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당장 벗어 (10/151)

10. 당장 벗어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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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44156289.jpg‘두 명의 남자라고?’

점쟁이 노파를 만난 날, 주름이 가득한 입술 사이로 그녀가 했던 말이 선명했다.

16550644156293.jpg「곧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야. 강한 운명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지. 아주 운명적이고 열렬한 사랑을 하게 될 거야. 그 남자는 키가 크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군. 눈은…… 콜록콜록.」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비참하고 슬픔에 잠긴 날, 기댈 곳이 없는 그녀에게 허황되게 들린 말이었다. 노파에게 은화를 쥐여주고 집에 돌아와 카리나는 식사도 거른 채 잠이 들었다. 빵을 살 마지막 돈을 노파에게 양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 날, 수도의 해링턴 백작 부부가 보낸 시종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해링턴 백작 부부는 품위 있고 훌륭한 분들이었다. 카리나의 부모에 대해 애도를 표하며, 양녀로 이곳에서 함께 지내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그렇게 카리나는 카리나 드레페인이 아닌, 카리나 드레페인 해링턴이 되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남작가의 성은 미들네임으로만 남게 되었다. 더 이상 굶주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수리할 돈이 없어서 비가 새던 낡은 저택을 금세 잊어버렸다. 그리고 해링턴 백작 부인을 따라 황후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처음으로 입궁한 날. 그녀는 자신의 운명과 마주쳤다.

16550644156298.jpg「이상하군요. 내가 그대의 이름을 모르다니.」

16550644156289.jpg「네?」

16550644156298.jpg「이렇게 아름다운 분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는데 말입니다.」

  시골에서 우락부락한 사내들만 보며 자란 카리나는 그토록 아름답고 우아한 남자는 처음 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사비엘이 마음까지 차지하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 노파가 말해준 미래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16550644156293.jpg「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의 결실이 생길 거야. 사람들의 축복보다 먼저 들어서는 아이이지. 부끄러워할 필요도 떳떳하지 못할 이유도 없어. 그 아이는 사내아이로 태어나 세상을 호령하며 가장 귀한 자리에 오르게 될 거야.」

  운명의 상대와 아이를 갖게 될 거고, 그 아이가 가장 귀한 자리에 오를 거라는 말. 사비엘을 마주치기 전까지 카리나는 노파의 말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각인처럼 마음에 새긴 후로는 옆에서 속삭여주는 것처럼 점장이 노파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 사비엘이 그녀의 귀밑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16550644156298.jpg“카리나. 어제 내가 한 말은 잊었나?”

16550644156289.jpg“무슨 말씀이세요.”

16550644156298.jpg“나는 진심이었는데.”

카리나가 정녕 짐작 가는 바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사비엘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16550644156298.jpg“오늘도 나를 이름이 아니라 전하라 부르면 그때마다 한 번씩 벌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16550644156289.jpg“정말 벌을 주실 생각이셨어요?”

사비엘은 카리나의 입술 사이로 거칠게 파고들었다. 어제 나누었던 첫 키스와는 너무나도 다른 입맞춤이었다.

16550644156289.jpg“흡. 하아.”

그가 턱을 놓아주었을 때 카리나는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랐다.

16550644156298.jpg“이런 벌을 줄 생각이었는데. 어디 계속해보지.”

노파가 했던 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16550644156293.jpg「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망설일 틈이 없이 몰아치는 운명이니. 머리를 굴리면 정해진 미래를 놓치게 될지 몰라. 절대로 저울질을 하면 안 돼. 마음이 끌리는 대로 따라가야 그 운명을 잡을 수가 있어.」

  왕자님이라는 건, 동화책 속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사비엘은 눈앞에 살아 있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황태자를 배신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리나는 하얀 손을 뻗어 사비엘의 뺨을 감쌌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사비엘은 조금 놀란 듯했다.

16550644156289.jpg“사비엘.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16550644156298.jpg“진심인가?”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엘이 욕망이 서린 눈빛으로 그녀를 보자 무언가가 몸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16550644176036.jpg「당신의 운명은 기로에 서 있어요. 당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남자는 두 명이랍니다. 둘 다 고귀한 분이지요. 무언가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느끼면, 꼭 주위를 둘러보세요. 당신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

  오늘 로나는 다른 말을 했다. 그녀의 운명에 큰 영향을 줄 남자는 두 명이라고. 한 명이 사비엘이라면 다른 한 명은 누굴까? 로나가 만나 달라고 했던 이를 꼭 만났어야 했을까? 점장이 노파의 말이 맞는다고 믿었던 것만큼 로나가 해준 이야기도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16550644156289.jpg‘좋은 점괘인지 나쁜 점괘인지 모르겠어.’

사비엘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고귀한 두 남자라니 호기심이 동했을지 몰랐다. 그렇지만 온전히 사비엘을 흠모하는 지금은 아니었다.

16550644156289.jpg‘내가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리 없잖아.’

카리나는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듯한 사비엘을 마주 보며 미소지었다. 사비엘이 그녀의 허리를 지분거렸다.

16550644156298.jpg“오늘. 백작저로 돌려보내지 못할지도 모르겠군.”

그의 말에 카리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이가 먼저라 하지 않았던가. 제 운명이 말이다.

16550644156289.jpg“돌려보내지 마세요.”

16550644156298.jpg“그대는 정말 마음에 드는군.”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카리나는 사비엘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손에 잡은 운명을 절대로 놓치지 않을 셈이었다. *** 로나는 오늘도 터덜터덜 걸었다. 카리나를 만나기만 하면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절대 일레온을 만날 수 없다는 선언을 듣고 오다니.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이렇게 감정을 속이지 못하는 상태로 일레온에게 갈 수는 없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천치가 아니었다. 그러니 로나가 마음이 상한 일에 대해 물을 게 분명했다.

16550644176036.jpg“일레온은 원작 그대로인데 카리나는 왜 사비엘을 먼저 만나게 된 거지?”

어디서 뭐가 잘못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원작에서는 분명히 일레온과 먼저 만나 눈을 고쳐주고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사비엘을 만났을 텐데. 로나는 머리가 아팠다.

16550644176036.jpg“카리나는 그렇다 쳐. 그럼 일레온은 어떡해야 하지?”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오늘이 아흐레째. 일레온의 눈을 고칠 그 풀은 내일이면 시들고 말 것이다.

16550644176036.jpg“난 약초 같은 건 하나도 모르는데.”

그걸 캐서 뭐 어쩌라고? 찬물, 더운물. 소금물, 설탕물. 적당히 맹물 아무 데나면 되는 건지, 차처럼 우리면 되는 건지, 아니면 냄비에 넣고 같이 끓여야 하는 건지. 엄마가 요리 좀 배우라고 할 때 진작 좀 배울걸. 요리 좀 했다고 이 세계 약차 끓이는 데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로나는 매우 심란했다.

16550644176036.jpg“카리나가 없으면 일레온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무려 카리나가 황태자와 혼담을 진행 중이라 하면 말이다.

16550644176036.jpg“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게 되는 걸까?”

작가가 정해놓은 로맨스 판타지의 세계에서, 로맨스 없이 살게 되는 걸까. 일레온이 제게 너무 의지해서 그런지 로나는 마음이 약해졌다. 갑자기 빙의해버린 자신보다도, 카리나 없이, 눈을 뜨지 못하고 살게 될지 모를 일레온이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 툭, 투둑.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16550644176036.jpg“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네.”

다행인 점은 대공가에 거의 다 왔다는 거였다. 입고 있던 코트는 계절에 맞지 않는 두툼한 겨울용이었다. 처음에는 두께가 있는 옷감이 빗물을 튕겨주었는데, 어느 순간 물을 흠뻑 머금은 옷이 빠르게 그녀의 체온을 뺏기 시작했다.

16550644176036.jpg“으, 추워.”

봄비를 한참 맞으니 한기에 등골이 오싹했다. 불이 환히 켜진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로나는 발길을 재촉했다.

16550644176036.jpg‘빨리 가서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근 후에, 뜨끈한 수프를 한 컵 마셔야지.’

추워서 떨리는 어깨를 움츠리며 막 정문을 통과했을 때였다.

16550644176036.jpg“일레온 님?”

정문과 현관 사이의 너른 정원 가운데에 일레온이 서 있었다. 로나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16550644176036.jpg“왜 이런 곳에 계세요? 우산은 왜 안 쓰고 계신 거예요?”

그도 흠뻑 비에 젖은 상태였다. 집사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베르나르가 일레온이 이런 꼴을 하게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는데. 숱한 의문이 떠올랐다. 일레온은 대답 대신 두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제 봉긋한 가슴께를 향해오자 로나는 놀라서 굳은 듯 서 있었다. 다행히 가슴 쪽을 향해 오던 손은 허공을 손끝으로 짚으며 그녀가 입고 있던 코트의 옷깃을 양쪽으로 움켜쥐었다.

16550644176036.jpg‘뭘 하는 거지?’

뜬금없이 일레온에게 멱살이 잡힌 로나는 어쩔 줄 몰랐다.

16550644205185.jpg“이거 겨울 코트야?”

16550644176036.jpg“네? 네.”

일레온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16550644205185.jpg“당장 벗어.”

일레온은 말을 마치자마자 양손에 힘을 주어 코트를 벌렸다. 투둑. 툭. 제국 최고 기사의 괴력에 코트 단추가 순식간에 뜯겨 튕겨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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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나는 기가 막혔다. 그러지 않아도 대공저에 도착하자마자 벗을 예정이었다. 얌전하게 제 손으로 말이다. 그랬다면 코트는 오래오래 수명이 연장 되었을 텐데, 어쩌다 한순간 넝마로 변했단 말인가.

16550644176036.jpg“벗으라면서 옷을 왜 찢으세요?”

옷 살 돈이 아까워서 그동안 최대한 아껴 입고 있었는데. 로나는 황당했다.

16550644176036.jpg“그리고…… 후, 프헤치!”

세게 재채기를 하고 나니 ‘그리고’ 뒤에 하려던 말을 순간적으로 잊었다. 로나가 기침하는 소리를 들은 일레온은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고 대공저 안으로 향했다.

16550644176036.jpg“억, 으억.”

키가 큰 일레온은 다리도 길었다. 성큼성큼 걷는 그의 팔에 통나무같이 뻣뻣하게 안겨있으니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거침없이 2층으로 향하는 일레온을 보며 로나는 깜짝 놀랐다.

16550644176036.jpg“일레온 님. 설마 눈이, 아야. 스읍.”

흔들리는 상태에서 말하려다 혀를 씹은 로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일레온이 그녀를 내려놓은 곳은 대공의 침실에 달린 욕실이었다.

16550644205185.jpg“씻어.”

탁.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달칵. 뭐야? 지금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는데. 로나는 욕실 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덜컥덜컥 소리만 나고 열리지 않는 걸 보니 밖에서 잠근 듯했다. 로나는 기가 막혔다.

16550644176036.jpg“3층에서 씻으면 되는데.”

대공저에는 남아 있는 메이드가 없어서 로나 혼자 쓰는 욕실이었다. 정원사나 주방의 다른 여자 고용인이 있었지만, 모두 결혼을 해서 남편과 별채를 사용하거나 출퇴근을 했다. 졸지에 호화로운 대공의 욕실에 감금당한 로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얼른 나머지 옷을 벗기 시작했다.

16550644176036.jpg“아, 아까 하려던 말이 생각났네.”

뒤늦게 떠오른 ‘그리고’의 뒷말은 ‘그리고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들어가요. 추워 죽겠어요.’였다. 일레온이 거기 서서 실랑이만 하지 않았다면 진작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을 것이다.

16550644176036.jpg“그보다 이 욕조에서 나더러 씻으라니.”

자기도 씻어야 할 텐데 그의 욕조를 양보하고 일레온이 어디로 갔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비에 흠뻑 젖어 있던 일레온을 떠올렸다. 값비싼 맞춤복이 빗물에 젖어 그의 몸에 완전히 달라붙어 있었다. 그가 자신을 안았을 때 옆구리로 빨래판 복근이 느껴질 정도였다.

16550644176036.jpg“에잇. 모르겠다.”

로나는 욕조에 가득 찬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16550644176036.jpg“후아. 기분 좋아.”

대공의 욕조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조카들 대여섯은 같이 들어가서 놀아도 될 것 같은 크기였다. 로나는 장난스레 발로 물을 튀겨보았다. 하지만 곧 이 욕실을 청소해야 할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깨닫고 얌전히 물 아래로 발을 도로 집어넣었다.

16550644176036.jpg“흐흠.”

꾸벅. 기대기 좋게 인체공학적 곡선으로 조각된 욕조에 머리를 대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잠이 몰려왔다. *** 일레온은 스스로 반성하고 있었다.

16550644176036.jpg「벗으라면서 옷을 왜 찢으세요?」

  로나의 말이 타당했다. 그리고 그도 그렇게 옷을 망가뜨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 로나가 입고 있는 옷이 겨울옷이라는 걸, 두툼하고 거친 싸구려 모포 소재로 된 옷감이 비에 젖에 물기를 흠뻑 머금은 걸 알자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16550644205185.jpg‘더 좋은 옷이 얼마든지 있는데.’

이런 걸 입고 다니냔 말이다. 울컥 뭔가가 치밀어올랐다. 그때 손이 절로 움직였다.

16550644205185.jpg“사과하면 되지.”

그리고 사과의 뜻으로 자신이 망가뜨린 옷도 사주면 되니까 일석이조였다.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한 후 일레온은 천천히 씻고 베르나르의 방을 빠져나왔다.

1655064424315.jpg“어째서 여기서 씻으십니까.”

잠시 방을 빼앗겼던 집사가 어처구니없어했지만, 일레온은 발길을 서둘렀다. 사실 집사가 ‘옷을 빌릴만한 여자 고용인이 없다’고 하기 전까지 저택 안의 성비불균형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로나 빼고 죄 늑대 같은 남자들만 바글바글하다 생각하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결과가 로나를 그나마 안전한 제 방 욕실에 가둔 것이다.

16550644205185.jpg“나는 믿어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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