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입으로 먹여줘2022.02.23.
“대체 대공 전하께 드린 약이 무엇입니까?”
로나는 난처했다. 분명 일레온이 제가 먹었던 약에 대한 기록이 있으니 집사에게 물어보라 했었다. 먹은 적이 없는 거라면 먹어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꽃에서 흘러나오던 은은한 빛이 사그라들고 시드는 걸 보고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바로 약차를 만들고 말았다. 다급하게 움직이다 보니 베르나르에게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 꽃이 원작에서 일레온의 눈을 뜨게 해준 그것이라는 게 확실했으니까 방심한 것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일레온을 두고 베르나르 앞에서 말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저도 잘…… 몰라요.”
“모른다고요?”
그녀의 말이 무책임하다고 느꼈는지, 집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뭔지도 모르는 걸 약이라고 전하께 올리다니!”
베르나르가 언성을 높이는 모습을 처음 본 로나는 더욱 위축되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변명이었고 초라했다.
“아마 드셔보신 적이 없는 건 확실해요. 그 약의 이름은 들었었는데 잊었어요. 계속 생각해봤지만 기억이 나지는 않아서…….”
“그런 걸 대공 전하께 드렸단 말입니까?”
“흑.”
로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런 로나를 보고도 베르나르는 그저 분노했다.
“그 약은 어떻게 구한 겁니까? 정보의 출처는 어딥니까? 내가 직접 확인을 해야겠군요.”
집사는 냉정하게 태도를 바꾸었다.
“바, 밝힐 수 없어요.”
이곳이 책 속의 세계라고, <눈먼 짐승의 꽃> 세계라 읽어서 알게 되었노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미래를 보는 예언 같은 게 있어요.”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로나 양. 로나 양 기억을 잃었다고, 예전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대공 전하를 해할 목적으로 위장 취업을…….”
“아니에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하지만 말씀드려도 이해하시지 못할 거예요.”
베르나르의 표정이 굳었다.
“대공 전하께서 의식이 돌아오시면 로나 양을 어떻게 처분할지 의논하겠습니다.”
로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만했다.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불분명한 것을 대공에게 먹였다. 예전 전장에서 지낼 때부터 일레온을 독살하려는 일이 너무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야채나 고기 같은 식재료조차 직접 사들인 농장에서 생산하는 걸 대공저의 심부름꾼이 골라올 정도였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근신하는 마음으로 대공 전하를 모시도록 해요.”
“네.”
집사의 방에서 나오자 긴 한숨이 나왔다.
“내가 약을 잘못 만들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치료를 받을 때마다 이렇게 고통받았다고 한다. 로나의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다행이어야 하는데, ‘다행이다’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짐승으로 남길 택한 좌절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 알아버렸다. 로나는 이방인이었다. 이 저택에 남아 있는 열 명도 되지 않는 사용인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전선을 함께 넘은 전우였다. 그들의 끈끈함은 일레온이 보여주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기인했다. 로나는 조용히 일레온의 침실에 들어섰다. 아까의 발작이 거짓말인 듯 지금 일레온은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엉망으로 뜯긴 셔츠는 그의 맨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양손 끝에 피가 굳어 엉겨 붙어 있고, 얼굴과 몸은 땀과 핏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일레온.’
그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다. 로나는 미지근한 물에 수건을 담그고 그의 이마와 얼굴을 살살 닦기 시작했다. 청결하게 닦고 약이라도 발라 줄 생각이었다.
“우. 으?”
집사가 혀를 깨물지 못하게 수건을 물려놓은 입에서 소리가 났다.
“우으아?”
마치 평소처럼 ‘로나’ 하고 자신을 부른 것만 같았다.
“일레온 님.”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일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일레온이 또 알아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로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울음을 참으며 목소리를 억지로 내려니 목이 메어 따끔거렸다.
“불편하셔서 그래요? 수건 치워드릴까요?”
매우 긍정하듯 그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베르나르가 물리는 모습을 보아서 그런지 두려웠지만 로나는 그의 입을 막고 있던 수건을 빼주었다.
“하아.”
일레온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러다 또 아프기라도 할까봐 로나는 두려웠다. 선뜻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이런 고통이 일상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더 그랬다.
“놀랐지.”
먼저 입을 연 것은 일레온이었다.
“네가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저택에 남은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남자들이라고 이런 꼴을 견딜 수 있는 건 아니었겠지.”
그러고보니 여자 고용인 중에 남은 단 두 명이 정원사와 요리사로 직접적인 일레온의 시중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로나.”
“네?”
“넌 도망치지 마.”
“제, 제가 어디 도망갈 사람으로 보이세요?”
일레온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 명쯤은 이런 날 보고도 도망가지 않은 메이드가 있다고. 하지만 기대했다가 로나 너마저 도망가면 나는 실망하겠지.”
“저는 도망 안 가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하는 말이야. 네가 이런 꼴을 보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야.”
나는 해보지 않은 치료가 없거든. 그래서 이 고통이 오랜만이었다고 중얼거리는 일레온의 표정은 담담해서 더욱 슬퍼 보였다.
“꼭 나을 거예요.”
“네가 준 약차를 마셨으니까. 만약에 눈이 낫는다면 널 정식으로 대공가의 사람으로 만들거야.”
일레온의 말에 로나는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가 주인님을 모시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대공가의 사람으로 만들다니. 제가 대공가의 가신이 되는 걸 바란 적은 절대로 없는 걸요.”
“누가 널 가신으로 삼는대. 내가…… 쿨럭.”
일레온의 반듯한 입술이 거칠게 터져 메말라 있었다.
“목……말라. 쿨럭.”
“말씀 그만 하세요. 물을 가져다 드릴게요.”
로나는 얼른 가서 물병을 가져왔다.
“그런데 물을 어떻게 드리죠?”
일레온은 양팔과 다리가 전부 침대에 묶인 상태였다.
“이것도 풀어드려도 되나요?”
“아니. 안 돼.”
일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새벽에 또 그럴지 모르니까.”
일레온을 묶어둔다면 소강상태로 봐야 했다. 하지만 손을 풀어주었다가 또 자해를 한다면 그땐 공작저의 모든 이들이 출동해야 할 판이다.
“그럼 물을 어떻게 드려요?”
입에 따라주어야 하나? 그러다 코로 들어가면 어떡하지? 로나가 덧없는 고민을 할 때였다.
“입으로 먹여줘.”
일레온의 말에 로나는 목이 늘어난 것 같은 기분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이, 입으로 먹여주라니 그게 무슨…….”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일레온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환자라고.”
핏덩이가 엉겨 붙어 내내 감겨있던 눈 위로 시무룩해진 듯 눈썹이 팔자를 그렸다.
“전에는 집사가 해줬어.”
“아…….”
로나는 손에 든 물병을 보았다. 집사 베르나르도 했다는데 그녀라고 못할 건 없을 거 같았다.
“무리라면 집사를 깨워…….”
뺨에 로나의 손이 닿자, 일레온이 말을 하다말고 몸을 움찔했다. 입에 물을 머금은 로나가 부드럽게 입술 근처를 어루만지자 일레온의 입술이 벌어졌다.
“…….”
처음의 행위가 어려웠지 두 번, 세 번은 쉬웠다.
‘나는 어미 새다.’
지금 둥지에는 배가 고픈 아기 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로나는 대자연의 이치에 편승하려 애를 썼다. 그게 아니라면 일레온의 입술 촉감이라던지, 입술이 닿는 순간 코끝에 느껴지던 샌달우드 냄새 같은 것에 집중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로나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레온은 그녀가 먹여주는 물을 아무렇지 않게 잘도 받아먹었다. 그렇게 몇 번 더 물을 넘겨주니 일레온이 살 것 같다는 듯 긴 한숨을 쉬었다.
“후우…….”
로나는 미지근한 물을 다시 가져다 일레온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몸도 닦이고 옷이라도 갈아입으면 좋으련만, 양팔이 묶여 있으니 새 셔츠를 입혀줄 수는 없다. 작게 한숨을 쉬고 생채기가 난 이마와 눈가에 연고를 발라주자 일레온이 따가운 듯 움찔움찔 눈을 찌푸렸다.
“이제 좀 주무세요.”
로나가 어질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고 일어섰을 때였다.
“잠이 안 와.”
그럴 만 했다. 어쩌면 잠드는 게 무서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아플지 모르면 불안하지 않을까.
“책 읽어줘.”
“그럴까요? 무슨 책이 좋으세요?”
“팔레가라 전쟁사.”
로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말고 다른 책은 싫으세요?”
저번에 읽어주다 말고 자신이 잠이 들지 않았던가.
“그 책 좋아해.”
로나는 한숨을 쉬며 두툼한 팔레가라 전쟁사를 가져왔다. 가죽으로 만든 표지에 멋들어진 금박이 들어간 양장본의 책은 무기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묵직하고 단단했다.
‘또 읽다가 잠드는 것만은 안 돼.’
로나는 조금 지친 상태였다. 일레온이 발작하는 것을 본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당장 방에 가서 눕고 싶었지만, 그가 너무 안쓰러워서 해달라는 것은 뭐라도 해주고 싶어졌다.
‘또박또박 읽자.’
힘주어 읽으면 저번처럼 잠들진 않겠지? 로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트로팔가라는 싸움을 모르는 민족이었다.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그들의 무예는 자기수련에 가까웠다. 트로팔가라가 팔레르모에 반기를 든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로나는 또박또박 책을 읽어나갔다.
“팔레르모는 트로팔가라의 병력에 대해 폄하했다. 그것은 팔레르모의 큰 실수였다. 2차전에서 트로팔가라의 보병은 약 20,000명, 기병은 8,000에 달했다. 포대에 전열한 대포가 500문, 교대로 불을 붙일 포병이 1,200명 대기했다.”
로나는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뒤로 방패를 든 돌격대가 6,500명……늘어서고, 아흐흠. 돌격대의 뒤를 따르는 화살부대가 3,000명이었다. 하지만 트로팔가라는 양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후방으로 2,500의 기병대가……도열한 팔레르모의 대열을…… 옆에서부터 무너뜨릴…… 무너뜨릴…….”
툭. 로나는 일레온 침대 위로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잠들었네.”
일레온은 웃어버렸다. 이번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반드시 팔레가라 전쟁사의 저자에게 거한 집필 후원을 하리라 다짐했다. 꽁꽁 묶인 팔 아래에 흐트러진 로나의 머리카락이 닿았다. 간지러운 것도 같았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기에 일레온은 로나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통으로 가득 찬 어둠 너머로 은은한 로나의 향기가 풍겨왔다. 눈을 가린 어둠은 끝도 없고 막막해서, 익숙한 외로움 사이로 로나의 숨소리를 들으며 일레온은 조금의 위안거리를 찾았다. 문득 웃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일레온은 눈을 치료할 때마다 이런 고통을 겪어왔다. 너무나도 끔찍한 경험이었다. 어떤 때는 눈 안쪽에서 무언가가 할퀴며 잡아 뜯는 것처럼 아팠다. 차라리 눈을 뜨지 않아도 좋으니까 이 고통을 끝낼 수 있다면 눈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치료를 시작하고, 무참한 고통에 몸부림친 끝은 역시나 아무 효과 없이 끝났다. 그런 자신이 발작 중에 이렇게 웃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이상했다. 웃음이 날 수가 없는 상황인데 그래도 로나 앞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희망’이랄까. 그런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의 존재가 어째서 이토록 힘이 되는 걸까. 일레온은 자신의 변화가 스스로 놀라웠다.
“나는 네게 의지하고 있어. 로나. 나는 평생 널 절대로 놓지 못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