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미끄러져서 그런 거야2022.02.16.
“눈도 못 뜨는 대공 대신 내가 한번 봐 주지. 혹시 아나? 대공가의 재산을 노리는 사특한 계집이 꼬리를 치고 있을지.”
사비엘이 탈의실 커튼을 열어젖히려 할 때였다. 탁. 일레온이 정확하게 그의 손을 잡아채었다. 그 서슬에 사비엘의 눈이 조금 커졌다.
“너 설마…….”
“아니. 보이지 않아.”
일레온이 사비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하지만 굼뜬 네 움직임은 눈을 감아도 선하군.”
“뭐가 어째?”
사비엘은 시근거렸다. 하지만 복도 쪽에 벌써 꽤 많은 이들이 보여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안쪽을 엿보느라 난리였다.
“오, 오늘은 바빠서 이만 돌아가지.”
사비엘은 에밀리에게 말했다.
“안목을 갖추지도 못한 자가 옷을 사겠다고 용을 쓰는군. 자네가 많이 도와주도록.”
안목. 말 그대로 보는 눈이란 뜻이다. 일레온을 모욕하는 말에 에밀리는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옷을 사시는 데에는 안목이 없어도 재력이 충만하시니 문제없으시답니다.”
일레온이 돈지랄을 하는데 네가 무슨 소용이냐는 돌려 까는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하, 하하하. 그래. 그래. 벌 수 있을 때 많이 벌어야지.”
하지만 홀로 그 말을 일레온에게 바가지를 씌우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사비엘이 호탕하게 웃었다.
“다음에 다시 들르지.”
“살펴 가세요. 황태자 전하.”
에밀리가 공손하게 인사하자 사비엘은 일레온을 한 번 더 노려보고는 별실을 빠져나갔다.
“재주가 특출나도 일하기가 힘들겠군.”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방금의 소동이 없었던 것처럼 에밀리는 재빨리 여름용 레이스 원단을 잔뜩 가져다가 일레온에게 안겨주었다.
“이 레이스는 상단에서 배로 실어온 물건들이랍니다.”
폭이 넓은 얇은 레이스에는 오돌토돌한 질감으로 여러 가지 무늬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이건 무슨 무늬지?”
“흰 레이스에 보라색 포도알과 덩굴이랍니다.”
“보라색이라.”
빨간 머리카락에 파란 눈동자라면, 이 레이스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로나에게 잘 어울리겠군.”
“그렇네요. 로나 양에게 딱이네요.”
에밀리의 말에 일레온은 미소지었다.
“이걸로도 여름 드레스를 한 벌 짓도록.”
어마어마한 금액을 지불어음이 아닌 금화로 현금결제를 하자 에밀리가 크게 기뻐했다. 일찍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은 후, 내내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은 탓에 그리 알려진 바 없던 대공가의 재력에 대해 일파만파 소문이 퍼진 건 얼마 후였다. *** 저택으로 돌아오는 동안, 마차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일레온도, 집사 베르나르도, 로나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일레온을 제외한 베르나르와 로나는 분한 마음에 입 모양으로 사비엘을 함께 욕하고 있었다,
‘그 새끼 뭔데요?’
‘황태자 전하께 그 새끼라니. 로나 양. 말 잘했습니다.’
‘와, 진짜 열 받아서 혼났네. 황태자가 일레온 님 보다 잘난 게 뭐가 있나요? 아버지가 황제라는 것만 빼고.’
황실 모독으로 걸릴만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 로나와.
‘대공 전하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저 황궁에서 밀가루나 축내는 존재이지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로나의 황실모독에 동참하는 베르나르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집사가 서글픈 표정을 했다.
‘우리 전하께서 다치시기 전까지만 해도 말도 못 걸고 피해 다니던 모지리 같은 놈이.’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사람이 아픈 사람한테 저럴 수가 있어요?’
‘제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대공 전하께서 황제의 지위에 오르시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많답니다.’
둘이 시근대다 못해 숨이 거칠어질 때였다.
“그만. 조용히 하지.”
일레온의 말에 로나와 베르나르는 입을 딱 다물었다.
“둘만 무슨 이야기를 그리 하는 거지?”
“약차요.”
로나의 눈짓에 베르나르가 맞장구를 쳤다.
“로나 양이 대공 전하께 눈에 좋은 차를 올리겠다고 하길래 말입니다.”
“둘 다 나를 바보 취급 하는군.”
일레온이 피식 웃었다.
“나 때문에 사비엘을 비방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황실 모독죄는 가볍지 않은 편이지. 그러니 너무 마음 쓸 것 없어.”
일레온이 담담하게 말하는 표정은 조금 풍화되어 있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라고, 매번 화를 낼 순 없다고. 모욕하는 자는 너희들보다 신분이 높으니 거스르지 말라고. 난 괜찮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말이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로나의 말에 보이지 않는 일레온과 집사의 눈이 동시에 그녀를 향했다.
“저는 대공 전하의 종인걸요. 아까도 옷만 입고 있었어도 제가 이길 수 있었어요.”
속옷 차림이 아니었다면 당장 튀어 나가 황태자를 주먹으로 때려주었을 것이다.
“맞습니다. 로나 양이 탈의 중이 아니었으면 분명히 이겼을 겁니다.”
뭐예요, 집사님. 그 나약한 발언은. 당신이 직접 주먹을 쓸 생각은 못 한 겁니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로나는 일레온의 표정이 부드러워진 것에 만족했다. 곧 마차가 대공저에 도착했다. 오늘도 어제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가져오겠습니다.”
“로나는 어제도 비를 맞았으니 여기서 기다리게 해.”
“예. 전하.”
집사는 우산을 가지러 대공저를 향해 달려갔다. 베르나르가 멀어지자 일레온의 얼굴에서 불이 꺼진 듯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일레온 님. 괜찮으세요?”
“괜찮다.”
그리 말하며 일레온은 맞은 편에 앉은 로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툭. 그녀의 어깨에 일레온의 이마가 닿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바닥이 미끄럽군.”
“그렇네요.”
“이건 기댄 게 아니라 내가 미끄러져서 그런 거야.”
곧 일레온이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성벽처럼 단단하고 산처럼 높던 어깨가 가느다랗게 흔들린다. 로나의 어깨가 그의 눈물로 젖어 들었다.
*** 일레온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하더니 일찍 자리에 누웠다. 덕분에 빠르게 퇴근할 수 있게 된 로나는 그의 침실 문을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
“황태자라고?”
어디서 머리에 총이라도 잘못 맞은 것 같은 그자가? 속옷 차림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데 커튼을 열겠다고 다가올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렇게 예의도 모르고 후안무치한 이가 제국의 후계라니. 어쩜 이렇게 운이 나쁠까? 황태자를 보니 제국의 미래가 아주 훤했다.
“사비엘. 사비엘이 서브 남주일 텐데.”
게다가 여주의 자리에서 탈주한 카리나와 한창 혼담을 진행하는 사이라고 한다.
“그런 난봉꾼일 줄이야.”
로나는 너무 분한 나머지 사비엘에 대한 복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대략 대공저의 월급을 열심히 모아 수도에 번듯한 가게를 낸 후, 돈을 쓸어모아 어디서 작위를 사든 양녀로 어느 집에 들어가든 황실을 드나들 수 있는 자격을 얻고 말리라. 그 후 직접 황궁에 가게 된다면 황태자의 얼굴에 돈봉투라도 던지며 ‘우리 애 앞에 다신 나타나지 말아줘요.’라고 외쳐주겠다.
“일레온. 조금만 기다려. 내가 눈을 뜨게 해줄게. 꼭.”
로나가 씩씩거리며 마음을 다잡고 다짐할 때였다. 로나는 뭔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엄청 중요한 걸 잊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헉! 미쳤어. 미쳤어.”
정원에 피어 있던 약초를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그 수상한 풀포기가 정원에서 살아남은 건, 정말 천운의 요행이었다. 왜냐면 그런 이름 모를 잡초가 돋는다면 정원사가 냉큼 뽑아버리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정원사가 노환으로 거동이 힘들게 되자, 그의 아내 니엘이 남편도 보살피고 혼자 대공가의 정원도 가꾸었다. 어차피 손님이 크게 드나들지 않게 되었으니, 저택 본관 앞의 정원만 꼼꼼히 관리하고 후원은 반쯤 방치하게 된 것이었다.
「이건 ㅇㅇ초군요.」
「ㅇㅇ초?」
「어쩌면…… 이게 당신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운이 좋았어요. 이 꽃은 비를 맞으면 시들어서 건기에만 핀다고 하거든요.」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무슨 초인지 풀 이름이 생각이 안 났다. 크흑. 그건 둘째치고 비를 맞으면 시든다고 했는데 어제도, 오늘도 비가 내렸다. 그동안 로나는 매일 그 풀이 잘 있는지 지켜보느라 매일 밤 후원에 다녀오곤 했다. 하지만 어제는 일레온에게 끌려가 욕실에 감금당했고, 오늘은 의상실에서 황태자와 마주친 일 때문에 그의 기분이 너무 나빠 시중을 들다 잊고 말았다. 울컥. 로나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일레온이 눈을 뜰 기회를 잃어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았다.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받지 않아도 될 모욕을 당하고 악심을 품은 자가 짓밟겠다고 설쳐댄다. 그런 꼴을 계속 봐야할지도 모른다니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로나는 쓰러지듯 풀이 자란 덤불 앞에 엎드렸다.
“어, 어떡해.”
로나의 두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탐스럽기만 하던 꽃송이에서 꽃잎이 져서 떨어지고 있었다. 반쯤 시들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잎을 본 순간 로나는 미칠 것 같았다. 신비한 힘이라도 서린 듯 환한 빛을 머금고 있던 꽃은 고개를 꺾을 듯이 기운 채 반쯤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저 꽃의 빛이 사라지면 약효가 없어지는 거란 걸 느꼈다. 로나는 즉시 그 풀을 잡아 뽑았다. 신기하게도 뽑은 후에도 꽃에 어린 빛이 사라지지 않고 아직 남아 있었다.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꽃잎까지 챙긴 로나는 다시 비를 뚫고 주방 뒷문으로 내달렸다.
“냄비.”
하나같이 커다란 것만 눈에 들어와서 로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곧 구석에서 우유를 데울 때 쓰는 작은 냄비를 찾아내 물을 담고 조리대에 불을 붙이려 했지만……. 늦은 시간이라 주방장이 퇴근해버린 주방에는 불씨 하나 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어떡해. 어떡해.”
침착해야 해. 로나는 곧 일레온의 방을 떠올렸다. 어제 오늘 계속 비가 내리고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서 대공의 침실 벽난로에 불을 피워둔 게 생각났다. 로나는 물이 담긴 냄비와 캐낸 풀을 쥐고 일레온의 방으로 달려갔다. 양손에 든 것들 때문에 요란스레 문을 열자 침대에서 잠들어 있던 일레온이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로나?”
대답할 겨를도 없이 벽난로에 냄비를 들이민 로나는 초조한 눈빛으로 물이 데워지길 기다렸다. 곧 데워진 물에서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손안의 꽃은 빛이 거의 죽어 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로나는 손에 쥐고 있던 풀을 뿌리부터 떨어진 꽂잎까지 전부 물에 집어넣었다. 다시 냄비를 벽난로에 대고 조금 더 끓이자니 로나는 맥이 빠졌다.
‘대체 뭐 때문에 고민한 거냐고.’
물 온도부터 약재로 사용할 수 있는 부위, 풀의 손질 방법 따위를 고민했던 일이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다. 펑. 갑자기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나서 로나는 손에서 냄비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게…… 뭐지?”
냄비에 넣었던 약초는 흔적도 없이 녹은 듯했다. 그런데 약의 색이 이상했다. 컵으로 옮기자 까맣고 걸쭉해 보이는 액체가 느릿하게 떨어졌다. 수상한 약차는 아무리 봐도 건강에 좋을 것 같지 않아서 로나는 코를 대어 냄새를 맡아보려 했다.
“헉. 캑캑.”
알싸하게 매운 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로나의 몸이 견디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
‘이걸 먹을 수는 있는 거야?’
로나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제대로 된 약이 아닐 것만 같았다. 로나가 어쩔 줄 몰라할 때였다.
“여기서 뭐 해?”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일레온이 물었다.
“그게 약차를 만들려고 했는데.”
갑자기 로나는 눈시울이 시큰했다.
“망친 것 같아서…….”
로나는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원작을 탈주해버린 카리나가 원망스러웠다. 만약에 일레온이 눈을 뜨지 못한다면 절대로 그녀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일레온은 주저앉아 있는 로나의 옆에 앉더니 조심조심 손으로 그녀의 팔을 더듬었다. 로나의 손에 들린 컵에서 풍기는 열기를 느낀 그가 손잡이를 쥔 그녀의 손위로 제 손을 겹쳤다. 로나의 손째로 컵을 끌어간 일레온이 냄새를 맡는 걸 보며 로나는 도르륵 눈물을 흘렸다. 먹지 마, 망한 약. 고작 2년의 세월로도 인격이 닳아버린 듯한 그였다. 앞으로 10년을 더 이렇게 살면 그때도 여전히 이렇게 그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컵에 입을 댄 일레온이 숨도 쉬지 않고 그것을 마시기 시작했다.
“안 돼요. 일레온 님! 마시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