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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야죠 (2/151)

2.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야죠202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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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425245.jpg“내 나이가 과년하니 결혼하라 하시더군.”

일레온의 말이 로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았다.

16550642524507.jpg‘결혼? 결혼이라고? 말도 안 돼!’

아직 여주가 나타나지도, 일레온이 눈을 뜨지도 못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개뼈다귀 같은 말인가.

16550642524507.jpg“주인님께서 결혼을 하신다고요?”

165506425245.jpg“그래. 황제 폐하께서는 내 나이가 많다 하시더군.”

이 세계의 관습상 그건 사실이었다. 귀족들은 가문의 이득에 따라 어릴 때부터 집안끼리 약혼을 하고 성년이 되면 결혼식을 올리는 게 보통이었다. 일레온은 전 대공이 일찍 사망한 데다, 성년이 되기 전에 이미 전쟁터에 나갔다. 그래서 성년식을 치르며 가주의 인장과 영지를 물려받고 다른 사교활동 없이 국경으로 돌아갔다. 이 년 전, 전쟁터에서 눈이 멀고 그는 치료를 위해 영지 대신 수도의 저택에 머물렀다. 그 사이 시간이 흘러 일레온의 나이 어느덧 스물다섯! 우리 세계에서라면 취준생일 한창나이지만, 여기서는 어엿하게 후계를 낳아 기르는 어버이가 될 수 있는 나이였다. 게다가 일레온은 레브 황녀의 아들로 황제의 하나뿐인 조카였다.

165506425245.jpg“대공가의 후계를 거론하시지 뭔가.”

눈이 멀었어도 가문이 건재하다. 그의 눈은 사고로 인한 실명이니, 후계가 눈이 멀어서 태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레온이 명문가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면 클레벤트 대공가는 대대손손 명망을 이어갈 것이다. 그렇긴 한데 왜 하필 타이밍이 지금인가?

16550642524507.jpg“그럼 누구랑 결혼하시는데요?”

충격받은 것과 달리 로나의 입은 적절한 질문을 내었다.

165506425245.jpg“모르지.”

16550642524507.jpg“모르신다고요?”

일레온은 느긋하게 커피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165506425245.jpg“폐하께서 정해주시는 적당한 가문의 영애와 하지 않겠나.”

16550642524507.jpg“말도 안 돼요!”

로나는 펄쩍 뛰었다.

165506425245.jpg“어째서지?”

삼 일만 기다려주시면 안 되나요? 여주가 와서 눈을 뜨게 해줄 텐데요. 눈도 뜨고, 사랑도 얻고 일석이조, 일타쌍피. 아니,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것까지 생각하면 일타삼피. 간단명료한 정답을 말할 수 없는 로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16550642524507.jpg“인생이 얼마나 긴지 아십니까요? 주인님. 마음이 동해야 할 것 아닙니까! 마음이! 평생 보고 살 분인데 말입니다.”

165506425245.jpg“그러는 넌 인생이 얼마나 긴지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16550642524507.jpg“그, 그거야.”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렇다.

16550642524507.jpg“아무튼 쇤네는 반댑니다요!”

물론 그녀에게 일레온의 결혼을 반대할 권리는 없다. 로나도 그 사실을 무척 잘 알았지만, 꽃이 지기 전에 눈을 뜰 테니 며칠만 버티면 될 거라는 심산이었다.

16550642524507.jpg“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야죠.”

165506425245.jpg“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16550642524507.jpg“물론입죠.”

흥분한 로나는 저도 모르게 격렬한 사극체로 말하고 있었다.

165506425245.jpg“하지만 이런 나를 누가 반려로 맞이해주겠나.”

16550642524507.jpg“예에?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165506425245.jpg“눈이 보이지 않으니. 황제께서 명하시더라도 나를 짐스러워하겠지.”

세상에 이렇게 잘난 짐짝이 어디 있다고. 로나는 어쩐지 낙심한 듯 보이는 일레온이 안타까웠다.

16550642524507.jpg“그렇지 않습니다. 주인님. 꼭 좋은 분을 만나시게 될 겁니다.”

카리나 드레페인이라고. 그런 여인이 있답니다. 독수공방에 대한 걱정은 집어치워요. 로나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일레온의 앞에 남은 삼일 안에 꼭 여주를 데려다 놓겠다고.

165506425245.jpg“그나저나 다들 이쪽을 보는군.”

카페에 앉은 이들이 모두들 일레온을 흘끗거렸다. 눈이 멀었어도 일레온은 제국 최고의 기사, 소드마스터였다. 그래서 늘 사람들의 기척에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165506425245.jpg“내가 눈이 보이지 않아서 그러나.”

어떻게 저렇게 생각할 수가 있을까. 전형적인 남주인 일레온은 자신의 외모가 찬란해서 그렇다는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일레온이 씁쓸한 듯 자조했다.

165506425245.jpg“이런 곳에서 차를 마시려고 한 게 무리인가.”

그가 계속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걸 신경 쓰자 로나는 얼른 대답했다.

16550642524507.jpg“제가 눈에 띄어서 그래요.”

165506425245.jpg“눈에 띈다고?”

16550642524507.jpg“네.”

로나는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그녀도 나름대로 수도에서 첫 외출을 감행한 터라 기운이 빠져있었는데 혈관에 카페인이 투척 되니 살 것 같았다.

165506425245.jpg“그러고보니 넌 어떻게 생겼지? 생김새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군.”

그야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어떻게 생겼다고 해야 사람들이 이쪽을 흘끗거리는 게 내 탓이라고 납득하려나.

16550642524507.jpg“음. 머리는 빨갛고요 눈은 파랗고. 호로록. 피부는 검은 편이에요. 얼굴은 개성 있게 생겼어요.”

대충 외모 설명을 태극기 콘셉트로 퉁 친 로나는 카리나를 놓칠세라 눈알을 굴리기에 바빴다. 그래서 일레온이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165506425245.jpg“정말 희한하게 생겼군. 흔치 않은 색일 텐데.”

16550642524507.jpg“그럼요. 그렇다니까요.”

건성으로 대답할 때였다.

165506425245.jpg“얼굴 만져봐도 되나?”

일레온의 말에 로나는 깜짝 놀랐다.

16550642524507.jpg“저를요?”

165506425245.jpg“그래. 너. 특이하게 생겼다니 궁금하군.”

오랫동안 눈이 보이지 않으면 손끝이 예민해진다. 눈의 역할을 대신해야 하니까.

16550642524507.jpg‘숙련되지 않아서 잘 모를 것 같은데.’

하지만 일레온은 눈이 먼 지 이 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데다, 그 시간을 대부분 인간 생활을 포기하는 데 사용했다.

16550642524507.jpg‘그래도 뭐 닳는 것도 아니고.’

로나에게는 일레온의 호기심을 채워 줄 의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용주였다.

16550642524507.jpg“네, 뭐. 만져보세요.”

로나가 얼굴을 앞으로 내밀자 일레온이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로나는 그 손을 잡아서 제 얼굴을 만질 수 있게 대주었다. 오래 검을 잡아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인 일레온의 손은 크고 조금 차가웠다.

16550642524507.jpg‘체온이 낮은 편인가.’

로나가 눈을 감아 긴 속눈썹이 손끝에 닿자 일레온은 잠깐 멈추더니 다시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만져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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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윽고 그의 손이 로나의 얼굴에서 떨어졌다.

165506425245.jpg“네 말대로 특이하게 생긴 얼굴이군.”

일레온은 그녀의 얼굴 생김새를 확인한 게 기쁜지 환하게 웃었다.

16550642524507.jpg‘윽, 눈부셔.’

눈이 멀었어도 주인공은 주인공이었다. 예기치 못한 후광효과를 자그마한 티테이블을 앞에 두고 정면에서 목격하자 눈앞이 조금 어질했다. 우리 대공님 웃는 거 안 본 눈 삽니다.

165506425245.jpg“디저트는 왜 먹지 않나?”

16550642524507.jpg“일레온 님이 먼저 드셔야죠.”

로나는 일부러 달그락하는 소리를 내며 접시를 일레온의 앞에 놔주었다. 그가 소리가 들린 위치를 비슷하게 손을 뻗어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일레온이 입에 초콜릿 조각을 넣는 걸 보고 나서야 로나는 제 몫의 초콜릿을 입안에 넣을 수 있었다. 달고 쌉싸름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일레온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의자에 기대듯이 편히 앉았다. 그런 사소한 행동만으로도 이 공간이 그에게 장악된 거처럼 느껴졌다. 역시 이 세계의 주인공다웠다.

165506425245.jpg“여기 분위기는 어떻지?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로나는 카페 내부를 새삼스레 둘러보았다.

16550642524507.jpg‘음. 솔직히 말하면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카페 카르디날은 저렴한 가격과 푸짐한 양으로 명성을 쌓은 가게였다. 돈이 별로 없는 청춘들이 차 한 잔을 시키고 한참 수다를 떨 수 있는게 메리트랄까. 귀족들보다는 평민들의 워너비인 가게였다. 오래된 가게의 테이블은 낡았고, 커튼은 레이스가 조금 뜯어진 곳도 있었다. 입구에 매달린 차양은 헤져서 수선하려다 실패했는지 색이 다른 천을 대어 기운 흔적이 보였다.

16550642524507.jpg‘애초에 여기 오려고 한 건 전부 카리나 때문인데.’

원작 여주 카리나는 산골 변두리 영지에서 자란 아가씨였다.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수도의 돈이 많은 친척이 그녀를 양녀로 삼아 이곳에 오게 된다. 뒤늦게 데뷔탕트를 준비하며 숨이 막혔던 카리나는 짧은 일탈을 감행한다. 정처 없이 수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그녀는 달콤한 디저트 냄새에 이끌려 이 카페에 오게 되고, 불량배들과 시비를 다투게 된다. 그때 카리나를 도와준 사람이 눈이 멀고 나서 처음 대공저 밖으로 나왔던 일레온. 눈이 보이지 않는 그는 애초에 눈을 감고도 불량배 몇을 해치우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 압도적인 기사였다. 그렇게 카리나를 구해주게 되고, 그녀는 일레온과 친구가 되어 저택에 방문했다가 그 풀을 보게 된다. 자꾸 풀이라고 해서 신성한 식물에게 미안한데 그 식물 이름은 잊어버렸다. 어쨌든 산골에서 자라 식물에 박학다식한 카리나가 일레온에게 저걸 먹여서 눈을 뜨게 해줘야 하는데.

16550642524507.jpg‘오늘이 지나면 겨우 이틀 남는다고.’

그 생각을 하며 일레온을 보니 그는 로나가 카페 정경을 묘사해주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16550642524507.jpg“우선 테이블은 대공저의 주방에 있는 정원용 테이블이랑 비슷해요.”

동그란 모양은 비슷하겠지만 가격은 100배 정도 차이 나겠지.

16550642524507.jpg“커튼은 하얀색이고 유리창마다 걸려 있어요.”

로나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우리 남주에게는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독자의 마음이랄까.

16550642524507.jpg“차양은 파란색이에요. 그 아래에도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어요. 오늘 하늘이 파랗고 맑아서 차양에 비친 햇빛이 아주 예뻐요.”

원작 전개에서도 일레온이 카페 카르디날에서 차를 마시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입구부터 격이 맞지 않으니까. 이 가게 앞에서 여주를 구하게 됐을 뿐이다. 즉, 여긴 고귀하신 대공 전하께서 앉을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일레온의 품격에 맞게 장소 묘사를 업그레이드하고 로나는 혼자 뿌듯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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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레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마셨다.

165506425245.jpg“얼른 들어. 초콜릿 맛이 좋군.”

그의 말에 로나는 초콜릿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었다.

16550642524507.jpg“오. 말씀대로네요.”

별 기대하지 않았던 초콜릿이 의외로 굉장히 맛있었다. 초콜릿만은 대공저의 주방 슈발리에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듯했다.

165506425245.jpg“네 이름은 무슨 뜻이지?”

16550642524507.jpg“제 이름이요?”

로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책빙의 전에 그녀가 푹 빠져 있던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이었다. 빙의 후, 거지꼴로 떠돌다가 짐승 대공의 거처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분 여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채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꼭 알맞은 조건이었다. 로나를 구해주었던 숲지기 노부부가 약간의 여비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 돈이 떨어지면 굶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로나는 돈을 아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한 끼도 하지 못한 상태로 로나는 물어물어 일자리 소개소를 찾아갔다.

16550642625702.jpg「이름은?」

16550642524507.jpg「원윤…….」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에 풍성한 구레나룻이 턱까지 전부 연결하고 있는, 어딜 보나 서양사람 같은 소개소 직원이 자신을 응시했다.

16550642524507.jpg‘원윤지는 안돼!’

  세계관에 맞는 이름을 써야 한다는 생존본능이 발동했다.

16550642524507.jpg「로, 로나요.」

  그렇게 원윤지는 로나가 되었다.

16550642524507.jpg“모, 모르겠는데요. 하하. 아시잖아요. 제가 예전 기억이 없다는 거.”

지난 몇 달간 일레온이 궁금해하는 것들을 차근차근 묘사해주고, 설명해주던 로나도 그에게 저세상 드라마에 대해 알려주는 건 무리였다.

16550642524507.jpg“제 이름 뜻은 지어주신 분들이 아실 태죠. 저도 궁금하네요.”

대충 얼버무리자 일레온은 더 묻지는 않았다. 커피와 초콜릿의 향기가 알싸하게 둘을 감쌌다. *** 저택으로 돌아오자 집사 베르나르가 난리였다.

16550642645234.jpg“대공 전하.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렇게 나가시면 어떡합니까.”

165506425245.jpg“자네가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지. 마침 황궁에 다녀온 참이라 외출 준비가 따로 필요 없어 잠시 나간 것뿐인데.”

베르나르는 서운하다며 펄쩍 뛰었다.

16550642645234.jpg“너무하십니다. 얼마 만에 황궁에 다녀오시는 길인데 화가들을 불러 그림을 남기지도 못하게 하시고. 잠시 나가다니.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 아닙니까. 처음!”

일레온은 눈을 찌푸렸다.

165506425245.jpg“호들갑 떨지 마. 차를 늦게까지 마셨으니, 저녁 메뉴에 참고하라고 전해.”

16550642645234.jpg“네. 전하.”

베르나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일레온이 벗은 코트를 재빨리 받아들고는 그의 손에 지팡이를 쥐여주었다. 베르나르가 나가자 일레온은 지팡이로 바닥을 훑었다. 탁탁탁. 일레온은 지팡이로 바닥의 울퉁불퉁한 타일을 찾았다. 곧 길게 선형으로 늘어선 타일들이 그의 지팡이 끝에 걸렸다. 천천히 욕실로 이동한 일레온은 손을 더듬어 세면대에 놓인 주전자를 기울여 따뜻한 물을 받았다. 혼자 손과 얼굴, 목덜미까지 꼼꼼하게 씻고 보이지 않는 거울이 보이는 것처럼, 머리카락도 뒤로 넘겨 정돈했다. 다시 지팡이를 짚고 늘 앉는 커다란 일인용 의자로 돌아간 그는 반듯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165506425245.jpg“휴.”

꼿꼿하게 어깨와 허리를 편 채 앉아있던 일레온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165506425245.jpg“역시 나를 남자로 봐주길 바란 건 무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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