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일레온의 것을 뺏는다2022.02.26.
“나는 네게 의지하고 있어. 로나. 나는 평생 널 절대로 놓지 못하겠지.”
일레온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건 약점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이 존재하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도 목숨을 잃을 이유가 된다. 일레온은 지휘관이었다. 수장이 죽음을 맞은 군대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일레온의 목숨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것이고 또 모든 병사들의 것이었다. 그러니 그런 약점을 만드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결혼이나 후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도 담백했다. 대공가에 이익이 되는 혼담을 진행해서 부인과 후계를 이을 아이를 하나 만들고 그녀에게 평생 대공가 안주인 자리를 보장하면 되는 일로 여겼다. 실제로 많은 귀족들의 결혼이 조건과 가문의 부흥을 위해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레온 자신이라고 별달리 유난스러운 결혼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한 가문의 가주로 태어난 이상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있지 않다는 건 크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그것이 전쟁터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어릴 때부터 가문의 수장이 될 후계로 교육받았던 일레온이 갖고 있던 가치관이었으나, 로나를 만난 후로부터 그는 누구보다 감정적이었다. 로나가 그를 변하게 만들었다. 그는 충분히 진심이었다. 사랑의 힘이 기적을 불러온다는 걸 일레온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그런 환상을 좇는 걸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로나를 원하는 진심은 너무 특별하고 강렬해서, 그녀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 같다고 그렇다고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로나. 도망치지 마.”
로나는 마음이 약했다. 목이 마르다는 제 말에 망설이면서도 ‘집사도 해주었는데’라는 말에 결국 제게 물을 먹여주지 않았나. 우습게도 연애는 둘째치고 변변히 여성과 데이트 한번 한 적 없었던 일레온의 첫 입맞춤이었다. 물론 집사는 입으로 물을 먹여준 적이 없었다. 일레온이 목이 마르다고 하면 주둥이가 작은 차 우려내는 주전자에 물을 덜어 조금씩 마실 수 있게 입가에 대어주었다. 설마 로나가 집사에게 ‘집사님도 일레온님께 입으로 물을 먹여주었냐’고 묻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로나가 가련하고 불쌍한 자신을 쉽게 떠나지 못했으면 좋겠다. 월등히 높은 급료에 만족하고 다른 곳으로 일터를 옮길 생각 따윈 못하게 하고 싶다. 그래서 로나의 시간을 오래 차지하고, 그녀의 마음도 차지하고 싶다. 일레온은 이 정도 이기심은 신이 허락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빛나는 명예도, 찬란한 미래도 모두 잃어버렸다. 수렁 같은 좌절에서 빠져나와 겨우 사는 낙이 하나 생겼는데, 그 하나도 욕심을 부릴 수 없다면 차라리 제 목숨을 거두어 가주길 바랐다. 로나를 제 옆에 붙잡아두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가증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더 동정하도록, 더 마음이 쓰이도록.
“잘자. 로나.”
일레온은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 카리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녀의 손톱은 너덜너덜 보기 흉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더는 물어뜯을 것도 없는 손톱 끝을 계속 괴롭혔다. 똑똑. 문이 열리더니 카리나의 시중을 드는 하녀가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요? 알아 봤어요?”
하녀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바쁘셔서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하셨답니다.”
“달리 전하라는 말은 없으셨나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리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
사비엘의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뀐 것은 분명 그날 이후였다. 카리나가 그에게 대범하게 자신을 허락하고, 황궁에서 돌아오지 않았던 날. 그날 사비엘은 밤새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꿈같이 달고 환상적인 밤이었다. 사비엘이 제게 푹 빠져 열정을 보여주자 카리나는 우쭐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제국 최고의 남자인 황태자가 자신을 찬양하는 말을 귓가에 끝없이 쏟아주지 않던가. 다음 날, 백작저로 돌아가야 한다고 일어서는 카리나를 끝내 붙잡는 손길에서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가야 해요. 사비엘.」
깊은 정을 나누고 나자 입에 올리는 그의 이름이 사뭇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하아. 꼭 그래야 하나요.」
「아직 정식으로 혼인한 사이가 아니잖아요. 이러면 제게도, 전하께도 흠이 돼요.」
새삼스레 선을 긋자 사비엘은 안달이 난 것처럼 카리나에게 매달렸다.
「황제 폐하께서 하루 빨리 우리의 혼인을 승인해주셔야 할 텐데. 이제 그대 없이는 잠들 수 없을 것 같군요.」
돌아오는 길에 황태자는 마차에 노란 장미꽃을 가득 실어주었다. 백작저에 돌아와 탐스러운 꽃을 본 해링턴 백작 부인이 탄성을 질렀다. 노란 장미의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라는 걸. 카리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꽃에 담긴 말, 꽃에 숨겨진 뜻이 이렇게나 로맨틱하고 달콤한 줄 말이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었다. 그 후로 황태자가 그녀에게 입궁하라고 마차를 보내는 일이 없었다. 카리나가 먼저 심부름꾼을 보내 입궁을 할까 하고 넌지시 메시지를 전해도 사비엘은 바쁘다는 이유로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 밤을 보내고 나흘째. 카리나는 황태자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가 있지.”
카리나는 분개했다.
그런 카리나를 지켜보는 하녀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황태자 사비엘은 유명한 난봉꾼이었다. 현 황제의 유일한 자식으로 황태자의 지위와 ‘오데르’의 이름을 받았지만 그가 진짜 오데르가 아닌 줄을 수도 사람 중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황제의 누이동생, 황녀 레브 오데르 콘스탄스가 낳은 대공 일레온 클레벤트가 정확히 오데르의 특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바람에 황태자를 폐위해야 한다고 귀족 가문들이 들고 일어나는 게 연례행사였다. 오데르는 검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소드마스터의 자질이 개화한다. 황태자는 소드마스터가 되지 못해서, 오데르라면 마땅히 황제 임명식에서 손에 들어야 할 제국검을 들지도 못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일찌감치 삐딱해진 사비엘이 술과 도박, 여자에 미쳐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그러나 소문에 불과한 것을 평민인 자신이 감히 귀족 아가씨께 아뢸 수는 없었다. 황실 모독죄는 중죄였다. 치도곤을 당하면 멀쩡히 걷고 설 수는 없게 될 터였다. 그러나 갓 시골에서 상경한 순진한 아가씨는 순식간에 황태자의 마수에 걸려들고 말았다. 하녀가 보기에 카리나는 약지 못했다. 그에 반해 그녀가 지닌 아름다움은 치명적이었다. 지킬 수 없는 아름다움은 독이라고 하였던가. 황태자에게 마음을 홀딱 뺏긴 아가씨가 속앓이를 하는 모습을 보며 하녀는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제 와서 소문에 대해 고할 수는 없었다. 이미 늦어 ‘진작 말해주지 않았냐’는 탓을 듣느니 철저히 모르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황궁으로 가야겠어.”
서러운 얼굴로 입술을 사리무는 카리나를 보며 하녀는 그저 안타까웠다. *** 정오의 태양 아래 수정궁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보석처럼 빛이 났다. 푸른 관엽수 위주로 꾸며진 기하학적인 정원 안에 자리한 수정궁은 풀밭에 떨어진 커다란 보석처럼 보였다. 찬란한 건물 안에서, 사비엘은 어둑하고 음침한 공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게 다란 말인가?”
“죄송합니다.”
그의 매서운 눈빛에 부관이 고개를 숙였다.
“대공저에 일하는 사람이 워낙 적다 보니 사람을 보낼 수도 없고, 대공이 밖으로 외출을 하지 않으니 밖에서 살피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무능한!”
사비엘은 부관이 보고서랍시고 올린 종이를 그의 머리에 집어던졌다. 종이에는 대공가의 집사가 수도의 한 인력알선소에서 메이드를 소개 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로나 해라팰리스’. 나이는 스물 일곱으로 일레온보다 2살 연상에 저택에 머물며 그의 시중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본 사비엘은 비웃었다.
“시중은 무슨…… 밤시중이겠지.”
의아한 점은 인력알선소에서도 로나의 신분증명이 없었다고 했다. 보통 제국에서는 평민이라도 성인이 되면 신분증명을 발급한다. 신분증명을 낼 수 없다는 건 과거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사형수처럼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전과자가 도망치거나, 전쟁에서 잡힌 포로, 평민도 그 이하로 꺼리고 천대하는 떠돌이 집시들이 그런 경우였다.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라.”
금발 머리에 보랏빛 눈이라니 단번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제국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던 하듄샤의 보석 엘리시아.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그렇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그 뒤로 엘리시아는 하듄샤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 있다면 이럴 수는 없을 것이다.
「눈도 못 뜨는 대공 대신 내가 한번 봐 주지. 혹시 아나? 대공가의 재산을 노리는 사특한 계집이 꼬리를 치고 있을지.」
그리 말했지만 사비엘은 진심으로 일레온의 여자가 궁금했다. 일레온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쟁터로 떠난 건 16세 때였다. 금녀의 구역인 남학교에 전장으로 이어진 삶에 그가 여자와 접점을 가진 적은 없었다. 사비엘이 수도의 파티장에서 아름다운 미인들과 꽃을 따고 있을 때, 일레온은 전쟁터에서 적의 목을 따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그 여자를 한 번 봤어야 했는데.”
계속 찝찝하게 뒷맛이 썼다. 눈이 보이지 않을 일레온이 정확히 제 손을 낚아챈 데 놀랐기 때문이다. 그까짓 커튼 한 뼘만 젖혔으면 되었을 것을 안을 보지 못한 것이 이렇게 두고두고 생각난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야비한 생각이 들었다.
“일레온의 여자라. 그 여자를 내 여자로 만들면 그 자식 표정이 볼 만 하겠는데.”
그날 행복해 보이던 일레온은 묘하게 사비엘을 자극했다. 보이지도 않는 주제에 레이스 따위를 입혀 볼 여자를 상상했겠지. 그 얼굴을 떠올리면 어떻게든 침을 뱉고 재라도 뿌려주고 싶어졌다.
“로나. 그 여자를 봐야겠어.”
사비엘은 부관에게 명령했다.
“끌고 와. 어떻게든.”
“예. 전하.”
부관이 물러간 후에도 사비엘은 잠깐 얼굴도 모르는 ‘로나’를 상상했다. 일레온의 눈을 빼앗고, 그가 대공저에 칩거하면서 잠시 사라졌던 즐거움이었다.
“일레온의 것을 뺏는다라…….”
그건 어째서 이렇게도 짜릿하고 환상적인 것일까. 어쩌면 일레온과 자신은 그런 관계일지 몰랐다. 일레온이 마땅히 사비엘의 몫이어야 할 오데르의 증표를 가지고 태어났을 때부터. 사비엘은 일레온의 것을 빼앗지 못해 안달했다. ‘로나’를 어떻게 데리고 놀아야 일레온이 더욱 비참할지 더러운 망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전하.”
시종장이 그를 불렀다.
“카리나 님이 전하께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카리나?”
“카리나 드레페인 해링턴. 해링턴 백작가의 아가씨 말입니다.”
카리나가 누구더라. 사비엘은 잠시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아.”
희미한 은발에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떠올랐다. 황금을 녹인 듯 쨍한 금발에 짙은 자수정을 눈동자에 박아넣은 듯한 엘리시아가 빛바랜 것처럼 생긴 여자였다. 예쁘긴 예쁘나 못생긴 여자는 수정궁에 들인 적이 없었던 그에게 그리 큰 인상을 주진 못했다. 예쁘다는 건, 황태자의 침실에 발을 들일 기본 자격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이었지.”
즐길 줄 모르는 여자는 골치 아프다. 그래서 하루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신 만날 예정이 없었다. 그런데 직접 찾아왔다니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자리에 없다고 해.”
“예. 전하.”
지금 사비엘의 신경은 온통 ‘로나’에게 사로잡혔다. 그녀가 엘리시아와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라는 사실이 그를 상당히 자극했다.
“로나라. 이름도 깜찍하지.”
일레온을 괴롭히는 것과 엘리시아에 대한 욕구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비엘은 입맛을 다셨다.
“기대하게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