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알량한 자존심2022.01.29.
로나는 황급히 옷을 추스르고 일레온을 흘끗 보았다. 가끔 기척에 예민한 그는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생각될 때가 있어서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었다.
‘못 본 거지?’
일레온은 말마따나 고약하게 치대는 그녀로 인해 잠을 못 잤는지 곧 다시 잠들 듯 나른해 보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로나는 살금살금 방으로 돌아왔다.
“아니 진짜 그 책 뭐냐고.”
팔레가라 전쟁사? 대한민국에 출간했더라면 밤마다 양을 세느라 고통받는 많은 이들을 불면증에서 구원할 것 같은 책이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해야지.”
다음? 다음이라니. 그 말이 왜 이리 어색한지 로나는 곱씹었다.
“아, 그렇구나.”
일레온은 오늘, 내일 중으로 조만간 눈을 뜨게 될 터였다. 남의 눈을 빌려 책을 읽어야 할 날이 고작 이틀밖에 남지 않은 셈이었다.
“하흐음. 카리나는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로나는 여분의 베개를 끌어안고 자세를 잡았다. 조금 전까지 따끈한 일레온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던 탓인지 매일 동침하던 베개의 서늘함이 낯설게 느껴졌다.
“카리나도 일레온이랑 한 번만 자보면 알 텐데.”
그가 얼마나 같이 잘만한 바디필로우인지 말이다. 정말 한번 깨지도 않고 뒤척이지도 않고 잠들었다. 옆에 누가 있으면 좀체 잠을 못 자는 로나에게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로나는 크게 하품을 했다.
“조금이라도 더 자자.”
2차로 즐기는 잠자리는 더욱 포근하고 달았다. 그때 일레온은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집사의 발칙한 발언 탓인지 로나와 키스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퍼뜩 꿈에서 깨고 나자 새삼스레 현실의 로나는 더욱 문제였다.
“잠버릇이 정말 고약하네.”
로나의 맨 어깨가 제 품에 닿아 있었다. 원피스 형태의 잠옷이 한참 끌려 올라가도록 자신을 끌어안고 다리를 걸친 채 놔주지 않아서 일레온은 통나무가 된 것처럼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초콜릿 색이라.”
일레온은 수줍게 되뇌었다. 뺨이 붉어졌다는 건 부끄러워했다는 뜻일 거고, 조금은 자신을 의식한 걸까? 아무렇지 않다면 얼굴을 붉힐 일이 없었을 게 아닌가.
“휴.”
일레온은 로나를 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우습게도 제국의 국경을 호령하던 전신(戰神) 같던 사내가 잃어버린 눈을 되찾고 싶은 이유는 고작 그런 것이었다. 마음에 둔 여자가 제게 수줍어하는지. 긴장하는 얼굴은 어떤 표정일지. 그걸 말해달라, 알려달라, 어떠냐 묻지 않고 그냥 제 눈으로 보고 싶다. 현실은 생생하게 느껴졌던 꿈속에서조차 자신은 로나를 볼 수 없었다. 꿈속인데도 그저 눈먼 사내일 뿐이었다니. 일레온은 어쩐지 허탈한 기분이었다. 눈을 잃던 날, 일레온은 말을 타고 드넓은 전선의 선두에서 야만족을 박살 내는 중이었다. 야만족의 왕은 진작 그의 검에 목이 떨어진 후였다. 후퇴하는 잔당들을 쫓아 거칠게 말을 달릴 때였다. 쌔애액. 공기를 가르는 미세한 소리가 일레온은 고삐를 틀어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는 날아오는 화살조차 검기를 휘둘러 막을 수 있는 대단한 기사였다. 그런데……. 파악. 그의 검기에 부딪혀 가루로 산화한 화살이 붉은 먼지를 일으켰다. 허공에서도 위화감이 들 정도로 확연한 붉은 색이었다. 그 순간 일레온은 숨을 멈추었다.
「독이다! 모두 조심해라!」
일사분란하게 주변의 병사들이 피했다. 코와 입을 막은 일레온은 눈이 조금 따끔했다. 뒤늦게 코와 입만 막을 것이 아니라 눈도 가렸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늦은 생각이었다. 먼저 시력을 잃은 건 7년 동안 그의 다리가 되어 대신 달려주었던 애마였다. 히히히힝. 히히히힝. 화살과 검을 맞으면서도 주인의 뜻대로 달리길 멈추지 않았던 군마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날뛰었다. 그의 오른팔이었던 부관 세드릭이 급히 달려와 말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흥분해서 날뛰던 말이 거품을 물며 옆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전하! 대공 전하!」
어둑하게 암운을 띄운 하늘에서 뇌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쿠르릉. 노한 듯 번쩍이는 하늘 아래로 피에 물든 땅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경악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세드릭의 얼굴이 색을 잃고 흑백으로 보이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대공 전하아!」
일레온이 마지막으로 제 눈으로 본 기억이었다.
그렇게 대승을 거둔 7년 전쟁에서 마땅히 개선장군이 되었어야 할 그는 눈을 잃은 퇴역장교가 되어 돌아왔다. 일레온 영지로 돌아가지 않고, 수도 저택으로 온 건 눈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독을 아는 이가 없었다. 조카의 일에 마음이 쓰인 황제가 야만족이 쓰는 비약에 대해서도 샅샅이 조사해 오도록 시켰지만 그의 눈을 치료할 단서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나을 거라 생각했다. 눈과 몸에 좋다는 온갖 것들이 대공저로 실어 날라져 왔다. 그중에 무엇도 그의 붉은 눈동자를 되찾아주지 못했다. 그다음에는 온갖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제국을 떠도는 집시들이나 소수민족의 장로들이 그들이었다. 평소라면 ‘허무맹랑하다’고 단칼에 자를 성품이었으나, 의사도 약을 다루는 이들도 해독하지 못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갖 민간요법에 몸을 내맡겼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마치자 신을 찾았다. 평생 상종해본 적이 없는 사이비에 가까운 종교인들이 찾아와 각자 자신의 신에게 그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빌었다. 해독이 아니라면 해주라도 하고자 하였지만, 어떤 신도 응답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레온이 신앙심이 없고 진심이 아니라서 그렇다며 하나같이 똑같은 핑계를 대었다. 일레온이 눈을 뜨게 될 가능성은 지금으로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가장 충직한 부관 세드릭은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는 괴로움에 일레온의 곁을 떠났다. 이역만리 동방으로 제 눈을 고칠 약을 찾아 떠나는 그를 일레온은 잡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눈을 잃어버린 제 탓이 아닌가. 하지만 제 잘못은 없었다. 무수히 적장을 노리고 검과 화살이 날아드는 전쟁터의 선두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백번 천번 시간을 되돌아 간다고 해도 제가 눈을 감을 방법이 없었다. 끝까지 적의 공격을 주시하는 건, 방어의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훈련해온 몸은 때론 저절로 움직였다. 그 기민한 감각은 수많은 순간 그의 목숨을 살렸지만 눈까지 지켜주지는 못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일레온은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죽을 수가 없었다. 그가 죽을 수 없게 침대에 묶어둔 집사 베르나르가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약을 찾겠다며 멀리 떠도는 세드릭에게 미안해서였다. 자해를 그만두자 베르나르는 일레온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인생의 밑바닥이 사라진 일레온은 인간 이하로 주저앉았다. 수도에는 대공이 눈을 잃고 매일 밤 짐승처럼 울부짖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마땅히 찬양받아야 할 전공을 세우고도 전장에서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미친 거라는 소문이 뒤따랐다. 날개가 꺾인 기사의 추락에는 끝이 없었다.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던 이들은 전쟁이 끝나 평화가 보장되자 기를 쓰고 그를 깎아내렸다. 그런 시간들조차 이제는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로나가 있는 삶은 그가 지나온 수렁 같던 시간을 모두 아물게 해주었다. 로나가 옆에 있어 준다면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애정 없는 부부 관계는 많다. 반면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는 로나를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또 대공비가 되면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터였다.
“지금은 아직 아니야.”
그런 조건을 내걸고 청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대로 자신에게 마음을 조금이라도 내어줄 순 없을까? 그게 로나 앞에서 한 사람의 남자로 보이고 싶은 일레온의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대공가 재산을 누리는 대신 옆에 있어달라는 그런 청혼 따위는 할 수 없었다.
“서둘지 마.”
일레온은 조바심을 내는 스스로를 나무랐다. 그가 눈이 보이지 않을 날은 앞으로도 많았다. *** 점심시간이 될 무렵, 집사 베르나르가 로나를 불렀다.
“대공 전하께서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네.”
“정말요?”
“아침에 문안을 드리러 갔더니, 밤새 한잠도 주무시지 못했다는군.”
“네. 제가 새벽까지 책도 읽어드렸어요.”
그러고는 저만 쿨쿨 숙면을 취했다.
“아침, 점심도 거르셨고 저리 주무시는 걸 보니 오후에나 일어나실까 싶군. 바깥에 볼일이 있다면 잠깐 다녀와도 좋아.”
“정말요?”
로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자네 입을 옷이나 여러 가지 신경을 써주지 못했군.”
섬세한 집사는 어제 로나가 옷을 맞추러 간다고 했던 일에 신경을 쓴 모양이다. 대공저에서 일하게 된 후 로나가 그렇게 잠깐이라도 외출을 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잠깐만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대공께서 저녁 식사를 하시기 전까지는 꼭 돌아오고.”
“네.”
로나는 재빨리 외출 준비를 해서 해링턴 백작가로 향했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카리나를 만나고 말 생각이었다. *** 로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어제 한 번 와본 곳이라고 또 조금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카리나 아가씨를 뵈러 왔는데요.”
그녀를 알아본 경비가 바로 집사를 불러주었다.
“안녕하십니까.”
노집사는 온화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혹시 오늘은 카리나 아가씨께서 댁에 계신가요?”
“그래요. 마침 외출 준비를 하느라 바쁘신 참입니다만.”
로나는 재빨리 말했다.
“그럼 아가씨를 잠깐만이라도 뵐 수 있을까요?”
“아뢰어 보지요.”
노집사가 사라지자 로나는 답답한 마음에 짧게 한숨을 쉬었다.
“외출이라니.”
평생을 시골 마을에서 자란 카리나는 수도에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일레온과 특별한 인연을 만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황태자의 눈에 들어 매일 황궁을 드나들다니. 기함할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이 원작 속의 황태자라면 분명히…….
“황태자가 흑막 아니었나?”
<눈먼 짐승의 꽃>을 앞부분만 꼼꼼히 읽었다. 원작에서 카리나가 일레온의 눈을 치료해주는 건 꽤 앞부분이었다. 그 후에는 뭔가 황태자가 흑막일 수도 있다는 내용이 나왔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회차까지 읽었는지도 제대로 기억을 못 해 퐁당퐁당 읽다가 종내 그만두었기 때문에 뭘 보고 떡밥이라고 생각했었는지조차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필 황태자야. 원작 어떻게 된 거지?”
흑막의 이미지를 간직한 남자를 떠올리자 로나는 얼굴이 찡그려졌다. 원작에서도 뒤에 가면 황태자와 일레온이 연적이 되긴 했던 것 같다. 그건 표지에 남주인 일레온과 서브 남부인 사비엘이 둘 다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확실했다. 표지에 그렇게 그려놓고 사비엘이 빨리 아웃되면 그거야말로 국룰 위반이지. 그렇게까지 삼각관계임을 강조한 표지니 분명히 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원작에서는 사비엘이 카리나에게 일방적으로 호감을 품을 뿐, 여주인공인 그녀가 그에 응해주거나 그렇진 않았었다.
“뒤를 못 봐서 정말 문제네.”
해링턴 백작부인이 기꺼이 샤프롱을 맡아 응원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해링턴 백작가도 꽤나 수도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였다. 집안에 먼 친척 아이를 양녀로 받아들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의 거부였다. 왜냐면 해링턴 백작가는 철을 생산하는 광산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하는 동안 무기상으로 어마어마한 거부를 쌓은 해링턴 백작가가 황실보다 현금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정도였다. 풍요로움은 사람의 마음을 여유롭게 한다. 부의 정점에 선 백작부인이 카리나에게 어느 정도로 호의를 쏟을지 안 봐도 훤했다. 그때 카리나의 의중을 알아보러 갔던 노집사가 돌아왔다.
“따라오십시오.”
로나는 그를 따라 본관으로 향했다. 어제 별채에서 짧은 면담을 했던 것과 달리 ‘카리나 아가씨께 신세 졌던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말이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리라. 똑똑. 어제 보았던 곳과는 비교도 안 되게 고급스럽게 꾸며진 응접실 문에 노크하자 격의 없이 카리나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와요.”
“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노집사가 정색하자 카리나가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왜요. 저도 손과 발이 있는걸요.”
“그리고 제발 사용인들에게 말 좀 편히 하시지요.”
그의 말에 카리나가 민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골에서는 다 이렇게 지냈어요. 어른께는 존댓말을 쓰고, 저보다 어린 사람은 보살펴주고. 제가 이게 편해서 그래요.”
노집사가 못말린다는 듯 한숨을 쉬자, 카리나의 호기심이 어린 초록빛 눈동자가 로나를 향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처음 보는 여주인공을 앞에두고 로나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