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로나를 정부로 들이라니2022.01.22.
“이제 오는군.”
혼자만의 어둠 속에서 일레온은 로나를 반겼다.
“일레온 님.”
당황한 듯 목소리를 낮추어 저를 부른 로나가 황급히 제게 다가왔다. 공작저의 홀도 소등했을 시간이었다. 깜깜한 곳을 급히 걷다 로나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안 될 텐데. 지금은 내내 기다린 제게 한시라도 빨리 와주려는,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조차 반가웠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일찍 온다더니 늦었군.”
“걸어서 오다가 길을 잃는 바람에요.”
로나가 그를 부축해서 일으켜주었다. 밤길을 걸어왔다던 말은 거짓이 아닌 듯 그녀의 손이 조금 차가웠다.
“마차를 타지 그랬어.”
“에이. 돈을 아껴야죠.”
“대공가의 급여로 그 정도도 안 되나? 베르나르에게 월급을 올려주라고 해야겠군.”
그 말에 로나가 희희낙락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주인 나으리.”
가끔 이상한 말투를 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로나가 당황했거나 정말 기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후자라고 여긴 일레온은 미소지었다.
“침대까지 모셔다드릴까요?”
방문 앞에서 로나가 물었다.
“그래.”
로나는 일레온이 반듯하게 잘 눕자 이불을 정돈해주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일레온 님.”
“잠깐.”
일레온은 할 말이 없었다.
“목이 마르군.”
“물을 가져다 드릴게요.”
로나가 금세 물이 든 컵을 가지고 돌아왔다.
“또 시키실 일은 없나요?”
문득 일레온은 충동적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여기서 자고 가.’
미쳤군. 스스로 진절머리를 내며 일레온은 마음을 다잡았다.
“잠이 잘 안 와. 책을 읽어줘.”
“네. 무슨 책이 좋으세요?”
“팔레가라 전쟁사.”
“저 외출복 차림인데, 옷만 좀 갈아입고 와도 될까요?”
“좋을 대로 해.”
일레온은 베개를 베고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곧 뽀송뽀송하게 마른 향긋한 꽃냄새가 나는 로나가 돌아왔다. 새로 세탁한 옷으로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척박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로나는 또박또박 책을 읽어나갔다.
“양쪽에 대치한 군대는 병력이 서로 비슷했다. 팔레르모의 보병은 약 11,000명, 기병은 5,000에 달했다. 포대에 전열한 대포가 600문, 교대로 불을 붙일 포병이 1,300명 대기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 뒤로 방패를 든 돌격대가 3,500명……늘어서고, 아흐흠. 돌격대의 뒤를 따르는 화살부대가 2,000명이었다. 그런데 팔레르모의 활은 활을 한 번에 두 개씩 쏠 수 있어…… 신호 하나에 따르는 화살이 4,000개라…… 4,000……개…….”
가볍게 뭔가가 침대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새근거리는 로나의 숨소리가 들렸다. 팔레가라 전쟁사는 읽다 보면 잠이 오는 책으로 제국 내에 명성이 높았다. 물론 기사단장이던 시절, 그는 대체 이런 흥미진진한 전쟁사를 보고 어떻게 잠이 온단 말인가 하며 공감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 로나를 꿈나라로 인도한 걸 보니 팔레가라 전쟁사의 저자에게 금화라도 지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로나.”
이름을 불러도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렸다. 일레온은 침대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둘레로 손을 더듬으며 움직이자, 곧 로나가 앉은 의자가 잡혔다. 일레온은 로나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공원 나들이에 늦은 시간까지 걸어왔다더니 피곤했는지 로나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일레온은 눈을 감고 제 곁에서 들리는 로나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집사님과 먼저 가세요.」
로나가 집에 먼저 귀가하라는 말을 했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를 일레온은 알 수가 없었다.
「여자들 드레스 맞추는 곳에 남자를 데려가면 다들 사귄다고 오해한다고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숨겼던 속내가 콕콕 찔렸다.
“나랑 그런 곳에 가면 창피한가?”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가 부끄럽냐고. 로나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차마 같이 가고 싶다고 더 우길 수가 없었다. 눈이 보였더라면 자연스럽게 골라주겠다든지, 선물해주겠다든지 핑계를 댈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레온이 따라간들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세상은 넓고 괜찮은 남자는 많을 것이다. 로나는 자신이 ‘특이하게 생겨서’라고 미인이 아니라는 듯 둘러 말했지만 일레온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로나를 대하는 이들이 항상 그녀에게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외모가 훌륭하지 않아도,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 로나가 정말로 못생겼다면 그 이상으로 다른 매력이 호감을 갖게 하는 게 분명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녀를 이토록 깊게 마음에 담은 일레온 자신처럼.
“나는 네가 어떻게 생겼든 상관없어. 로나.”
그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에게 로나는 늘 지금 그대로의 로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네겐 그저 시중을 들어야 하는 눈먼 사내일 뿐인가? 내가 어떻게 해야 널 얻을 수 있을까?”
일레온은 헛헛한 마음을 어째야 할지 몰랐다. 로나에게 직접 말할 수 없는 것을 곤히 잠든 여인에게 속삭이듯 풀어낼 뿐이었다.
커다란 벌이 있었다고 했다.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로나는 잼파이를 가지고 반대편 무리에 사과하러 갔다. 자매 셋이 나들이를 왔다나. 로나가 때려서 날려버린 벌은 그들이 와인을 담아두었던 얼음통에 빠져서 죽음을 맞았다고 했다. 그 벌이 살아 있었다면 가문의 충신으로 임명했을 것을. 일레온은 혼자 애석해했다. 그 벌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로나가 제 품에 안겨드는 일 따윈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하아.”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결국 제 자존심이 문제였다. 로나는 돈을 받고 맡은 대로 일할 뿐이었다. 그런 고용 계약에 의한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제게 마음 한구석 허락해주었으면 바랐다. 하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그녀와 자신의 신분의 차가 있으니까, 로나는 그를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여기는지도 몰랐다. 에스코트하겠다며 손을 잡아도, 은근히 팔짱을 낀 몸을 밀착해도 로나는 충실히 에스코트 연습이라는 맡은 일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반대라기에 조금은 기대했는데.”
그 말에 호응해주길 바라는 사람이 누군 줄도 모르고 제 침대에 누워 편안하게 숨소리를 내는 생명체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로나는 일레온을 살게 하는 동시에 끝없이 괴롭게 만들기도 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레온은 로나를 덮은 이불을 더욱 끌어올렸다.
“들어와.”
방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기척이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집사 베르나르였다. 그는 책을 읽다 말고 일레온의 침대에서 잠든 로나를 보며 혀를 찼다.
“또 이러십니까.”
일레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로나를 그녀의 방으로 돌려보내기 싫어 얄팍한 수를 쓴 지는 좀 되었다. 다른 귀족저라면 주인의 방에 메이드가 밤새 머물렀다고 파다하게 소문날 정도의 일이나 다행히 대공저에 일하는 하녀는 실제적으로 로나 하나여서 다행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레온의 말에 베르나르가 어이없어했다.
“잠이 잘 오지 않으신다면서 밤 12시에도 깨어계시면 뜨거운 차를 가져다 달라고 하셨습니다.”
분명 그렇게 명했다. 일레온은 집사에서 괜한 일을 시킨 두 시간 전의 자신을 책망했다. 그런 일레온을 보며 베르나르가 안타까운 투로 진지하게 말했다.
“차라리 정부로 들이시지 그러십니까.”
“지금 뭐라고 한 건가?”
가장 믿는 집사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신분증명이 없는 하녀입니다. 평민 하녀들과도 계약관계가 다르지요.”
신분증명이 없는 하녀는 쓸모가 달랐다. 노예처럼 돈으로 사고팔고 하는 존재에 가까웠다. 그래서 로나가 아무도 일하려 하지 않는 대공저에 들어오게 되지 않았던가.
“주인님께서 지나치게 점잖으신 겁니다.”
베르나르의 말대로였다. 수도 사교계의 뒷소문을 듣자면 가주나 소가주가 집에 일하는 하녀와 밤을 보내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젊고 근사한 주인의 눈에 들어 호의호식하며 살 기회를 노리는 이들이 암암리에 많았다. 하지만 일레온은 충직한 집사의 말에 격분했다.
“다시는 그런 일. 입에 올리지 마라. 아무리 자네라도 용서치 않을 테니.”
베르나르는 더 말을 얹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하지만 일레온은 조금 전까지 답답하던 가슴 속에 끓는 불덩이라도 넣은 것 같았다.
“로나를…… 정부로 들이라니.”
일레온도 베르나르에게 괜한 화를 내었다는 걸 자각했다. 그동안 아니라고 부정하며 억눌러왔던 로나에 대한 관심, 호감 모든 것이 남녀 사이의 일로 귀결되고 만다. 황제의 말대로 자신은 결혼을 했어도 진작 했어야 할 나이 아닌가. 이 나이대의 귀족들이, 가질 것 모두 가진 이들이 어떻게 방탕하게 살아가는지 일레온도 모르지 않았다. 시력을 잃기 전, 일레온은 7년이나 전쟁터에서 살았다. 그전에는 기숙사제인 사관학교를 다녔기에 레이디들과의 접점이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 행사나 무도회 등에 초대받아 어머니와 동행하면 끝없이 여자들이 다가왔다. 다들 재색을 겸비한 귀족 영애들이었음에도 지금 일레온의 기억에 ‘여자들’이라고 뭉뚱그려 남은 건 아무도 짧은 만남에 그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이 충실하고 바쁜 나날이었다. 황실의 기사단장이 살피고 신경 써야 할 일은 늘 많았다. 게다가 스스로 무력을 갈고 닦으며 채찍질했다. 기사단 전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단련시키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지금은 ‘평범한 사람’처럼 일상을 보내는 것만으로 하루가 빠듯했다. 먹고, 씻고, 입고, 걷는 모든 것에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나마 그 일상이란 것도 로나가 대공저에 온 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수렁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눈을 떠도, 감아도, 해가 떠도, 져도 여전한 어둠이었다. 그 심연 속에서 일레온은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가 알던 세상은 해가 뜨면 밝아지고 해가 지면 어두워지고, 눈을 뜨면 뭔가가 보여야 하고, 감으면 고요해지는 곳이었으니.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어머니 레브 오데르 콘스탄스는 현 황제의 누이였다. 그녀는 수도에서의 생활이 신물이 나서 타국을 전전하며 여행을 떠난 지 오래였다. 저 또한 전쟁터에서 살았으니 어머니의 부재를 느낄 여유는 없었다. 그저 모자 사이에는 가끔 안부를 전하는 편지만이 오갔다. 그가 시력을 잃고 저택에서 두문불출하는 사이, 집사 베르나르가 레브에게 대신 편지를 보내어 상태를 알렸다. 그러나 그에 돌아온 답장 또한 레브의 시녀가 쓴 것으로, 그녀가 토착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어 귀국이 어렵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라도 누군가가 그를 보듬고 키워준다. 일레온은 두려움에 떨며 끝없는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고맙게도 베르나르가 가문을 떠나지 않고 일레온의 곁을 지켜주었지만, 그의 치료부터 가문의 자산까지 모두 신경 써야 했던 집사 역시 한계까지 몰려있었을 것이다. 제 주인의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했지만, 차도가 없는 일레온을 보며 베르나르 역시 좌절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그런 그에게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준 건 로나였다. 일레온은 그 손을 잡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걸음마를 하고, 밥을 먹고, 세수를 하고, 혼자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린 짐승이 어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처럼, 어느 날부턴가 자신이 로나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으흐음.”
로나가 제 쪽으로 돌아누우며 잠투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부로 삼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라면 차라리 쉬울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