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놔 줄 자신도 없으면서2022.02.12.
“어디에 갔었는지 물어봐도 되나?”
“음. 그게요…….”
로나가 뭔가 말할지 말지 망설이는 게 느껴졌다.
“일레온 님의 눈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서 알아보느라 그랬어요.”
“하하.”
로나의 말을 듣자마자 일레온은 실소를 했다.
“아, 미안. 내 눈을 치료할 방법은 없다는군. 황제 폐하께서도 고장 난 조카를 건사해보시겠다고 힘을 기울이셨지만 여태 이 모양이지.”
로나의 한숨 소리가 무겁게 들렸다.
“그렇게 생각하실까봐 말 안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방법은 찾았나?”
“음. 반만요.”
로나가 ‘반’은 찾았다는 치료법이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일레온은 포기의 쓴맛에 영혼이 절여진 상태였다.
“무슨 치료법이지?”
“약차예요. 귀한 약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약차라.”
사람이 마실 수 없을 것 같은 온갖 것을 맛보아야 했다.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일레온은 속이 메스꺼워졌다. 본래 일레온은 남이 건네는 것을 함부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시도가 끝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레온 클레벤트가 쓰러지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소문이 야만족들 사이에 돌았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눈을 뜨기 위해 남이 주는 걸 분한 없이 마셔야 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일레온에게는 훨씬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리 마신 보람도 없이, 그의 눈에는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그 시기를 떠올리자 일레온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기억을 되짚는 것만으로도 당시에 좌절했던 마음이 생생하게 생각났다.
“집사에게 물어봐. 치료에 사용했던 약재들을 정리해둔 자료가 있을 거야. 시도해보지 않았던 거라면 마셔보지.”
로나가 주는 거라면 아무리 먹기 싫은 거라도 거절할 수 있을까. 로나가 비를 맞고 다니며 제 치료법을 찾느라 고생했다는 걸 알게 되니 일레온은 눈을 되찾고 싶은 욕구가 더욱 커졌다.
“너무 큰 기대를 하지는 말고. 로나 네가 가져온 거라면 뭐든 열심히 마셔볼 테니.”
“일레온 님.”
로나가 제 손등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팔 위를 살살 타고 올라 어깨에 닿은 손이 가볍게 그를 제 쪽으로 당겨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순간 일레온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놀랐다. 분명 그가 놀라지 않도록, 신호를 주면서 다가왔다. 그런데도 심장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쿵쿵 거세게 날뛰었다. 인사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가벼운 포옹이었다. 이렇게 살짝 끌어안는 행위가 위로를 격려를 전하는 인도적인 몸짓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하지만 그 가벼운 접촉에도 일레온은 온 몸의 신경이 아우성치는 기분이었다.
“꼭 눈을 뜨시게 될 거예요. 제가 그렇게 해드릴 거예요.”
로나가 다짐하듯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찔하게 귓가에서 들렸다. 일레온은 순간 로나를 마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안 돼.’
아직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눈치 없고 사심 없고 관심 없는 상대에게 제 속을 투명하게 내보이는 건 그나마 혼자 품고 있던 마음조차 접어야 하는 계기가 될지 몰랐다.
‘놔 줄 자신도 없으면서.’
한 번이라도 로나와 마주 안고 나면 그다음에는? 필시 더 많은 걸 바라게 되겠지. 일레온은 절로 그녀를 향해 움직이는 손을 다시 아래로 내리느라 온 힘을 쏟아야 했다. 일레온이 고개를 돌리자 로나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의상실로 가지.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그러자 로나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다른 곳보다 좋은 조건에 월급도 많이 받고 있는 걸요. 그걸로 충분해요.”
완곡한 거절에 일레온은 혼자 실망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했던 말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제게 호감이 있는지 아닌지, 마음을 얻을 가능성이 있을지 고심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조건과 월급. 로나는 원해서 제 곁에 있어주는 게 아니다. 새삼 돈으로 그녀를 고용한 관계일 뿐이라는 걸 깨닫고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네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해주고 싶은걸.’
어제 비에 푹 젖어 무겁게 자그마한 여자의 몸에 걸쳐있던 거칠거칠한 싸구려 코트의 촉감이 떠올랐다. 그러자 로나의 작은 거절에 흔들리던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공가의 체면에 관련된 일이다. 네가 그런 차림새로 다니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나?”
“저한테 관심이 없겠죠.”
“일하는 이가 초라하게 다니다니 대공가 급료가 변변치 않은 게 아니냐고 손가락질할 것 아닌가.”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죄송합니다. 일레온 님.”
로나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지는 걸 듣자 일레온은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잠깐만 참으면 로나에게 새 옷을 잔뜩 입혀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기 직전이었다.
“어서 가서 준비하도록 해.”
“네. 일레온 님.”
탁. 문이 닫히자 일레온은 한껏 달아오른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누군가를 마음에 둔다는 건, 일상이 파괴되는 일이었다. 으레 있을 만한 행동,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만다. 어린아이 대하듯 토닥여주고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나간 로나는 별 뜻이 없겠지만.
“속도 없이 좋아서.”
일레온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방금 일을 곱씹었다. *** 루톤 가에 위치한 의상실 ‘르발레인’. 콘스탄스 제국의 수도, 콘스탄스 에비뇽에서 요즘 가장 인기 있는 가게였다. 굳이 그곳을 다시 찾은 건 첫째, 어제 가게 주인이 마차에 앉은 일레온에게 직접 인사를 하러 왔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집사가 ‘공원에 앉은 아가씨들이 르발레인 옷만 입었더라’라고 말한 걸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대공 전하.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주인이 소문이 무성한 비운의 눈먼 대공을 보고도 그저 보통의 손님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서는 어디 가서 제국의 눈먼 짐승이 옷을 사러 왔다고 가십을 떠들 것 같지 않았다.
“그래. 이 아가씨의 옷을 몇 벌 맞췄으면 좋겠군.”
“몇 벌이라뇨. 저는 옷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 벌이면 됩니다. 어제 찢어버리신 그 코트를…….”
“장난하나?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별로 한 벌도 아니고.”
“여기는 엄청 비싼 곳인데 어찌 제 옷 따위를 이런 곳에서 삽니까? 저는 지금 입는 옷들로도 충분한데요.”
“대공가에서 제공한 옷은 일을 그만둘 시에는 반납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마.”
마땅히 입을만한 옷이 없어 메이드 옷차림으로 의상실에 오게 된 로나가 찔끔하는 게 느껴져서 일레온은 속으로 혼자 웃었다.
“그럼 아가씨. 이쪽으로 따라오실까요?”
과연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게라더니, 주인의 사업 수완이 대단했다. 르발레인의 주인 에밀리는 일레온과 베르나르, 로나를 별실로 안내했다.
“우와.”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로나가 감탄했다.
“뭘 보고 그런 소리가 나온 거지?”
일레온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눈이 잘못되기 전 젊은 아가씨들이 지나가는 그를 보고 쓰러지는 일이 빈번했었다. 비록 눈을 잃었지만 외모를 다 잃은 건 아닐 텐데, 로나가 그를 보고 저런 소리를 내는 일은 없었다. 뭘 보고 저렇게 절로 감탄한 건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음 일단 커다란 원형의 방이고요, 천장 위에 둥글게 구멍이 뚫려 있어요.”
“저도 이런 건 처음 보는군요. 저 위에 새 옷을 입고 서면 천사처럼 보일 것 같습니다.”
베르나르가 한 수 거들었다.
“그리고 벽의 둘레를 따라서 예쁜 옷감들이 길게 장식되어 있어요. 색색으로요.”
일레온은 로나가 설명하는 대로 그 광경을 속으로 그려보았다. 빨간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한 까무잡잡한 여자아이가 눈을 빛내며 구경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상상되었다.
“대공 전하. 여기 몇 가지 옷감을 가지고 왔답니다.”
에밀리는 과연 뭣이 중한지 아는 이였다. 일레온의 심중이 매출에 영향을 가장 많이 줄 거라는 사실을 간파한 그녀는 커다란 소파에 그를 앉혔다. 그리고 그의 무릎에 여러 가지 옷감을 잘라 묶은 묵직한 옷감 표본을 얹어주었다. 일레온은 그것을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보았다. 하늘거리고, 얇고, 보드라운 천은 여름에 입으면 시원할 것 같았다. 좀 더 두껍고 톡톡한 천은 가을 외출복을 만들기에 그만이었다. 하나하나 넘기면서 뭘 만져봐도 어제 로나가 입고 있던 옷 보다는 월등히 좋은 천들이었다.
“겨울에 입을 코트를 주문해야 할 것 같은데. 겨울용 옷감은 없나.”
“지금 계절이 봄이라 창고에 들어가 있답니다. 대신 완성 된 옷이 몇 벌 있는데 확인해보시지요.”
에밀리가 부지런히 양팔 가득 코트를 잔뜩 안고 돌아왔다. 일레온은 그것을 또 하나하나 세심하게 만져보았다. 코트의 깃이라던지, 소매에 달린 드레이프 레이스라던지, 허리에 맵시 있게 더블 버튼으로 달린 단추 같은 것들을 말이다.
“좋군. 사이즈를 로나에게 맞출 수 있겠나.”
“네. 전부 가봉 된 것들이라 구입하신다면 로나 양 치수대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코트 전부 다 사지.”
에밀리의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그 사이에 옆방에서 드레스를 갈아입은 로나가 어색해하며 별실로 돌아왔다.
“여기 올라가보세요. 아가씨.”
“이렇게요?”
둥근 천창에서 떨어지는 햇빛을 받자 드레스의 레이스가 반짝거렸다. 거울을 보며 로나가 감탄했다.
“이 방의 비밀을 알았어요. 이 자리에서 뭘 입어보든 전부 사게 될 것만 같아요.”
순진하게 눈을 반짝이는 로나를 보며 에밀리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뭘 걱정하세요. 대공 전하께서 벌써 스무 벌도 넘게 사셨답니다.”
“네? 뭐라고요? 저기요. 주인님. 쇤네는 이렇게 많은 옷이 필요하지 않습니다요.”
절박하게 외치는 로나의 목소리를 모른 척하며 일레온은 봄옷과 가을옷을 고르기 위해 손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여름옷까지 골라야 하니 무척 바빴다.
“데려가서 봄옷부터 다시 입혀주게.”
에밀리는 물주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그때였다.
“이게 누구야. 장님을 이런 데서 다 볼 때가 있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일레온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제국 황위계승서열 2위인 일레온 클레벤트에게 이렇게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이는 제국에 딱 한 명뿐이었다.
“사비엘.”
그런 사비엘에게 일레온도 굳이 ‘황태자 전하’라며 예우하지 않았다.
“이런 곳에는 어쩐 일이지. 저택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네 소양이 워낙 짧으니 모르는 일이 많겠지.”
“뭐가 어째?”
사비엘은 발끈했다. 옆의 탈의실에서 드레스를 벗고 속옷 차림으로 서 있던 로나는 낯선 남자가 패악을 부리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두 팔을 교차해서 몸을 가렸다. 겁을 먹은 로나를 보고 에밀리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커튼을 열고 별실로 나갔다.
“황태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다른 손님을 모시고 있다길래 어디 갔나 했더니.”
“먼저 오신 손님이 계셔서 상담 중이었습니다.”
“눈먼 짐승이 옷을 골라? 하하. 정말 요즘 들은 농담 중에 가장 재미있군.”
사비엘이 미동 없이 앉은 일레온을 향해 다가갔다.
“괜히 여기저기 나다니다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해.”
“네 방만한 언행이 치는 사고에나 신경 쓰지 그래.”
그때 사비엘의 호위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감히 황태자 전하께 무슨 무례냐.”
일레온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흐린 회색 눈동자지만, 그 눈에 서린 살기만은 선명해서 기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나저나 누굴 데려온 거지? 숨겨놓은 여자라도 있는 건가?”
사비엘의 눈이 탈의실에 쳐진 커튼을 훑었다.
“눈도 못 뜨는 대공 대신 내가 한번 봐 주지. 혹시 아나? 대공가의 재산을 노리는 사특한 계집이 꼬리를 치고 있을지.”
사비엘이 탈의실 커튼에 막 손을 대었을 때였다. 탁. 일레온이 정확하게 그의 손을 잡아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