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파문2022.03.12.
“풀어.”
집사가 놀란 얼굴을 한 채 다가왔다. 베르나르의 반신반의하는 얼굴이 보였다. 보였다. 몇 년 만에 앞이 보이는 건 머리에 상당한 쇼크를 가져오는지 일레온은 조금 어지러웠다.
“저, 전하.”
베르나르의 목소리가 떨렸다. 일레온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잘라도 좋고.”
재촉하는 말에 그제야 베르나르가 허둥지둥 가위를 가져다 침대에 묶어둔 천을 잘랐다. 툭. 툭툭. 팔 하나, 둘, 다리 하나, 둘. 자해하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당겨 묶어놓았던 몸이 천이 하나 끊어질 때마다 피가 돌며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레온은 핏자국과 멍투성이로 엉망이 된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겉보기와 달리 크게 아픈 건 아니었다. 그는 오래 단련된 기사였고, 이런 상처쯤은 별일 아니었다. 게다가 오데르의 피가 내린 특성 중에는 강인한 육체와 빠른 회복이 있었다. 약을 바르지 않아도 며칠 내에 말끔해질 것이다. 일레온은 스스로 손을 움직여 몸에 묶인 천의 매듭을 괴력으로 뜯어냈다. 눈이 보이자 거칠 것이 없었다. 더듬지 않고, 손끝에 신경을 집중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 일레온을 바라보며 전율을 느낀 듯 몸을 떨던 베르나르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울부짖듯이 외쳤다.
“대공 전하! 전하! 감축드립니다.”
흐느끼는 소리에 지난 삼 년 동안 그가 겪었을 무거운 부담이 느껴져 일레온은 그를 일으키고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내가 모자란 시간 동안 자네 덕을 봤군.”
“아닙니다. 그런 말씀을.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일레온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바로 섰다. 눈이 보이지 않은 후로 그는 몸을 조금 구부정하게 접고 다녀야 했다. 손으로, 지팡이로 어딘가를 인식해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이 보여 자연스럽게 일어선 신체는 어딘가 그를 조금 부풀리기라도 한 듯, 눈이 멀었을 때보다 커 보였다. 그것을 보고 집사는 남자의 자존심도 잊고 또 한 번 눈물을 글썽였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에게 일레온이 물었다.
“그런데 로나는? 로나는 어디 있지?”
*** 제국의 수도 콘스탄스 에비뇽. 하듄샤가 위치한 곳은 수도 중앙에 위치한 황궁의 북쪽 별관이었다. 수령을 알 수 없는 커다란 나무숲에 둘러싸인 흰 석조 건물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평소에 기도회가 열리는 시간을 제외하고 새소리와 정원을 흐르는 인공 폭포의 물소리나 들릴 관조의 공간이 오늘은 조금 소란스러웠다. 엘리시아의 실종 이후 사건 진상 조사차 그레로사로 향했다가, 그대로 그곳에서 정양하고 있던 대신관이 하둔샤로 돌아온 것이다.
“저분이 대신관이신 알레한드로 님이세요.”
이리스가 알려주어 로나는 그를 보았다. 대신관은 흰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한 중년의 남자였다. 매끈한 피부와 아직 예기 어린 눈빛으로 얼굴만 보면 꽤 젊어 보이는 느낌이나 머리가 할아버지처럼 새하얗게 세어 있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허리를 구부려 인사하는 로나를 보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몸에 밴 듯 그림처럼 앞으로 숙이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하길.”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하길.”
자연스럽게 맞인사를 하는 이리스와 유테르 공작부인을 보며 로나는 낙동강 오리알이 된 기분을 느꼈다. 그들의 세계에서 혼자만 겉도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기억에 없는 걸 억지로 따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사의 기본조차 잊은 걸 보면 정말로 저를 기억하지 못하나 봅니다.”
대신관 알레한드로는 조곤조곤 존댓말을 썼다. 그 말투가 어찌나 예의 바르고 지적인지 절로 숙연하고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속이거나 잘못한 일이 있으면 전부 고해바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바로 대신관의 위엄인가? 어쨌든 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렐 호수에서 발견되었을 때, 숲지기 분들은 제가 죽은 줄 알았다고 했어요.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전의 기억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고요.”
“아무것도라는 건 어느 정도의 기억이 없다는 겁니까?”
“모든 기억이 없습니다.”
로나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녀를 살펴본 알레한드로가 다시 물었다.
“머리카락은 어떻게 된 겁니까?”
“머리카락이요?”
알레한드로는 이리스를 쳐다보았다. 이리스가 얼른 그녀를 대신하여 대답하였다.
“길이로 보아서는 잘린 것 같습니다.”
“머리카락이 왜요?”
로나가 묻자 이리스가 얼른 설명해주었다.
“신관이 머리카락 끝을 흰색으로 탈색하는 건, 깨끗한 마음으로 한 점 거짓 없는 신의 입이 되겠다는 뜻이에요.”
로나는 웨이브를 따라 물결치는 금빛 머리카락을 보았다. 꽤 긴 머리는 처음부터 이 상태였는데 아마 엘리시아도 이 머리카락의 끝을 저들처럼 희게 탈색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것 참 곤란하군요.”
알레한드로가 재차 물었다.
“혹시 지금 신의 목소리가 들립니까?”
“아니요.”
“반흔은 있는데 부름이 들리지 않는다.”
알레한드로가 혼잣말을 하듯 말하자 유테르 공작부인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어찌해야 합니까?”
“기억을 잃었더라도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면 엘리시아는 얼마든지 하듄샤로 돌아왔을 겁니다. 기억을 잃었지만 자신이 신의 종이라는 걸 알았을 테지요.”
알레한드로가 다시 로나에게 물었다.
“암구호를 기억합니까?”
로나는 지난 며칠간 하듄샤에 머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의 신관들은 신의 목소리를 들은 자들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신이 직접 말해주는 어떤 암구호를 듣고 하듄샤에 오게 된다고. 암구호가 무엇인지는 비밀에 부쳐진다고 한다. 그런데 엘리시아가 대신관을 만나 암구호를 말하고 하듄샤에 들어온 게 고작 그녀 나이 3살 때였다는 것이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암구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신관의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잠깐만요.”
알레한드로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유테르 공작부인이 조금 창백해졌다.
“이 아이는…… 대신관이 될 아이였습니다.”
“그랬지만 지금은 신이 은총을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알레한드로는 이런 일은 역대 처음이라며 곤란해했다.
“반흔이 있지 않습니까. 아직 신은 엘리시아에게서 입을 거두어가시지 않은 겁니다.”
“엘리시아는 파문될 겁니다.”
대신관의 말에 유테르 공작부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이 굉장히 두려운 일을 앞둔 사람처럼 보여서 로나는 신경이 쓰였다.
‘대신관이 그렇게 영예로운 직업인 걸까?’
성직자의 길은 보통 고되고 힘든 길이 아니던가. 금욕적이고 도덕적이고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어쨌든 유테르 공작부인은 ‘엘리시아’가 하듄샤에서 파문당하는 걸 무슨 사형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엘리시아의 나이는 갓 스무 살이라고 했다. 그리고 일찍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탓에 유테르 공작부인도 서른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 둘 다 어리고, 너무 젊지 않은가? 그런데 고작 직업이 바뀌게 되는 것뿐인 걸 두고 세상 무너진 얼굴을 하니 로나는 기억이 사라진 자신이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안 됩니다. 제발 다시 한번만 생각해주십시오. 알레한드로 님. 엘리시아는 반드시 하듄샤에 있어야 할 아이입니다.”
아름답고 가녀린 공작부인이 간절히 호소하는 모습은 동정과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하지만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알레한드로 역시 대신관다운 면모였다.
“엘리시아를 파문하는 건, 성소에서 결정할 일입니다.”
“아아.”
낙심한 유테르 공작부인은 결국 그림처럼 또르륵 눈물을 흘렸다.
“유테르 공작가에서 하듄샤에 기부한 재산은 원하신다면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다섯 주신과 오데르께 바친 성의입니다. 돌려받겠다니 말도 안 됩니다.”
유테르 공작부인은 눈물을 닦고 일어나 알레한드로를 보았다.
“그럼 이것 하나만 약속해주시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만약 엘리시아가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파문을 철회하여 주세요.”
그 말에 정적이 흘렀다.
“공작부인께 아뢰기 외람되오나 그 또한 성소에서 결정할 일입니다.”
알레한드로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반흔을 지닌 채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일이 처음인 것처럼 다시 신의 부름을 듣게 되는 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흐르는 대로, 다섯 주신과 오데르께서 원하시는 바를 깨달을 때까지 기다릴 뿐이지요.”
유테르 공작부인은 ‘안 된다’는 단호한 거절이 아니라는 것에 위안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 엘리시아는 파문이다. 엘리시아 유테르는 오늘부로 하둔샤를 떠나도록 한다.”
알레한드로가 선언하듯 말하자 유테르 공작부인은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았다.
공작가의 마차는 굉장히 안락하고 쾌적했다. 넓고 푹신하게 만들어진 내부에 돌바닥을 달려도 크게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공가의 마차와 큰 차이가 없는 듯했다. 하지만 공작저로 돌아가는 내내 유테르 공작부인은 대단히 낙심한 듯 슬픈 얼굴이었다. 로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껏 서울대 보내놓은 자식이 창업한다고 학교를 그만둘 때 사교육에 올인한 부모가 저런 심정일까.’
최대한 유테르 공작부인의 마음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애가 학교를 열심히 다닐 줄 알고 거액을 기부해서 학관 앞에 잔디라도 깔았다면 더더욱. 가슴 아파하고 시름 하는 유테르 공작부인을 보며 로나는 잘못한 것도 없이 죄책감을 느꼈다.
‘진짜 엘리시아의 영혼은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너무나도 비통해 하는 공작부인을 보니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 사라진 엘리시아를 제가 데려올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로나 역시 어떤 이유로 제가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니 공작부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로나는 유테르 공작부인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고 싶었다.
“어머니.”
그렇게 부르자 유테르 공작부인은 눈을 크게 떴다.
“기억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로나는 감정을 배제하고 담담하게 말하려 했다.
“그래도 저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저 자신이잖아요.”
“엘리시아.”
“잊어버린 시간들을 채울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가르쳐주시면 무엇이든 열심히 배울게요.”
“아아, 엘리시아.”
유테르 공작부인은 그녀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내 아가. 사랑하는 내 아기. 엄마가, 엄마만 믿으렴.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로나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난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김 여사 밥은 잘 먹고 있을까? 울 엄마 은근 스트레스에 약한데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문득 현실에서의 처지는 어떨지 생각했지만, 곧 관두었다. 제 의식이 살아가는 이 세계가 이제는 그녀에게 진짜였다. 마차가 공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유테르 공작부인은 로나를 꼭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 일레온은 제 방을 구석구석 살폈다. 대공가를 떠나 기숙사제인 기사 사관학교에 들어갔던 열세 살 때였다. 열여섯에 졸업하자마자 기사단장이 되었고, 그대로 전쟁터로 떠나 칠 년을 떠돌았다. 눈을 다친 채 집으로 돌아온 게 스물셋, 거기서 이 년의 시간이 흘러 이제 스물 다섯의 청년이 되었다. 그러니 이 집에 돌아온 것만 해도 무려 십 년 만이었다, 이 방에서 지낸 세월이 무색하게 눈을 뜨면 처음 온 곳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눈을 감으면 편안하고 익숙했다.
“적응해야지.”
그 간극은 빠르게 메워질 것이다. 아마도.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대공 전하. 부르셨습니까?”
“외출을 좀 해야겠어.”
“어디로 가십니까. 마차를 준비할까요?”
“아니. 됐다. 걸어서 다녀올 테니.”
카페 카르디날에 갈 생각이었다. 로나가 사라진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