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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증거가 있을까요? (18/151)

18. 증거가 있을까요?2022.03.05.

타악.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16550646000158.jpg“아야!”

손목이 아프도록 격렬하게 낚아챈 서슬에 로나가 신음 소리를 냈다.

16550646000158.jpg“뭐예요?”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손목을 세게 움켜쥔 이를 돌아본 로나는 멈칫했다. 흰 로브를 입은 여자는 성숙한 눈빛의 미인이었다. 눌러쓴 후드의 옆쪽으로 드리운 붉은 머리카락은 끝을 하얗게 탈색한 거로 보였다. 특이하고 낯선 모습에 로나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살폈다. 당장에 뿌리치고 왜 이러시냐고 한소리 하려 했지만 입을 벌린 채 두 손으로 제 손목을 틀어쥔 여자는 손가락에 피가 통해 하얘질 정도로 힘을 준 채 벌벌 떨었다. 로나는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는 사무치는 그리움과 놀라움, 기쁨과 슬픔이 복잡하게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혹시? 혹시 나를, 기억이 없는 이 몸의 주인을 아는 사람일까?

16550646000158.jpg“저, 저를 아세요?”

왜 이러세요 대신 로나는 더듬더듬 그리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눈에 그렁하던 눈물을 떨어뜨리며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50646000172.jpg“아, 아가씨. 저 이리스예요. 저를…… 저를…….”

로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경악하며 조금 질린 듯 자신을 보는 그녀의 감정에 공감을 해줄 수도 위로를 해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제게는 빌린 몸의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그러면서도 내내 궁금하기도 하고 알고 싶기도 했다. 신분 증명이 없다는 게 여러모로 이곳에서도 살아가기 불편하기도 했고 ‘가족’이라 할만한 사람들을 찾으면 만약에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 때라도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여기서 살아갈 힘이 될 수도 있으니까.

16550646000172.jpg“어, 어떻게 저를 잊어버리셨어요. 저를…….”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도 충격과 실망을 드러내 보여서 로나는 입을 다물었다. 로나가 도망가기라도 할 것처럼 두 손으로 그녀의 팔목을 쥔 이리스는 기둥이라도 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버티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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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이 이리스와 같은 흰 로브를 걸친 남자 둘이 다가왔다. 한 명은 이십대 후반, 일레온보다 조금 나이가 있을 것 같은 청년이었다. 또 한 명은 이리스와 또래로 보였다. 그들은 남성임에도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이리스와 마찬가지로 머리끝이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16550646000184.jpg“엘리시아 님?”

16550646000184.jpg“엘리시아.”

그들 역시 로나를 보고 크게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로나가 아무런 반응 없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다가오지도 무슨 말을 하지도 못하는 대치가 이어졌다. 이리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16550646000172.jpg“저, 저를 잊으셨어요.”

16550646000184.jpg“뭐?”

나이가 많은 쪽의 남자는 그 말에 표정이 굳었고, 젊은 쪽은 뜨악한 얼굴로 로나를 보았다.

16550646000184.jpg“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옮겨야겠습니다.”

그들의 실랑이에 길거리에서 하나둘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로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수도에 위치한 대신전의 성소, 하듄샤. 하듄샤로 말할 것 같으면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관을 양성하는 성역이었다. 하듄샤에 자신을 봉헌하는 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콘스탄스 제국은 다섯의 주신이 깃든 기사들이 초대 제왕 오데르 콘스탄스를 보필하여 대재앙을 막으며 건국되었다. 인간의 왕이 된 오데르 황제는 죽은 후, 신좌에 올라 여섯 번째 신이 된다. 그 후, 신전에서는 신이 직접 신탁을 내리고 그것은 크고 작게 인간들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 하듄샤에 들게 되는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달랐다. 그래서 누군가가 가르쳐서, 부모나 누군가가 바라서 하듄샤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신이 존재하기에 그 목소리가 들려서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여 하듄샤에 든다.’ 말 그대로 신의 인도로 하듄샤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과연 신의 목소리를 들었는가? 그에 대해서는 하듄샤에 대대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비밀의 암구호가 있다고 한다. 오데르 황제는 자신이 죽은 후 신좌에 오르리라 말했고, 첫 번째 대신관이 되었던 사내에게 죽기 전 유언으로 암구호를 남겼다. 그것을 아는 이는 대대로 대신관뿐이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것이다. 신의 인도로 하듄샤에 도착한 아이는 한 명도 빠짐없이 대신관과 일대일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아이는 자신이 신에게 들은 암구호를 말해야 한다. 그것이 대신관이 알고 있는 그것과 일치해야 하듄샤에 들 수 있다. 어떤 때 하듄샤에 들기 위한 암구호가 이런 내용이다, 저런 내용이다 소문이 돌 때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헛소문으로 누군가는 하듄샤에 들고, 누군가는 떨어지는 것을 보면 암구호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인 듯했다. 그런 하듄샤에 일찍이 차기 대신관의 유력한 후보자로 낙점 받은 이가 있었으니, 하듄샤의 보석이라 불렸던 엘리시아 유테르였다. 엘리시아 유테르는 여러 방면에서 유명인사였다. 우선 명문가인 유테르 공작가의 외동딸이었고, 대단한 미인이었다. 하듄샤에는 신관으로 들어온 이들이 있고, 하듄샤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도의 후원회가 있었다. 엘리시아가 하듄샤에 든 것은 그녀가 세 살 때였다. 정식으로 수련을 마치고 신관이 된 후, 그녀가 봉헌하는 기도회마다 신도들이 미어터졌다. 멀리서라도 엘리시아를 한 번이라도 보겠다며 사심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시아의 미모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의 높은 신성 감응력이었다. 엘리시아의 기도를 들은 신도들은 각자 삶에서 지나쳤던 죄와 잘못을 되씹으며 눈물을 흘리며 통회했다. 호기심으로 엘리시아를 보러 왔다가 신실한 신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귀족 가문의 자제가 하듄샤에 드는 일은 좀체 없었다. 외동의 자식이 신전에 귀의하면 대가 끊겨버린다. 그러니 신의 목소리가 들리더라도 하듄샤에 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또,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반드시 신관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보통의 신도보다 조금 신실한 신앙으로 교리에 충실하게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공작가의 외동딸이 신전에 든 것 자체로도 화제였지만, 이후로도 여러모로 소문을 몰고 다닌 셈이었다. 로나는 하듄샤 안쪽에 위치한 성소에서 대신관을 기다렸다.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했다.

16550646000158.jpg“제가 엘리시아라고요?”

눈을 깜빡거리며 묻자마자 로나는 방금 질문을 취소하고 싶어졌다. 하듄샤가 대신전이라는 건 이해했다. 그러나 정문에서부터 여기까지 올 때까지 마주친 모든 이들이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을 치며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기뻐하거나 때로는 슬퍼했다. 마치 자신을 죽었다 살아온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제가 엘리시아라고요?’라고 말하자마자 모두 동시에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건 무슨 몰래카메라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렇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을 슬프게 하다니 자신이 악역이라도 맡은 것 같아 괜히 미안했다. 로나가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나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16550646000158.jpg“저, 음. 저는 엘리시아가 아니고 이만 돌아가 봐야 해요.”

그녀의 말에 이리스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16550646000172.jpg“어딜 가신다는 거예요! 여기가 아가씨가 계실 곳인데.”

그러니까 그건 자신이 엘리시아가 맞을 때의 일이 아닌가.

16550646000158.jpg“제가 엘리시아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 말에 로벤과 에쇼, 아까 이리스와 함께 마주쳤던 신관 형제가 난처한 기색을 했다.

16550646000184.jpg“네가 엘리시아가 맞다는 데에 내 신성력을 걸지.”

16550646000184.jpg“나도.”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일순 두 형제의 머리 뒤로 후광처럼 번쩍하고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로나는 깜짝 놀라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리스가 한심해하다가 난생 이런 광경을 처음 본다는 듯한 로나의 표정을 보고는 푹 한숨을 쉬었다.

16550646000172.jpg“정말 기억을 못 하셔.”

로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새 해가 지고 있었다.

16550646000158.jpg‘일레온이 걱정할 텐데.’

지금쯤이면 발작이 멎었을 것이다. 이 시간 즈음에 맞춰서 대공가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었는데 말이다.

16550646015193.jpg「초콜릿이 먹고 싶어. 카페 카르디날에서 팔던 거.」

  여태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초콜릿 봉투가 손에서 난 땀 때문에 눅눅해지고 있었다. 일레온이 먹고 싶다고 했는데.

16550646000158.jpg「빨리 갔다 올게요. 일레온 님.」

  빨리 사다주겠다고 했는데. 자신을 둘러싸고 버티고 선 이들이 쉽게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자신이 도망갈까 봐 방문까지 꼭 닫아두지 않았나.

16550646000158.jpg“그럼 오늘은 일단 돌아가고 내일이나 나중에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때요?”

로나의 말에 그들은 다시 한번 기가 막혀 어쩔 줄을 몰랐다.

16550646000172.jpg“어디로 돌아가시겠단 말이에요? 엘리시아 님이 계셔야 할 곳이 여기인데!”

이리스가 못 견디겠다는 듯 흥분해서 소리 지를 때였다. 타앙! 거칠게 문이 열리며 중년의 여인이 헐레벌떡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금빛 머리카락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그녀를 본 순간 로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여자의 외모는 매일 거울로 보는 자신의 얼굴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 여인은 로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덥썩 끌어안았다.

16550646029224.jpg“오, 얘야. 내 아가. 흐흑. 어떻게 네가…….”

머리와 얼굴, 몸을 두루 만지고 살피며 흐느끼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16550646000158.jpg‘내가 이 사람들이 찾는 엘리시아인가?’

여태 자신이 엘리시아가 아닐 수도 있지 않냐고 말했던 것과 달리 그 여인과는 어떤 유대감이 느껴졌다. 자신이 엘리시아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그 여인과 표정부터 생김새까지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로나는 한숨을 쉬었다. 로나는 기댈 곳도 없이, 동아줄은커녕 손에 잡히는 지푸라기 하나 없이 이세계에 빙의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일레온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이들은 로나 자신을 쉽게 보내줄 마음이 없어 보였고, 멀리 보면 가족이나 누군가를 찾은 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쪽이었다.

16550646000158.jpg“제가 엘리시아라는 증거가 있을까요?”

  *** 일레온을 괴롭히던 고통이 잦아들었다.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며 힘들어하던 그는 숨을 골랐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가 겪는 고통은 그 자체로 살아 있거나, 자아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일레온의 눈을 갉아 먹고 있는데 자신을 퇴치할 치료법이 느껴지면 사납게 발악하는 것만 같았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눈을 낫게 하려고 뭔가 할 때마다 아플 수가 있냔 말이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렇게 길게 아팠던 적이 없었기에 그도 조금은 초조했다. 언제 로나의 앞에서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게 되지나 않을까. 그가 아파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약을 잘못 만든 것 같다고 자책하는 로나였다. 일레온이 아파서 죽고 싶다고 하면 자신보다 로나가 더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50646029236.jpg“좀 어떠십니까.”

집사 베르나르가 물었다.

16550646015193.jpg“목이 말라.”

베르나르가 익숙하게 주둥이가 짧은 자그마한 주전자를 가져와 그의 입에 대주었다. 한참 물을 마신 일레온이 한숨을 쉬자 베르나르가 물었다.

16550646029236.jpg“이상합니다. 이렇게 오래 아프신 적이 없으셨는데 말입니다.”

16550646015193.jpg“그래서 그런가. 이게 이제까지 찾던 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살아 있는 고통이 잠깐이 아니라 수일 동안 집요하게 날뛰게 만드는 약차. 약의 기운이 떨어지면, 치료를 포기하면 통증은 잦아든다. 그런데 한 번 먹었기로서니 엿새를 시달리다 보니 평소와 다른 그런 차이에 집중하게 된다. 호흡을 가다듬은 일레온이 물었다.

16550646015193.jpg“로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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