일로 자존감이 처절하게 무너졌다. 다신 회복되지 못할 거처럼 무참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싶어서 괴롭더라고요.

“흐음.”

-그래선 안 됐는데 술 한잔하고 욱하는 마음에 저지르고 말았어요.

“글을 지운 것도 너지?”

-네. 뒤늦게 정신을 차려 보니 난리가 나 있더라고요.

“그래. 아주 난리가 났어.”

-진짜…… 잘못했어요.

그새 샌드위치 포장이 끝나 점원이 도준을 불렀다.

통화 중인 채로 그가 주문한 샌드위치 꾸러미를 받아 나왔다.


“누구나 등신 같은 시절은 있어.”

-대표님도요?

“어릴 땐 내가 해주를 지켜줄 방법이 대신 싸워 주는 것밖에 없다고 믿었으니, 남들 눈엔 얼마나 무식해 보였겠냐.”

-…….

“계속 그랬다면 지금쯤 감옥에 갔거나 더 센 놈한테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지.”

-네.

“뭐든 시간이 걸려. 하루아침에 안 돼.”

현성은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제대로 악에 받친 GN이 펄펄 뛰고 있어 어디든 불똥이 튈 수 있었다.


“해주한텐 내가 잘 말할 테니 넌 몸이나 추슬러.”

-제가 저지른 일은 책임지겠습니다.

“다시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

현성과 통화를 끝낸 도준은 허탈함이 밀려왔다.

내내 고심했던 전략이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아닌 게 돼 버린 꼴이었다.

자칫 유 회장과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집으로 간 도준은 평소와 다를 거 없이 해주와 식사를 했다. 시치미를 떼던 중 해주가 현성을 걱정해 말문을 뗐다.

그 녀석이 사고를 쳤다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해주의 눈망울이 복잡한 감정으로 사무쳤다.

혼란에 빠진 그녀를 도준이 끌어안았다.


“뭐가 됐든 끝까지 가 보자. 너랑 나 같이 가자.”

“도준 씨한테 미안해. 맨날 나 때문에…….”

“그런 소리 마. 네가 있어서 나도 사는 거 알잖아.”

매일 밤, 깊게 파고드는 도준을 받아들이는 게 일상이 됐다.

어느 순간부턴가 그의 손길이 자장가가 되었고 넓은 품은 따뜻한 이불이 돼 주었다.

해주는 자신이 혼자였던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세계관이 바뀌었을 만큼 도준이 없는 세상은 있을 수 없었다.


“도준 씨가 말한 그 끝이라는 거,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이야?”

“이대로 행복하고 싶어.”

‘끝까지 가 보자’라는 그의 말이 해주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이미 도준은 선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내가 뭐길래 당신까지 이토록 아파야 하는지.

어느덧 도준에게 해주는 신앙이 되었다.

도준은 해주, 그 자체가 되어 숨을 쉬고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당신은 왜 날 사랑해?”

해주가 물었다.

그와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고서 따뜻이 두 뺨을 감쌌다.


“옥상 난간에서 널 처음 안았을 때 믿을 수 없게도 태양이 쏟아지는 줄 알았어.”

“정말?”

“그런데 다시 널 만나 보니 아니었어.”

“어땠는데?”

“어떤 날은 별 무리도 됐다가, 물가에 띄운 꽃잎이 되기도 하고, 요즘처럼 밤마다 널 안을 땐…….”

도준이 옅게 숨을 머금었다.

그가 젖어 있는 해주의 눈가를 쓸어 주며 읊조렸다.


“그냥 뜨거워. 널 기다린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정도로.”

“나도 도준 씨를 기다려 줬으면 좋았을걸.”

“안 돼.”

“왜요?”

“넌 힘든 거 하지 마. 그런 건 나만 하면 돼.”

“그런 말이 어딨어요…….”

“지금처럼 내 곁에 있어만 줘.”

도준이 식탁에 올려진 해주의 핸드폰을 제 쪽으로 끌어왔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어젯밤 썼던 노트북도 밀쳐 냈다.


“주말 동안엔 인터넷 금지야.”

“…….”

“TV 대신 미뤄 놨던 영화 보자. 오늘은 집에서 우리 데이트해.”

해주가 푸스스 웃었다.

이런 그녀의 입술을 도준이 지그시 깨물었다.


“오늘은 도준 씨가 좋아하는 영화 봐요.”

두 사람은 군것질거리를 챙겨 거실로 갔다.

영화를 고르고선 소파에 깊이 기댔다.

자연스럽게 해주의 몸이 도준에게 기울었다.

이내 잔잔한 영화 배경에 어울리는 선율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잠시 뒤 영화를 보던 중 해주가 잠이 들었다.

도준이 폭 잠긴 그녀의 머리를 들어 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조심스럽게 팔을 뻗은 그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네, 송 실장.”

-최인호가 있는 곳을 확인했습니다.

최인호는 경찰의 조사에 불응하며 잠적한 상황이었다. 살던 오피스텔은 비어 버린 지 오래였고 경찰은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당최 성과가 없다가 어렵게 찾아냈다.


“그곳 위치가 어딘지 보내요.”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러면 늦어요. 거기서 만납시다.”

-알겠습니다.

도준이 해주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담요를 가져와 덮어 준 후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회사에 잠시 다녀올게.”

“……늦어요?”

잠결에 묻는 그녀에게 도준은 적당히 둘러댔다.


“금방 끝나.”

그가 입은 옷 그대로 차 키를 챙겨 나왔다.

시동을 켜기 전 송 실장이 보내 준 주소를 보고서 눈살을 구겼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모양이군.”

최인호가 있다고 보내 준 곳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한 피시방이었다. 게다가 도준의 집과도 멀지 않았다.

도준은 더 볼 것도 없이 빠르게 달렸다.

구도심의 번화가에 들어서고서 피시방이 있는 낡은 상가 건물을 찾아냈다.

피시방은 건물 3층에 있었다.

대낮임에도 컴컴한 계단을 오르자 마침 손님 한 명이 구부정한 자세로 나왔다.

***

같은 시간, 피시방 안은 아르바이트생이 바닥을 청소 중이었다. 빗자루질하기 바쁘던 그는 나흘째 죽치고 앉은 손님 자리에서 멈췄다.


“쓰레기 치워드릴게요.”

“나 커피 하나만.”

남자 손님은 게임도 하지 않았다.

졸리면 앉은 채로 졸았고 종일 인터넷 기사와 각종 커뮤니티를 떠돌았다.

뭘 하는지 한글창에 글을 적다가 누군가와 심각하게 통화를 했다.

잘 씻지도 않아 가까이 다가가면 홀아비 냄새가 났다.

급기야 이 자리 주변엔 다른 손님이 앉지 않으려 해 골치였다.


“손님, 죄송한데 그만 댁에 가세요.”

피시방 사장은 이 손님 좀 내보내라며 아르바이트생에게 성화였다.

그러잖아도 피시방도 후진데 냄새까지 나면 곤란했다.


“이따가 갈 거니까 놔둬.”

“진짜죠?”

남자가 불쾌해하며 아르바이트생을 노려봤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얼마냐?”

“잠시만요!”

빗자루를 내팽개친 아르바이트생이 데스크로 뛰어갔다.

그간 쌓인 남자의 피시방 이용액은 꽤 됐다.

그 돈을 남자는 카드가 아닌 지갑을 꽉 채운 현금으로 계산했다.


“거스름돈은 너 해라.”

“감사합니다!”

“혹시 너 연예인 누구 좋아하냐?”

“이해주요.”

“걔가 왜 좋은데?”

“연기도 잘하고 착하고 예쁜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이해주가 착해?”

“웬 기레기 새끼 때문에 시달렸잖아요. 저였으면 그 새끼 찢어 죽였어요.”

요즘 것들은 이게 문제였다.

눈치 없이 기레기인 당사자를 앞에 두고 저딴 소리나 하다니.


“야, 거스름돈 내놔!”

“……쳇.”

“쳇은 무슨.”

아르바이트생에게 줬던 거스름돈을 도로 뺏은 사람은 최인호였다.

씻지 못해 너저분한 얼굴을 쓸어내며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그때 향기부터 남다른 누군가가 앞을 막아섰다.

그는 키가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컸다.

설마 하며 얼굴을 든 최인호는 저승사자와 떡하니 마주쳤다.


“바, 박도준 대표?”

“쉿!”

최인호가 도망치려 뒷걸음질했다.

하지만 며칠이나 움직이지 않은 몸뚱어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굽어 있던 허리를 펼 새도 없이 뒷덜미가 잡혔다.

아차 하는 순간 계단을 구르다시피 하며 끌려 내려갔다.


“아악, 이거 놔요!”

“입 열지 마. 냄새나.”

코를 찌르는 악취에 도준이 인상을 썼다.

어떻게든 버티려는 최인호를 끌고 나오자 마침 송 실장이 도착했다.


“대표님!”

“담당 수사관한테 연락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놀라 힐끗거렸다.

그럴수록 최인호는 억울하다는 듯 악을 써 대며 우는소릴 했다.


“아이고, 사람 죽네! 나 좀 살려 주세요, 네?”

“닥쳐.”

송 실장이 막 담당 수사관에게 전화할 때였다. 입고 있던 얇은 바람막이에서 억지로 몸을 뺀 최인호가 냅다 도망쳤다.

도준이 뒤따라갔다.

상가 건물을 지나 이면도로가 있는 골목 앞을 지나칠 때였다.

1톤 트럭이 속도를 내 달려오는데도 최인호는 잡힐까 봐 두려워 내달렸다.


“최인호!”

빠앙!

경적이 울리는 순간 최인호는 아슬아슬하게 트럭을 피했다.

트럭으로 인해 도준의 시야가 잠시 가려졌다.

단 몇 초 사이 최인호가 사라져 버렸다.

주변을 뒤져봐도 보이지 않아 도준은 마지 못해 걸음을 돌렸다.


“놓쳤어요.”

“멀리는 못 갔을 겁니다.”

돌아서는 도준을 누군가 길가에 세운 차에 숨어 지켜보는 중이었다.

도준이 완전히 떠난 후 핸들을 놓은 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굳어 있던 입가를 반짝 펴더니, 한 건물의 개구멍에 숨은 최인호에게 다가갔다.


“최인호 기자가 맞습니까?”

남자는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서 건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에 최인호가 울상이 돼 성질을 냈다.


“박도준 대표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닙니다. 저는 GN의 유 회장님을 모시고 있는 한진태 실장이라고 합니다.”

“하, 한진태 실장?”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한진태가 한발 물러나 섰다.

그제야 최인호도 구겼던 몸을 밖으로 빼 비틀거리며 섰다.

***

주말에 황경옥이 이혼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가 터졌다.

유 회장과 이혼할 경우 천문학적인 재산 분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언론은 GN의 계열사 중에 황경옥의 지분이 높은 건 분리될 가능성이 있다며 보도했다.

이 기사를 접한 유 회장은 거짓 보도라며 이혼설을 일축했다. 하지만 집에선 황경옥에게 이미 이혼을 통보받았다.


“누구 마음대로 이혼이야!”

“난 사라져 줄 테니 당신은 젊은 년들이랑 평생 지저분하게 구르며 살아.”

유 회장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장인 덕분이었다.

아들이 없었던 황경옥의 부친은 사위인 유 회장에게 사업체를 물려 주었다.

하지만 그는 바람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 다툼이 나면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그녀는 그 모든 증거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 온 덕에 소송에서 유리했다.

법률 전문가들은 이번 이혼소송에서 유 회장이 불리할 거라며 입을 모았다. 이건 누가 봐도 늘그막에 버려지는 꼴이었다.

***

한편 도준은 유 회장의 불행을 흐뭇해하며 지켜보았다.

월요일 아침 출근해서는 법무팀부터 모았다.

이 자리엔 곽 감독도 자리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젠 우리 차례에요.”

현재 유 회장에게 연이은 파도가 몰아쳤다. 도준은 이 파도를 해일로 일으켜 모두 엎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현성이 사고를 쳤지만 나쁘지 않았다.

운명이란 건 언제나 우연에서 역사가 시작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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