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변2022.02.19.
“안 돼요. 일레온 님! 마시면 안 돼요!”
꿀꺽, 꿀꺽, 꿀꺽. 로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단번에 마신 일레온이 그녀의 손에서 컵을 빼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일레온의 손이 로나의 손, 팔, 어깨를 더듬어 올라가다 얼굴에 닿았다. 그는 축축하게 눈물범벅이 된 로나의 뺨을 제 손으로 닦아주었다.
“울지 마.”
“그, 그걸 드시면 어떡해요?”
“내게 주려고 가져온 게 아니었나?”
로나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자, 잘못 만든 것 같아요. 원래 만들 줄 아는 사람을 알았는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해서. 흐흑. 혼자 해보려다가…….”
로나는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일레온은 손가락을 움직여 로나의 빰에 흐르는 눈물을 거두어가고, 또 거두어갔다.
“괜찮다. 네가 가져온 거라면 뭐든 열심히 마셔보겠다고 했잖아.”
“그래도…….”
“나를 생각해 준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일레온이 기쁜 듯 웃자 로나는 더욱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더 좋은 걸 찾아올게요.”
눈물을 닦고 로나가 씩씩하게 말했다.
“분명히 있을 거예요.”
빠진 주어를 알아들은 일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지.”
약차의 일은 그렇게 일단락될 줄 알았다. *** 수정궁으로 돌아간 사비엘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레온 그 자식이 뭐라고.”
시근대며 거칠게 내려놓은 잔 주위로 도수 높은 술이 이리저리 튀었다. 황태자 사비엘 오데르 콘스탄스. 그는 이름값을 못 하는 인물이었다. 콘스탄스 제국은 긴 역사를 자랑했다. 그 중 건국사에서 중요한 이야기는 초대 황제가 된 오데르 황제가 죽어서 신좌에 올랐다는 것이다. 오데르 황제는 죽음을 맞이한 후, 성대하게 장례가 치러졌다. 초대 황제에 대한 예우였다. 그러나 1년 후, 국장이 탈상을 맞이했을 때 신전에 계시가 내렸다. 오데르 황제가 생전의 말했듯이 죽고나서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황제를 안장했던 묘에 돌아가니 시신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매년 황제가 신이 된 날에는 비가 내리는데, 국민들을 사랑한 황제가 보내는 메시지로 여겼다. 오데르 황제는 신이 된 후, 신전을 통해 몇 가지 말을 남겼다. 그것은 앞으로 황가에 대대로 자신을 닮은 아이가 태어날 거라는 말이었다. 놀랍게도 그 후 황제의 자식 중 한 명씩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진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또 그 아이는 소드마스터의 자질이 개화하곤 했다. 콘스탄스 제국은 신의 후손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건국한 지 이천년이 지나 세상이 너무나도 달라졌지만, 그사이 한 번도 반역이나 황좌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던 건 확고한 건국 신화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신의 후손이란 건, 결국 신이 지명한 아이가 황제가 될 거란 뜻이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남자아이는 한 명만 태어났기 때문에 첫째든 둘째든 출생 순서에 따르지 않고 그 아이가 황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사비엘은 신의 지명을 받지 못한 아이였다. 레브 오데르 콘스탄스는 황녀였지만,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 그녀가 세 살 아래 사촌동생을 낳았을 때, 어린 사비엘은 제가 사는 세상이 통째로 흔들리는 걸 느꼈다.
「어쩜 이런 일이.」
「방계에서 ‘그 오데르’가 태어난 건 처음이랍니다.」
「그럼 우리 황자 전하께서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너무 어렸기에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게 좋은 일이 아닐 거란 건 확실히 느껴졌다. 아버지인 황제의 냉정해진 눈빛. 어머니인 황후의 마르지 않는 눈물. 그는 거울을 볼 때마다 드높은 하늘처럼 파란색인 제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다. 하늘은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거니까. 다들 귀하다고 하는 저와 어울리는 색이 아닌가. 하지만 ‘오데르’에게는 있어서는 안 되는 색이었다. 사비엘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냥 그리 태어난 것뿐. 하자품 취급을 받던 그는 삐뚤어졌다. 초대 오데르 황제가 신이 되었다고? 웃긴 이야기였다. 사비엘은 그 무덤이 시신까지 도굴당한 거라고 믿기 시작했다. 과학을 신앙처럼 여기고 신학에는 귀를 닫은 신흥 귀족 무리와 친해졌다. 그들은 재력을 가졌고 기존 귀족들과 대립했다. 기존 귀족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기사단장이며 무패의 전신, 일레온 클레벤트를 양자로 들여 ‘오데르’의 이름을 주어야 한다고 황제에게 탄원서를 냈다. 사비엘은 자신의 고귀함을 인정하지 않는 그들을 경멸했다. 자신은 유일한 현 황제의 후계였고 정식 황태자였다. 먼저 선을 넘고 규칙을 위반한 건 구시대의 유물 같은 ‘오데르’를 추앙하는 노귀족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구명줄처럼 매달리는 일레온을 망가트릴 계획을 세웠다. 그의 눈을 빼앗은 건, 독이 아니라 사술에 가까운 저주였다. 그의 눈을 되찾게 할 방법은 딱 한 가지 빼고는 없었다. 그 해독법조차 사비엘의 손안에 있으니 일레온은 영원히 어둠에 묻혀 살게 될 터였다. 그 결과에 사비엘은 만족했다. 눈먼 대공이 좌절에 빠져 짐승처럼 지낸다는 보고를 보았을 때, 그는 거금을 들여 제국 전역에 ‘눈먼 짐승’에 대한 소문을 퍼트렸다. 추락한 영웅에 대한 소문은 나날이 세를 불렸다. 일레온을 ‘우러러보아야 할 존재’에서 ‘불쌍한 놈’으로 탈바꿈시키며 사비엘은 쾌감을 느꼈다. 더 이상 황제에게 일레온에 대한 탄원서가 들어오지 않는다. 사비엘이 ‘오데르’의 이름을 물려받게 해선 안 된다고 마뜩잖아하는 시선도 사라졌다. 사비엘은 요즘 한마디로 살맛이 났다.
“그런데 묘하게 거슬리네.”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서 그렇게까지 일레온을 자극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환한 햇빛이 내리쬐는 곳에서 부드러운 얼굴로 드레스를 지을 옷감들을 어루만지고 있는 일레온을 보자 기분이 더러웠다.
기껏 진창에 처넣었는데, 벌써 기어올라 머리를 내밀고 있지 않은가. 그는 안정되고 행복해 보였다. 그랬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에 서려 있는 감정은 만족과 행복이었다. 아직 나는 한번도 행복해 본 적도, 만족해 본 적도 없는데 너 따위가.
“그 여자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그렇게 고고하던 일레온 클레벤트가 눈이 멀어 하찮은 여자와 붙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가십거리가 될 터였다. 사비엘은 자신의 부관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일레온 클레벤트에게 여자가 있다는군.”
부관조차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레온은 여자와 거리가 멀기로 워낙 유명했다. 수도 영애들 사이에 난공불락의 요새라고까지 불렸던 적이 있었다. 누구도 그와 데이트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뒷조사 좀 해봐. 어떤 여자인지. 어느 집안 영애인지. 아니 평민일 수도 있겠군.”
“분부 받들겠습니다.”
사비엘은 술잔을 집어들었다. 일레온이 미소를 짓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그날 밤 사비엘은 아무리 마셔도 취할 수가 없었다. *** 이변이 일어난 건 한밤중의 일이었다.
“으아아!”
고통 어린 일레온의 비명소리에 온 대공저 사람들이 잠에서 깨었다. 가장 먼저 그의 방으로 달려갔던 로나가 본 것은 눈가에 피가 묻은 채 고통스러워하는 일레온의 모습이었다. 희고 깨끗한 이불과 베게 위로 선혈이 남긴 핏자국이 선명했다.
“아악! 눈이!”
일레온은 잠시도 견딜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제 눈 주변을 자해했다. 로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비키세요, 로나 양.”
놀라서 떨고 있는 그녀의 앞으로 나선 건, 집사와 시종 몇 명이었다.
“무명 천이 아직 남은 게 있을 거야. 가서 가져오게.”
베르나르는 침착한 태도로 일레온에게 진정제를 먹이려 했다.
“으으으으.”
하지만 워낙 힘의 차이가 커서 일레온의 머리를 고정시키려고 목에 감았던 팔을 세게 물렸다. 주륵. 집사의 흰 셔츠 소매 위로 피가 배어 나오더니 순식간에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베르나르가 시키는 대로 긴 천을 가지러 갔던 이들이 돌아오자 그들은 순식간에 일레온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침대에 사지를 벌려 묶었다. 비참한 광경이었다. 지독하고 폭력적인 장면에 충격을 받은 로나는 입을 손으로 막은 채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담담하게 역할을 나눈 듯 움직이는 집사와 사내들이 하루, 이틀에 저리 숙련된 게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악. 욱. 우욱.”
집사가 능숙하게 공처럼 둘둘 만 수건을 일레온의 입에 쑤셔넣었다.
“읍, 으으읍!”
일레온이 몸을 발작하듯 비틀 때마다 침대의 프레임이 부러질 것처럼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남은 흰 천을 길게 찢어 일레온에게 물린 팔을 지혈한 집사가 로나를 불렀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요. 로나 양.”
*** 대공저에는 챙겨야 할 일이 어마어마했다. 꽤 젊은 나이에 경력도 짧은 베르나르는 자신의 우월한 능력만으로 일찌감치 대공가의 집사가 되었다. 아직 대공가를 단속할 여주인이 계시지 않으니 그가 맡아야 할 살림은 끝도 없었다. 그는 침실 외에도 따로 여러 일들을 두루 챙겨보는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대공저에 면접을 왔을 때나 들렀던 집사의 사무실에서 로나는 멍하니 앞에 놓인 찻잔을 쳐다볼 뿐이었다.
“많이 놀랐겠군요.”
“……네.”
로나는 피가 돌지 않아 차갑고 따끔거리는 손을 맞잡고 주물렀다.
“집사님은 놀라지 않으세요?”
그도 평소와 달리 안색이 파리했다. 게다가 소매를 가위로 자르고 처치한 팔은 어찌나 세게 물렸는지 한참 동안 지혈이 되지 않다가 피가 멎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꽤 자주 있었던 일입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집사의 눈에 근심이 서렸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고요? 저는 처음 봤는데요.”
일레온이 자주 겪는 일이었다면 로나가 처음 보는 일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로나 양이 저택에서 일하기 전에. 훨씬 전에 말입니다.”
옛일을 떠올린 베르나르의 눈가가 붉어졌다.
“대공 전하께서는 눈을 치료할 때마다 끔찍한 고통을 느끼곤 하셨답니다.”
로나의 눈이 커졌다. 베르나르는 이 일을 떠올리는 것만 해도 힘든 듯 보였다. 담담하게 대공을 침대에 잡아 묶어놓은 처치와는 다르게 집사는 무척 괴로워 보였다. 일레온은 마지막 전투에서 눈을 다친 채 저택에 돌아왔다. 그가 처음부터 짐승처럼 날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뼛속까지 기사정신으로 무장한 일레온은 기사단장인 자신이 제국에 바쳐진 승리의 빛을 바래게 하였다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러니 눈을 치료하기 위해 약이며 음식이며 온갖 것을 시도해보았다. 그때 이 증상이 시작되었다.
“안구를 안쪽에서부터 물어뜯기는 통증이라고 하십니다. 눈을 불로 지지는 것 같다고 하실 때도 있었지요.”
끔찍한 통증이 일레온을 덮쳤다. 몇 달 동안 거의 매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일레온은 제 눈을 되찾길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해볼 수 있는 마지막 방법까지 모두 시도해보고야 끝없이 이어지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온이 아니었다. 예전으로 되돌아갈 하나의 방법을 찾지 못한 사내는 좌절했다.
“대공 전하께서 앞을 보실 수 없다는 것보다 눈을 제 손으로 뜯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파하시는 걸 지켜보기가 힘들었지요.”
게다가 매일이 희망고문이었다. 저 약이 듣지 않을까? 이번 치료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딱 한 번만 더 참으면 되지 않을까. 이 긴 터널 같은 고통을 다시는 맛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주인을 하늘처럼 섬기는 집사의 눈꼬리에서 가느다란 눈물이 떨어졌다. 로나는 가슴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집사에게 물어 봐. 치료에 사용했던 약재들을 정리해둔 자료가 있을 거야. 시도해보지 않았던 거라면 마셔보지.」
어쩐지 ‘시도해보지 않았던 거’에 힘을 주던 일레온이 떠올랐다. 끔찍한 고통을 수반할 것을 알면서 먹어 본 약을 다시 먹는 건 엄두가 나지 않을 터다. 꼼꼼히 기록해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겠구나 이해가 되었다.
「너무 큰 기대를 하지는 말고. 로나 네가 가져온 거라면 뭐든 열심히 마셔볼 테니.」
저렇게 힘들어하면서 제가 주는 걸 마시겠다고 했단 말인가. 뭘 먹일 줄 알고 저를 무작정 믿는단 말인가.
“대체 대공 전하께 드린 약이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