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공을 바람맞힌 여자2022.01.05.
번화한 상점가의 거리에는 사람도, 말도, 마차도 번잡할 정도로 많았다. 그 중에도 사람들이 테라스까지 꽉 들어찬 명소인, 카페 카르디날의 휘갈겨 쓰인 간판 아래에서 한 여자가 눈을 빛내며 오가는 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우러난 카모마일 차처럼, 진한 꿀색의 결이 좋은 금발의 머리카락에 흰 피부.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에 도톰한 분홍빛 입술을 가진 그녀는 남들의 시선을 끌만한 눈에 띄는 외모였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잘 묶어 보닛 안으로 밀어넣고 오래되고 낡은 코트를 걸쳐입자 그저 신분 사회의 하층민으로 퇴색되어 보였다. 복잡한 인파 속에서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들만 유심히 들여다보는 로나의 눈에는 총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표정과 행동은 몹시 조급했다.
“하아. 진짜 여주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네.”
로나의 진짜 이름은 원윤지. 한때 그녀는 대한민국의 신체 건장하고 따끈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운 좋게 취직도 잘 돼서 쾌재를 부르던 그녀는 대충 읽던 로판소설에 빙의했다. 앞부분은 꼼꼼히 보다가 뒤로 갈수록 대충 본 건, 중간에 취직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뒤로 갈수록 보다 말다 해서 내용이 다 기억이 나진 않았다. 어쨌든 여기가 <눈먼 짐승의 꽃> 책 속 세계라는 건 확실했다. 자신이 일하는 저택의 가주, 대공 일레온 클레벤트가 바로 그 책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로나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원작 엔딩을 보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이곳에 빙의 후 처음 정신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이었다. 클레벤트 대공가에서 일하게 된 건 우연이었지만, 원작 전개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 로나는 쾌재를 불렀다.
“왜 둘이 만나지를 못하는 거야.”
요즘 로나의 가장 큰 고민은 ‘왜 여주가 나타나지 않는가’였다. 드넓은 대공저의 정원 구석에는 잡초처럼 돋아난 풀이 하나 있었다. 영 생뚱맞게 어울리지 않는 그 풀은 대공의 눈을 뜨게 해줄 진귀한 약초였다. 10년에 한 번 단 열흘 동안만 꽃이 핀다던가. 그것을 달여 먹으면 극독에 당해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일레온은 씻은 듯이 나을 것이다. 그런 영약이 집 뒷마당에 피다니, 이건 그저 남주의 눈을 확실하게 뜨게 하려는 작가의 안배이리라. 원작 여주인공 카리나가 나타나 남주인 일레온의 눈을 뜨게 해주고 둘이 사랑에 빠지게 된다. 원작에 ‘등장하지도 않는 사람1’에 빙의한 로나는 알고 있는 원작이 틀어지지 않게 조심했다. 하지만 벌써 꽃이 핀 지 일주일이나 지나도록 여주가 나타나지 않으니 로나는 초조했다. 밤 산책 중에 미미하게 상서로운 빛을 흘리던 꽃을 발견하고 시일이 흐를수록 책 속 세계의 아무도 공감해줄 수 없는 이유로 속이 타서 발을 동동거렸다. 하필 열흘 동안만 꽃이 핀다는 설정이 들어가 있을 게 뭐란 말인가. 기왕이면 계속 피어 있거나 좀 그러면 안 되나? 요즘 로나는 하루하루 애가 탔다. 사실 남주와 여주가 만나지 못하는 이유를 로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딸 것이 아닌가. 눈을 잃은 일레온이 내내 저택에 박혀 살아 외출 한 번을 하지 않았다. 제국 최고의 기사라는 수식어를 가진, 눈이 멀지만 않았다면 용맹한 기사였을 일레온. 로나의 상전인 그는 지독한 집돌이였다. 오늘은 일레온이 황제의 명으로 황궁에 불려간 날이었다. 기억을 잃어 신분 증명이 없는 로나는 황궁에 시종으로 함께 갈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이렇게 여유 시간이 생겨 일레온과 카리나가 만날 무대, 카페 카르디날에 염탐을 올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뜰 것이라는 원작을 알면서도 지금의 일레온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고 일레온이 빨리 눈을 뜨고 여주를 만나 바른 엔딩에 도달하길 기다리는 자신도 안타까웠다. 대체 여주는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애가 탄 로나는 여주가 사는 백작가에 한번 찾아보려고 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찾는 일레온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 후 편지를 한번 보내보았지만, 카리나의 답장은 없었다. [카리나 영애, 초면에 실례합니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카페 카르디날에서 만나길 희망합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다면 사서함으로 회신 부탁드립니다.] 누가 봐도 수상해서였을까. 카리나는 스팸으로 여겼음이 틀림없었다. 로나의 눈이 카페 카르디날의 간판으로 향했다.
‘원래 둘이 카페 카르디날에서 만났을 텐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로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어쨌든 요즘 그녀의 온 신경은 카리나와 일레온의 첫 만남에 쏠려있었다. 꽃이 지기 전에 제발 카리나가 나타나주길. 로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로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주문대로 향하자 풍채 좋게 생긴 중년 사내가 그녀를 반겼다.
“드시고 가십니까?”
“아뇨, 뭐 좀 여쭤보려고요.”
“무슨 일이지?”
손님이 아닌 듯한 대답에 카페 주인은 바로 말을 내렸다.
“저어, 혹시 카페에 최근에 온 손님 중에 이런 분 못 보셨나요? 제 또래의 젊은 아가씨고요, 눈부신 은발에 녹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분이에요.”
“허허.”
카페 주인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것만 가지고 사람을 어떻게 찾아. 아가씨처럼 금발에 보라색 눈인 사람 찾는다고 해보지? 그걸로 누굴 찾겠나.”
“하하. 그, 그렇겠죠?”
로나가 실망할 때였다.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면 저거 아냐?”
그때 테라스에 앉아 있던 건달들이 참견했다. 그들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신전에서 내린 수배령이 붙어 있었다. [엘리시아 유테르, 금발, 보라색 눈동자, 흰 피부, 상당히 예쁜 편. 위 사람을 본 사람은 가까운 신전이나 하듄샤로 연락 바람. 사례금 금화 9990개.] 전단에 붙어 있는 비현실적인 사례금을 보고 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런 전단을 보고 사람을 어떻게 찾아요. 닮은 사람만 수백 명은 될 텐데.”
여기는 중세풍 세계관이라 그런지 수배 전단에 그려진 여자의 얼굴은 우리 세계 트럼프 카드의 퀸 카드에나 볼 수 있는 화풍으로 그려져 있었다.
‘저걸 보고 사람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진심으로?’
전단을 뿌릴 때는 신전에서도 돈을 꽤나 들였을 텐데, 저렇게 성의 없는 초상으로 사람을 찾나 우스워서 로나는 저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로나가 별 소득 없이 저택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어이, 아가씨. 잠깐만.”
“네?”
조금 전 카페에서 로나에게 수배령과 비슷하지 않냐던 건달들이 따라와 그녀를 불러세웠다.
“아무리 봐도 전단에 그려진 여자랑 비슷하단 말이지.”
“제가요?”
말도 안 돼. 어딜 봐서 내가 트럼프 카드냐고! 로나는 항변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남자 셋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로나는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가씨 이름이 뭐야? 어디 살아? 신분 증명은 있나?”
“다, 당신들 뭐예요?”
“시간 있으면 우리랑 같이 잠깐 신전에 좀 가지.”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이래요? 이, 이거 놔요!”
막 억센 사내의 손이 로나의 손목을 잡아끌려 할 때였다. 퍽! 그녀의 손목을 쥐었던 불한당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동시에 로나의 가녀린 몸이 빨려들어가듯 단단한 팔에 감겨 남자의 품에 끌어안겼다.
“숙녀께 무례하지 않나.”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꼭대기에서 들렸다.
“너, 갑자기 뭐야?”
“장님 같은데. 뭔데 우리 일에 끼어들어?”
건달들이 일레온을 만만하게 보고 태세를 바꿔 다시 달려들었다. 퍽, 퍽, 퍽. 깔끔하게 울려 퍼진 타격음은 단 세 번이었다.
“그러는 자네들은 장님만도 못하군.”
그제야 그들은 제 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것 같았다.
“크, 클레벤트 대공?”
로나를 꽉 끌어안은 채 한 손으로 지팡이를 휘두르던 남자가 일갈했다.
“내 사람을 건드렸으니 대가를 치러야겠지.”
서늘하던 목소리가 일순 나직하게 변해 속삭였다.
“이러려고 나를 바람맞혔나. 로나.”
일레온의 말에 로나는 펄쩍 뛰었다.
“일레온 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퍽. 퍽. 일레온은 포기를 모르고 달려드는 건달에게 매를 돌려주며 여상하게 말했다.
“내가 황궁에 다녀오면 오후에는 함께 차를 마시기로 하지 않았나. 그런데 저택에 없더란 말이지. 카페에 갔다길래 마중 나온 참이었다.”
“으윽.”
“아으으.”
순식간에 길에 나동그라진 건달들은 분한 얼굴로 반쯤 기어 일레온의 공격반경 밖으로 사라졌다. 두고 보자는 말도 못 하고 비굴하게 도망가는 남자들을 보며 로나는 겨우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죄송합니다.”
“다친 데는?”
“없어요.”
일레온이 그러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폭력 사태의 충격으로 기가 죽었던 로나는 일레온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게 왜 바람맞힌 거예요?”
“내가 그렇게 느꼈으니까.”
“그리고 함께 차를 마시자고 한 게 아니잖아요. 제가 일레온 님의 차 시중을 드는 거죠.”
누가 보면 친구끼리 애프터눈 티라도 약속한 줄 알겠네.
“차 시중을 들면서 같이 마실 테니 약속한 거나 다름없어.”
“그건 너무 억지세요. 주인님의 명을 어긴 건 잘못한 게 맞지만, 이렇게 일찍 오실 줄 몰랐다고요.”
‘모시는 주인의 명을 따르지 않은 것’과, ‘일레온을 바람맞혔다’는 너무 표현상의 차이가 크지 않나. 가끔 일레온은 이렇게 너무 친근한 용어를 써서 로나를 당황하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공인데. 너무 격의가 없는 거 아니야?’
나중에 일레온에게 슬쩍 바람직한 단어 선정에 대해 잔소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였다.
“전에 가고 싶은 카페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여기 맞아요. 카페 카르디날.”
카리나가 오지 않는다면 일레온이라도 끌어다 앉혀놔야 할 것 같아서 슬쩍 물어본 적이 있었다.
“기왕 온 김에 여기서 차라도 한잔할까?”
일레온의 말에 로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네? 정말요? 좋아요. 너무 좋아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늘이 그녀를 도울 모양이었다. *** 로나와 일레온은 카페 안에 들어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뭘 주문하시겠어요? 일레온 님.”
로나가 목소리를 낮추어 묻자 일레온이 입술을 달싹였다.
“뭘 주문할 수 있지?”
“커피, 차, 주스. 쿠키, 케이크, 초콜릿도 있어요.”
“넌 뭘 좋아하지?”
로나는 메뉴를 골똘히 들여다보다 곧 관두었다. 대공저의 주방장 슈발리에는 대단히 솜씨가 좋았다. 여기서 뭘 시킨들 대공저 디저트보다 맛있을까 싶다. 로나는 대충 아무거나 골랐다.
“커피랑 초콜릿이요.”
“같은 거로 하지.”
로나는 계산대에서 값을 치르고 주문했다. 로나는 부지런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카리나는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이럴 때 나타나야 하는데.’ 전생에 원윤지는 ‘SNS는 인생의 낭비다’에 망설임 없는 한 표를 던지는 쪽이었다. 하지만 여주와 연락이 닿지 않자 로나는 새삼 왜 이 세계에는 SNS가 없는지 원망스러웠다. 그게 있었다면 디엠이라도 걸었을 텐데 말이다.
“와아.”
문득 테이블에 앉은 일레온을 돌아본 로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감탄했다. 황궁에 다녀오는 일로 모처럼 제복을 갖추어 입은 일레온은 그 자체로 눈에 띄었다. 일레온이 저택 밖으로 나간 건 로나가 일한 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늘 아침에 성장한 일레온을 보고 얼마나 깜짝 놀랐던가. 심장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탈출할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런 그가 평민들도 드나드는 카페에 앉아 있다니 마치 닭장 속에 앉은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한 자태였다. 그런 그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니 통탄할 일이었다.
“황궁은 잘 다녀오셨어요?”
“그래.”
일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더니.”
그는 말을 하다 말고 픽 하고 웃었다. 왜 그런 데서 끊고 그러십니까? 궁금하게.
“폐하께서 뭐라 하셨는데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묻자 일레온이 선선히 대답했다.
“내 나이가 과년하니 결혼하라 하시더군.”
원작 여주가 나타나기 전, 로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줄 보증 티켓이 위태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