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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구조활동이었다 (11/151)

11. 구조활동이었다202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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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44312449.jpg“나는 믿어도 되니까.”

일레온이 그리 생각하며 밖에서 욕실 문을 걸어 잠근 잠금쇠를 만지작거렸다. 똑똑. 갈아입을 옷을 내주어야 나올 텐데, 욕실 안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16550644312449.jpg“혹시 잠들었나.”

일레온은 어쩐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트레이에 따뜻한 수프와 먹을 것을 챙겨 들어온 집사가 욕실 앞에서 서성대는 그에게 물었다.

16550644312459.jpg“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16550644312449.jpg“로나가 안에서 잠이 든 것 같은데.”

16550644312459.jpg“네?”

베르나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힘 쓰는 남자 하인과 호위 기사를 제외하고 상주 고용인이 달리 없는 지금 3층의 메이드용 욕실을 로나가 독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나는 일레온의 방에서 씻고, 일레온은 자신의 방으로 쳐들어오다니. 이게 무슨 비효율적인 일이란 말인가.

16550644312449.jpg“니엘이나 올리비에가 아직 있나?”

그 말에 집사는 판단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16550644312459.jpg“모두 퇴근했습니다. 내일 아침이 되어야 출근을 할 텐데요.”

집사까지 가세해서 문을 두드리며 로나를 불러보았지만, 어찌나 깊게 잠들었는지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16550644312449.jpg“어째야 하지.”

16550644312459.jpg“하아. 어쩔 수 없지요. 제가 들어가서 어떻게…….”

베르나르의 말에 일레온이 정색했다.

16550644312449.jpg“그건 안 돼.”

16550644312459.jpg“그, 그럼 어찌합니까.”

16550644312449.jpg“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방에서 나가 봐.”

주인의 축객령에 방에서 쫓겨나듯이 나온 베르나르는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방금 주인님이 나를 홀대하는 표정은 뭐였지. 굉장히 귀찮은 걸 쫓아내는 태도가 아닌가. 유능한 그는 좀 억울해졌다.

16550644312459.jpg“아니, 그보다 뭘 어떻게 알아서 하신다는 건지.”

집사는 복도에서 알 수 없는 예감에 혼자 한숨을 쉬었다. *** 꿈을 꾸었다. 꿈인 줄 확실히 알았던 건, 꿈속에서 자신이 로나가 아니라 원윤지였기 때문이다. 땅에 온통 붉은 핏물이 가득했다. 어지러이 날리는 포연과 비처럼 내리는 화살 아래에 일레온이 쓰러져 있었다.

16550644341231.jpg「대공 전하!」

  누군가 그를 붙잡고 원통하게 울며 소리쳤다. 바닥에 널브러져 고통스러운 듯 헐떡이는 커다란 말 옆으로 땅에 쓰러져 있는 일레온이 보였다. 후후. 누군가 기꺼워 웃는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만 같은 인기척에 꿈속인데도 쭈뼛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는 로나 역시 꿈속 세계에서 아무도 그녀가 보이지는 않는 듯 투명한 존재였다. 후후, 계획대로 잘 되었군. 하지만 알 수 없는 존재가 고통스러워하는 일레온을 보며 흡족한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묘하게 등골이 서늘했다. 장면이 바뀌었다. 로나도 잘 아는 대공성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일레온은 눈 주변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제 눈 주변을 스스로 할퀴었다. 상처받은 짐승이 어쩔 줄 몰라 몸부림을 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로나는 슬퍼졌다.

16550644312449.jpg「차라리 죽고 싶어.」

  프라이드가 드높았던 남자는 임무를 마지막까지 수행하지 못해 불명예 제대한 것을 견디지 못했다. 마지막 전투까지 전승을 거두었는데도 자신이 눈을 잃고 귀환한 것 자체가 실패라고 여긴 것이다. 후후. 이대로라면 원작대로 흘러가겠지. 또 어딘가에서 불순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 로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일레온의 불행을 예정한 대로라며 기뻐하는 듯한 그런 웃음소리였다. 로나는 그에 격렬한 반감이 들었다. 로나는 흐느끼는 일레온에게 다가갔다. 그는 역시 로나를 보지 못하는 듯했다.

1655064434124.jpg‘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 테니까, 응?’

만져지지 않는 그의 어깨 즈음에 손을 얹고, 그에게 들릴 리 없는 위로를 건네었다. 그때 울부짖던 일레온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16550644312449.jpg「누구야? 거기 누가 있어?」

  일레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16550644312449.jpg「제발. 나를 혼자 두지 말아.」

  로나는 닿지 않는 그를 안아주었다. 제 품에 채 안기지도 않는 커다란 남자를 안고 다독여주었다. *** 이런 꿈을 왜 꾸었는지 몰랐다. 꿈에서 깬 로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꿈의 잔상이 너무 세서 그런지 눈앞이 흐리고 정신이 혼몽했다.

1655064434124.jpg‘카리나 때문에 일레온에게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가.’

<눈먼 짐승의 꽃>에 전쟁터에서 일레온이 눈을 다친 건, 장면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가 어떤 경위로 눈을 잃게 되었는지 카리나에게 이야기할 때 사연으로만 나왔다. 그렇지만 눈으로 본 것과 상상한 것은 달라서 한낱 꿈일 뿐인 장면도 직접 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라 가슴이 답답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 그렇지만 일레온을 돌보면서 저도 모르게 정이 생기고 애착이 쌓였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그런 법이었다. 돈을 받고 일하는 고용인이라도, 그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1655064434124.jpg‘일레온. 내가 눈을 뜨게 해줄게.’

로나는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심코 일레온의 넓은 어깨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1655064434124.jpg‘응?’

단단하고 광활한 어깨가 몸을 타고 느껴졌다. 눈을 뜨자 또 일레온의 얼굴이 지척이었다. 전날 자신이 일레온을 끌어안고 잤다면 오늘은 반대였다. 제가 그를 제 쪽으로 안아 당기고 있었다. 자신의 맨 어깨에 닿은 일레온의 머리카락이 삐죽하게 뻗쳐 있었다.

1655064434124.jpg“이것도 꿈인가?”

로나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어제 일레온에게 감금당한 채로 목욕을 하다가 욕조에서 잠이 든 것까지 기억이 났다.

1655064434124.jpg‘맞아. 분명 씻다가 잠이 들었는데.’

왜 눈을 뜬 곳이 대공의 침실인 거죠? 로나는 슬쩍 제 몸에 둘둘 말린 하얀 시트를 들춰보았다.

1655064434124.jpg“……!”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로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삼켰다. 시트를 꽉 움켜쥔 채 조심스레 일레온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온몸을 시트로 감싼 채 살금살금 방으로 향하자니 제 꼴이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1655064434124.jpg“이거 막 그 느낌인데. 대공가의 하녀 어쩌고.”

분명 일레온과는 아무일도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목격당하면 꿀보직에서 해고당할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수치는 덤이다. 제 방에 도착하자 로나는 허겁지겁 옷을 꺼내어 입었다. 두루 갖춰 입고 나서야 겨우 안심이 됐다. 그렇게 로나가 한숨을 돌릴 때, 일레온은 침실에서 바닥이 꺼질세라 한숨을 쉬고 있었다.

16550644312449.jpg“진짜 미치겠군.”

집사를 쫓아낸 후, 일레온은 제 몸에 커다란 시트를 망토 두르듯이 걸쳤다. 오랜 기사단 생활에 구조활동은 필수였다. 그는 이런저런 요령이 많은 편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저로 인해 로나가 불명예를 안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욕조에 누워 있는 로나의 팔을 들어 제 어깨에 걸친 후, 조심스레 시트로 몸을 감싸며 안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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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름의 ‘구조활동’이다. 내 진심을 의심하지 마라. 일레온은 속으로 끝없이 되뇌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다음은 생각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맨 몸인 여인의 물기를 닦아줄 수도 없고, 같은 이유로 옷을 입혀줄 수도 없고. 방 한가운데 한참 동안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을 떨어뜨리는 로나를 안고 있다가 일레온은 비척대며 제 침대로 향했다. 감기에 걸리지 않게 수건을 가져다 로나의 머리에서 물기를 말려주고 이불을 꼭꼭 덮어주었다. 그다음에는 밤새 침대를 뺏긴 채 잘도 자는 로나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16550644312449.jpg“구조활동이었다. 뜨거운 물에 너무 오래 들어가 있으면 좋지 않으니까. 감기에 걸릴 수도 있고. 또…….”

일레온은 붉어진 얼굴로 계속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이게 다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은 로나 탓이었다. 뭔가 쌓여 가는 그의 불만은 로나가 아침 식사를 가져왔을 때 정점을 찍었다. ***

1655064434124.jpg“아침 드실 시간이에요.”

로나는 일레온의 앞에 가지런히 접시를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그는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조각상처럼 매끈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 다크서클이 잡힌 상태였다.

1655064434124.jpg‘역시 다크의 완성은 얼굴이라니까.’

잘생겨서 그런지 다크서클을 약간 장착해주니 뭔가 큰 고민이나 수심이 있어 보였다.

16550644312449.jpg“로나. 뭐 좀 물어봐도 돼?”

1655064434124.jpg“네. 얼마든지요.”

보통 때의 아침과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아니, 달라서는 안 되는 날이었다. 로나는 평소처럼 일레온을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욕실에서 잠든 후, 침대까지 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딱히 일레온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절대 먼저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1655064434124.jpg‘아이고, 대공 전하. 이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사과를 백여 차례 시뮬레이션 해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16550644312449.jpg“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런데 일레온이 뜬금없이 어제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저런 질문을 하자 잠시 그녀는 멈칫했다.

1655064434124.jpg“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16550644312449.jpg“……음.”

‘솔직하게’ 말해도 되냐 물으니 일레온은 조금 동요한 듯 보였다.

16550644312449.jpg“그, 그래.”

1655064434124.jpg“휴.”

로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1655064434124.jpg“일레온 님은요 정말 훌륭한 고용주이십니다요.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 아니겠습니까? 정말 제가 대공저에서 일하게 된 걸 얼마나 영광으로 생각하는지 주인님께서는 짐작도 못 하실 겁니다요.”

클레벤트 대공저는 단순 연봉으로만 계산해도 별점 다섯 개에게 만점을 줄 수밖에 없는 꿀직장이었다. 열정페이? 우리 고용주느님은 그런 거 모르십니다. 뭔가를 지급한다 하면 무조건 금화로.

16550644312449.jpg“그런 걸 물은 게 아니다.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로나는 일레온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갑이 을보고 솔직히 말하라고 하면 하겠니? 일레온은 군대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잘 모를 때가 있었다.

1655064434124.jpg“일레온 님은 멋지고 훌륭한 분이세요.”

로나는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했다.

1655064434124.jpg“일레온 님처럼 남들보다 뛰어났던 분은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요.”

그런 꿈을 꿔서 그럴까. 괜히 일레온에게 지금이라도 한 번 말해주고 싶었다.

1655064434124.jpg“매일 일상을 충실하게 보내고 계시잖아요. 그런 게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존경스럽고요.”

로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일레온은 조용해졌다.

1655064434124.jpg“그럼 이제 아침 드세요.”

그녀는 일레온의 손에 수저를 쥐여주었다.

1655064434124.jpg‘일레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왕 커서 왕 귀여운 왕댕댕이 같아.’

하지만 차마 주인을 개 취급할 수 없어 속으로만 생각했다. *** 식사를 하는 내내 일레온은 기분이 삼삼했다.

16550644312449.jpg「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렇게 물을 때만 해도 굉장히 심란한 상태였다. 자신은 나날이 로나를 의식했지만, 그녀는 제게 사적인 감정이 없는 상태였다. 집사 베르나르가 근무태도 점수를 후하게 줄 법한 바람직한 메이드였다. 오히려 주인을 대할 때 지나치게 친밀하게 굴거나 아직 젊고 미혼인 일레온에게 사심을 가지면 그게 더 문제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의 고용관계에서의 일일 뿐. 일레온이 로나에게 관심이 많으면, 그녀의 깔끔한 일처리와 업무태도는 고용주를 서운하게 할 수 있었다.

1655064434124.jpg「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존경스럽고요.」

  앞뒤 다 자르고 일레온은 듣고 싶은 말만 간직했다.

16550644312449.jpg“그러니까 어쨌든 좋게 생각한다는 거 아닌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16550644312449.jpg“나쁘지 않아. 썩 괜찮군.”

학교를 수석 졸업할 때도 그러려니 했어서 그런지 기쁘다든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제 감정이 말랑말랑해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져서 신기했다.

16550644312449.jpg“굳이 그때와 비교할 것 없잖아.”

기사로서의 삶. 많은 절제가 요구되고 우러러볼 수 있는 모범이 되어야 하는 자리였다. 그러다보니 일레온은 사소한 일에 감정이 동하지 않는 편이었다. 지금 이렇게 지내보니 조금 비인간적이고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그는 오늘 로나를 의상실에 데려가고자 작정한 상태였으므로 식기를 치우는 그녀에게 오늘의 일정을 통보했다.

1655064434124.jpg“네? 제 옷이요?”

16550644312449.jpg“어제는 미안하게 됐어. 나답지 않게 흥분했군.”

1655064434124.jpg“아아. 그냥 돈으로 주시면 제가 혼자 가서 살 수 있는데요.”

16550644312449.jpg“그건 보람이 없어서 싫어.”

사주는 기분이 안 나니까.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16550644312449.jpg“그리고 돈으로 주면 옷을 사지 않을 생각인 거 아닌가.”

1655064434124.jpg“아하하하.”

로나가 멋쩍게 웃었다.

1655064434124.jpg“의상실에 안 간 거 들켰나봐요.”

16550644312449.jpg“집사가 그러더군. 그 날씨에 겨울 외출복을 입고 공원에 갔었다고.”

1655064434124.jpg“밖으로 나갈 일이 없는 걸요. 그리고 대공저의 메이드 옷은 질도 좋고 예쁘다고요.”

16550644312449.jpg“이것저것 넉넉히 사면 대금을 지불해줄까해서 갔던 거야.”

일레온은 담담하게 말했다.

16550644312449.jpg“어디에 갔었는지 물어봐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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