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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돌아갈 수는 없어 (19/151)

19. 돌아갈 수는 없어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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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46105689.jpg“로나는?”

그 말에 집사가 난처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16550646105689.jpg“로나는 어디 있지?”

16550646105702.jpg“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일레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16550646105689.jpg“일부러 어딘가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처음에는 집안일을 하라고 내려보내면 아무 의심 없이 고용주인 제가 시키는 일을 하러 가던 그녀가 어느 때부터인가 조금씩 늦다가 그의 발작이 멈추면 그제야 들어온다.

16550646105689.jpg“카페 카르디날로 마중을 보내. 둘, 셋쯤. 혹시 카페에 없으면 주변을 좀 찾아보고.”

16550646105702.jpg“네. 그러겠습니다.”

카페 카르디날은 대공저에서 고작 걸어서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다. 호위를 보내기엔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었으나, 집사가 주인의 명을 거역할 이유는 없었다. 베르나르가 호위 기사를 부르러 방 밖으로 사라지자 일레온은 긴 한숨을 쉬었다. 고독하다. 세상 풍파로부터 자신을 완벽하게 유리할 저택의 아늑한 침대 위에서, 그는 모진 고통 속에 홀로 내던져져 있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쓸쓸함인가. 눈을 떴을 때 그런 마음을 달래주던 로나가 무척 고팠다. 제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걸 보면 슬퍼할까봐 떼어놓고 싶지만, 발작이 끝났을 때는 울먹이며 자신을 가엽게 여기는 손길을 느끼고 싶었다. 참으로 이중적인 마음이 아닐 수 없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누군가 자신을 동정하거나 불쌍하게 여긴다면 모욕이라 여겼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달랐다. 그런 감정이야말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했다. 어느 때부턴가 로나가 제게 메이드로서 완벽하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조금 더 다가가고 싶고, 닿고 싶다. 로나를 생각하면 정의하기 힘든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꼈고 그것은 정신적 허기에 가까웠다. 일레온은 자신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거칠고 터진 입술에서 비릿한 피맛이 올라왔다. 아마 눈뜨고 봐줄만한 몰골이 아닐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나 그녀라면 부드러운 입술로 다정하게 물을 입에 머금고 제게 대어주리라 믿었다. 힘들어하지는 말라고 밖으로 내보내놓고, 이렇게 의식이 돌아왔을 땐 당장 그의 곁에 있어줬으면 했다.

16550646105689.jpg“로나가 무슨 시계추도 아니고.”

그가 제정신인 상태인지 발작으로 정신이 날아갔는지 알 게 무어란 말인가. 그러면서도 로나의 공백에 자꾸만 초조한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화르륵. 일레온은 제 안구에 불길이 솟는 것을 느꼈다.

16550646105689.jpg“으아아아!”

발작이 멈추었다고 방심한 순간에 느낀 고통은 허를 찌른 만큼 더 끔찍했다. 게다가 이런 통증이 밀려온 건 처음이었다.

16550646105689.jpg“베르나르! 베르나르! 아아…….”

일레온의 신음소리에 베르나르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16550646105702.jpg“대공 전하! 괜찮으십니까!”

16550646105689.jpg“눈이…… 눈에 불이 붙었나?”

16550646105702.jpg“그,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집사의 당황한 목소리를 들으며 일레온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눈알이 타오르는 불길에 양초처럼 녹아 눈 밖으로 흘러내리는 감각이 선연했다.

16550646105689.jpg“그럴 리가 없다. 눈알이 녹아서 흐르고 있잖아.”

16550646105702.jpg“전하. 전하. 아닙니다.”

집사가 울먹였다.

16550646105702.jpg“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16550646105689.jpg“흐윽.”

일레온이 고통스러워하자 집사가 울음을 삼키며 그의 입에 수건을 물렸다. 그렇게 또다시 긴 발작이 시작되었다. *** 안쪽의 좀 더 은밀한 방으로 이동한 로나는 눈을 깜빡였다. 유테르 공작부인과 이리스 둘만 그녀와 함께 방에 남았다. 두 개의 커다란 거울을 이용하여 로나는 그녀의 등 뒤를 보았다. 등과 어깨를 드러낸 속옷 위로 왼쪽 날개뼈 근처에 이제까지 있는 줄도 몰랐던 희한한 반점이 있었다. 다섯 개의 원이 꽃잎처럼 원형으로 늘어서 있고 중앙에 작은 오각형이 붉은빛으로 그려져 있었다.

16550646134936.jpg“이게 뭐죠? 문신인가요?”

로나의 물음에 이리스가 로브를 벗고 제 등을 보여주었다.

16550646134936.jpg“앗!”

제 몸에 있는 것과 꼭 같은 것이 그녀의 등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색은 좀 더 짙어서 로나의 몸에 있는 핑크색 문양과 달리 좀 더 붉은색에 가까웠다.

16550646134945.jpg“반흔이에요.”

이리스는 다시 로브를 뒤집어썼다.

16550646134945.jpg“신관의 증표이지요. 신의 종이 되었다는 뜻으로 심장과 가까운 곳에 나타난답니다. 대부분 등에 표식이 나타나요.”

16550646134936.jpg“나타난다고?”

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46134945.jpg“정말 기억을 하나도 못 하세요?”

이번에는 로나가 고개를 끄덕일 차례였다.

16550646134945.jpg“수련을 마치고 정식 신관이 될 때 신이 직접 새겨준답니다.”

16550646134936.jpg“신이 새겨준다고?”

16550646134945.jpg“네. 의식을 마치고 나면 저절로 나타나거든요.”

16550646134936.jpg“헤에.”

그저 신기했다. 이제야 좀 소설 속이네 싶다. 이제까지 일레온이랑 집에만 있다 보니 이런 설정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스스로 몸을 씻으면서 벗은 몸을 거울에 구석구석 비춰보는 그런 일은 하지 않으니까. 빙의하고 1년 정도 되었지만 이런 게 제 몸에 있는 줄 처음 알았다. 하지만 유테르 공작부인과 이리스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엘리시아임에 분명한 자신을 안타까워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16550646134936.jpg‘그럼 원래의 엘리시아는 죽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자신이 이곳에 빙의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계속 엘리시아가 신관이라고 얘기하는데, 자신은 신의 목소리 같은 건 전혀 들리지 않았다.

16550646134936.jpg“저어, 이리스.”

로나가 이름을 부르자 시무룩하던 이리스가 반색했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면서도 그녀가 이름을 불러주는 게 기쁜 듯했다.

16550646134936.jpg“신관이면 당신도 신의 목소리를 듣는 거예요?”

16550646134945.jpg“네. 당연하잖아요. 애초에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하듄샤에 올 수 없는 걸요.”

16550646134936.jpg“아아. 그런데 어쩌지. 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걸요.”

그 말에 이리스와 유테르 공작부인이 복잡한 시선을 교환했다.

16550646134936.jpg“그리고 제가 엘리시아인데 어떻게 된 거죠? 왜 기억을 잃고 그런 곳에 있었던 거죠?”

로나는 그들에게 자신이 눈을 뜬 곳이 로렐 호수의 호숫가였다고, 물에 빠져 죽어가다가 숲지기 부부에게 발견이 되었다고 말했다. 로렐 호수에서 정신이 들었다는 말에 두 사람은 기함했다.

16550646134945.jpg“로렐 호수라니 말도 안 돼요.”

16550646134936.jpg“어째서요?”

그들의 말에 따르면 엘리시아는 안식년을 위해 그레로사에 향하던 중 사라졌다고 했다. 그레로사는 신도들에게 기도회로 오래 봉사한 신관들이 신과 교감하며 정신을 치유하며 쉬기 위해 가는 곳이다. 엘리시아는 마차를 타고 그레로사로 가는 도중 습격을 받았다. 호위들은 몰살당하고 함께 떠났던 신관들도 모두 살해당했다고 한다. 로나는 그 사실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엘리시아가 겪은 일이다. 여러 증거로 자신이 엘리시아의 몸에 빙의한 걸 확인하고 나자 원윤지와 무관한 일일 수가 없었다.

16550646134936.jpg‘그건 그렇고 <눈먼 짐승의 꽃>에 이런 내용이 있었나.’

완전히 생소한 내용이었다. 대신전이나 신탁에 대한 얘기를 본 기억이 없다. 뒤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16550646134945.jpg“로렐 호수는 아가씨께서 사라진 곳에서 마차로 꼬박 일주일은 달려야 갈 수 있는 곳인 걸요.”

게다가 그곳은 험난한 협곡이 있어 길도 거칠다고 했다. 대충 엘리시아가 실종된 시기와 로나가 호수에서 정신을 차려 도시로, 수도로 이동하고 대공저에서 일하게 될 때까지 날짜를 따져보면 로렐 호수에서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엘리시아가 실종되고 하루에서 이틀 후인 듯했다.

16550646134936.jpg“그럼 제가 엘리시아가 아닌 거 아니고요?”

한 바퀴 돌아온 로나의 질문에 이리스가 발끈했다.

16550646134945.jpg“방금 전에 반흔이 있는 거 보셨잖아요. 신성한 신의 증표를 보시고도 그런 말씀을.”

그러니까 그 신성한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게 문제였다. 전혀 안 들리는걸.

16550646134936.jpg“어쨌든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돌아가지 않으면 걱정할 거예요.”

로나의 말에 유테르 공작부인과 이리스의 얼굴이 동시에 괴상해졌다. 유테르 공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16550646199722.jpg“그러고 보니 그동안 어디에 머물고 있었니? 사람을 풀어 전 제국을 뒤졌어. 도대체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가 없어서 사람들은 네가 협곡의 물살에 갈가리 찢겨 죽었을 거라 했단다.”

그녀가 눈시울을 붉혔다.

16550646134936.jpg“그게 그동안에는 클레벤트 대공가에서 메이드로 일하고 있었어요.”

16550646199722.jpg“뭐라고?”

16550646134945.jpg“뭐라고요?”

또 한 번 두 사람이 동시에 놀라는 걸 보면서 로나는 자신이 폭탄이라도 된 것처럼 느꼈다.

16550646134936.jpg“일레온 님의 시중을 들고 있었어요. 돈도 많이 벌었고요.”

16550646199722.jpg“오, 제발. 얘야.”

유테르 공작부인은 어지러운 듯 머리에 손을 짚었다.

16550646134936.jpg“오늘은 잠깐 대공 전하의 심부름을 나온 참이었거든요.”

16550646199722.jpg“네가 직접 클레벤트 대공의 시중을 들었단 말이니?”

16550646134936.jpg“네.”

엘리시아의 어머니일 그녀의 말에 로나는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지금 로나에게는 정보가 절대로 부족했다. 뭔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16550646199722.jpg“설마 너 클레벤트 대공과…….”

16550646134936.jpg“……아니에요.”

그에게는 예정된 운명의 상대가 있었다.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말이다. 몇 번인가 일레온의 침대에서 눈을 뜬 적이 있었지만 공작부인이 묻는 그런 일은 절대 아니었다. 로나의 부정에 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46134945.jpg“순결하지 않다면 반흔은 사라지는 걸요.”

16550646199722.jpg“그렇지. 참.”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로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들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16550646199722.jpg“어쨌든, 넌 로나 해라팰리스가 아니라 엘리시아 유테르란다.”

16550646134945.jpg“맞습니다. 맞습니다.”

유테르 공작부인의 말에 이리스가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16550646199722.jpg“지금 이 순간부터 넌 대공가에는 절대로 가선 안 돼.”

16550646134936.jpg“네?”

유테르 공작부인이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16550646199722.jpg“대공가로 돌아갈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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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사 베르나르는 죽을 맛이었다. 주군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여태껏 그가 발작을 일으킬 때 느낀 고통은 몇 가지로 종류가 나누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일레온이 정신병적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눈에 불이 붙어 타고 있다고, 눈알이 녹아서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다고 말이다. 제 고통을 그렇게 묘사하는 일레온의 처지가 안타까우면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발작이 지속되었던 적이 없었기에 드디어 고통이 과해 미쳐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16550646105702.jpg‘대공 전하의 정신력이 그렇게 약하지 않다고 여겼지만.’

누구라도 진작 돌아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고통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집사 자신이 미쳐버릴 것 같다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일레온의 비참한 신음소리가 멈추고도 베르나르는 어쩐지 귓가에 그 소리가 계속 남아 환청이 들렸다. 그가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침실 안이 잠잠해지고도 한참 동안 시간이 지나도록 선뜻 일레온의 침실에 발을 들이기가 두려웠다. 게다가 로나를 찾지 못했다. 발작 전에 대공의 명으로 심부름을 보냈던 호위들이 근처를 돌아다녀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왔다. 요 며칠 집사는 제 주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여태 반년 동안 로나도 일레온도 서로 고용주와 고용인으로 적절한 선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요 며칠은 둘 사이에 뭔가 선이 뭉개진 듯 보였다. 무려 제 주인이 그녀로부터 입으로 물을 받아먹는 걸 보고 만 것이다. 그것에 대해 로나에게 슬쩍 떠보았더니 그녀는 순진하게 대답했다.

16550646134936.jpg「집사님께서도 그리하신다기에.」

  베르나르는 황당했다. 충직한 가신인 자신을 팔아가며 로나를 꾀어내는 일레온이, 단정한 그가 그런 짓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정말 미친 건가 싶은 정도였다. 그 와중에 로나를 찾지 못한 게 가시처럼 불편하게 유능한 베르나르의 목에 걸렸다. 달칵.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 일레온이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16550646105689.jpg“풀어.”

그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붉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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