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거짓말을 했군2022.03.16.
카페 카르디날은 대공저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정말 가까웠군.”
재잘거리는 로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둘이 함께 차를 마셨던 카페를 향해 일레온은 혼자 걸었다. 수도의 거리는 낯설었다. 이런 식으로 걸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가끔 마차를 이용하고 대부분 말을 탔기 때문이다. 높이가 다르면 보이는 시야도 다르다.
“넌 늘 이런 광경을 보고 있었나.”
일레온은 거리의 풍경을 감상했다. 말을 타면 달려야 하는 길에 집중하게 된다. 고삐를 능수능란하게 당기면 조금씩 말의 시야를 틀고 길들여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달리게 한다. 몸에 밴 일이지만 빠르게 지나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 행위이다. 대공저 인근이라는 이곳의 풍경조차 여러 번 지났을 텐데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생경했다. 보폭이 넓은 그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로나가 오가며 봤던 풍경을 자신도 보고 싶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동안, 로나가 설명해주는 것으로 대신 구경한 세상을 제 눈으로도 확인하고 싶었다. 카페 카르디날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커피와 초콜릿을 주문했다. 깔끔한 흰색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이 그의 앞에 주문한 것들을 내려놓다가 손을 떨어 커피를 조금 쏟았다.
“죄송합니다.”
여자가 굽신거리며 튄 커피를 닦았다. 테이블에 튄 자국을 문지르는 손이 점점 느려졌다. 지척에서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붉은 눈을 지나 오뚝한 콧날과 보기 좋은 입술까지 종업원은 꼼꼼히도 훑어보았다. 홀린 듯이 일레온을 훔쳐보는 눈동자에는 경의와 놀라움이 담겼다. 일레온은 개의치 않고 그녀를 쫓았다.
“괜찮으니 가주게.”
“네. 죄송합니다.”
행주를 쥐고 물러나는 종업원 미적거리는 태도에 미련이 가득했다. 곧 한 구석에 가슴에 손을 얹고 있던 여자 종업원 둘과 일레온 쪽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흠.”
일상이었다. 그를 볼 때마다 저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는 여자들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별로 여자에 흥미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저런 행동에 어떻게 맞장구를 쳐줘야 한단 말인가. 똑같이 얼굴을 붉히고 꺄 하는 소리를 내며 모둠발로 뛰어줄 수도 없고 말이다. 로나와는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그녀는 제게 사심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그녀가 편해졌고, 그다음에는 그가 사심이 생겼다. 일레온은 카페 카르디날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대공저의 정원용 테이블과 비슷하다던 나무 티테이블에는 나무 조각의 이음매에 꼬질꼬질한 때가 껴 있었다. 소독제를 탄 물에 담가서 빨고 또 빨았을 냅킨은 하얗게 탈색되어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고 뻣뻣했다.
「차양은 파란색이에요. 그 아래에도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어요. 오늘 하늘이 파랗고 맑아서 차양에 비친 햇빛이 아주 예뻐요.」
차양은 망가져서 수리를 할 참인지 펼쳐져 있지도 않았다. 일레온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거짓말을 했군.”
이곳에서 가장 예쁜 것을 꼽으라면 그의 기억 속에 남은 로나의 목소리일 것이다.
톡. 톡. 톡. 일레온은 의미 없이 사각형의 트러플 초콜릿을 이리저리 굴리며 잠시 그대로 머물렀다. 이윽고 계산대의 카페 주인에게 다가간 일레온이 그에게 물었다.
“사흘 전, 여기서 초콜릿을 포장해 간 손님을 찾고 있는데.”
“초콜릿은 저희 가게 명물입니다. 선물로도 인기라 포장하시는 손님이 많지요.”
“그래도 외모가 좀 눈에 띄는 여자다. 빨간 머리카락에 파란 눈에 피부가 까만 편인데, 얼굴이 아주 작아. 한 이 정도.”
일레온이 커다란 손으로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그걸 멀뚱히 보던 카페 주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분이라면 기억할 법도 한데, 빨간 머리에 파란 눈을 한 손님은 딱히 기억이……. 죄송합니다. 워낙 드나드는 손님이 많으셔서 말이지요.”
“그래?”
일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받게.”
“아이고, 아닙니다.”
그는 사양하는 카페 카르디날의 주인에게 금화 한 닢을 던져주고는 번잡한 상업지구의 포장도로를 따라 발을 내딛었다.
“너무 늦게 왔나.”
2년 반 만에 눈이 보였다. 로나를 찾으러 당장 뛰쳐나가려는 그를 말린 건 집사 베르나르였다. 긴 시간 동안 빛을 인지하지 않은 눈이 갑자기 빛을 보면 상할 거란 말이었다.
「로, 로나 양이 나중에라도 전하께서 자신을 찾으러 나갔다가 눈이 나빠진 걸 알게 되면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영악한 집사. 그 말 한마디에 일레온은 얌전히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후로 여러 의사들을 데려다 그를 진찰하고 눈에 아무런 이상이 없고 외출해도 문제가 없다는 확답을 고루 들은 후에야, 일레온은 대공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세드릭.”
“네. 대공 전하.”
일레온의 등 뒤로 그의 오른팔인 부관이 나타났다.
“심부름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네.”
꽤 먼 곳까지 그의 약을 찾으러 떠돌았다는 세드릭은, 대공 전하께서 시력을 되찾으셨다는 집사의 편지 한 통에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이틀 넘게 말을 갈아타며 대공저로 돌아왔다. 마지막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모습보다 더 단단한 칼이 된 사내가 무표정하게 일레온의 발길을 수도 뒷골목으로 안내했다. 곧 건물 사이의 막다른 길에 도착하자, 세드릭은 막힌 길의 벽에 노크를 했다. 똑똑똑. 세 번 두드리자, 널빤지로 된 벽의 일부가 문처럼 열렸다.
“들어오슈.”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그들을 반대편의 좁은 골목 안쪽으로 안내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사람을 찾고 싶다.”
“흐흠. 수도 내에서라면 100골, 그 밖의 지역까지 뒤지러 가면 아무래도 거리 가산요금이 있는데…….”
일레온은 유들거리는 사내의 앞에 묵직한 주머니를 내놓았다.
“1000골이다.”
“히익!”
허겁지겁 주머니를 열어본 사내의 태도가 공손하게 바뀌었다.
“찾는 분은 누구십니까?”
“여자다. 이름은 로나 해라팰리스. 나이는 스물일곱. 외모는 빨간 머리카락에 파란 눈, 까무잡잡한 피부에 얼굴이 작고 키는 이 정도.”
“헤에. 집 나간 마누라는 아니시지요?”
“그게 중요한가?”
“저희 길드가 사람을 찾아드릴 수는 있지만, 돌아오지 않겠다는 분을 억지로 끌고 오지는 않는답니다.”
“아니다.”
일레온이 즉각 부정했다. 집을 나간 건 맞지만 마누라는 ‘아직’ 아니었다.
“예에. 그러시다면야 별문제 없을 겁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보지요. 이런 거금을 선불로 주시다니 열과 성의를 다하겠습니다.”
일레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계약금이다.”
“허억!”
들어갈 때와 달리 나올 때는 본부에 남아있는 길드원들이 모두 나와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했다.
“세드릭. 자넨 따로 해야 할 일이 있겠지.”
“무엇이든 분부만 하십시오.”
번화가의 인파는 번잡해서, 눈에 띄던 두 사내의 모습도 곧 사라졌다. *** 와장창. 흥분한 사비엘이 부관에게 포도와 치즈가 보기 좋게 담겨 있던 은쟁반을 집어던졌다.
“뭐라고? 로나 그 여자가 사라졌다고?”
“예, 예. 그, 그렇습니다. 황태자 전하.”
“하.”
사비엘은 분한 마음에 마시던 술이 든 잔과 등 뒤에 받치고 있던 쿠션도 그에게 마저 던졌다.
“정보를 그쪽에 흘리기라도 했나?”
그의 말에 부관은 기겁하며 바닥에 머리를 대었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어디로 왜 사라져?”
“애초에 대공가의 저택에서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밤에 암행조를 데리고 그 여인을 모시러 갔는데…….”
부관은 야간에 납치하려 했다는 말을 에둘러 잘도 설명했다.
“대공저는 머무는 이가 적어 경비가 무척 허술합니다. 미리 확인해놓았던지라 늦은 밤 3층에 여자 메이드들이 머무는 공간을 뒤졌으나 없었습니다.”
“일레온 그 자식의 침실에 머물 것 아니냐.”
그렇고 그런 시중을 든다면 말이다.
“대공께서 품는 여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저택에 간자를 넣을 수 없다더니 어찌 알았느냐.”
“대공이 독으로 눈을 잃은 후 의심이 많아 농장을 직접 사들여 식재료를 조달한답니다. 그 농장 주인을 매수해서 저택에서 나오는 심부름꾼을 떠보았는데, 식사 시중과 청소, 말 상대를 할 뿐 대공의 방에서 밤을 보내는 여인이 아니라더군요.”
“흠.”
사비엘의 관점에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이도 아닌 여자에게 옷 한 벌 값이 수도의 자그마한 주택 일 년 치 월세는 될법한 옷을 그렇게나 사준단 말인가. 게다가 귀족도 아닌 평민, 애인이나 친구도 아닌 고작 고용한 메이드에게 말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제가 그녀가 있는 공간을 열어젖히려 할 때 일레온은 제 팔목을 낚아채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어린 노기와 독점욕. 그건 제 여자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암묵적인 반응 아닌가. 어찌나 그 눈빛이 생생하던지 저도 모르게 눈이 보이냐고 묻기까지 했었다. 게다가 어찌나 세게 잡혔는지 팔목이 금이 간 것처럼 며칠이나 욱신욱신했다.
“로나 그 여자 찾아와.”
사비엘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일레온이 손도 대지 못한 거라면 더더욱 내가 먼저 차지해야겠지.”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찾은 것처럼 희색이 도는 사비엘을 보며 부관은 입을 꾹 다물었다. *** 유테르 공작가에 온 지 사흘이 흘렀다. 그 사이 로나는 제법 바쁘게 지냈다. 마리엘라 유테르. 유테르 공작부인은 아름답고 현숙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남편인 유테르 공작과 매우 사이 좋은 잉꼬부부였다. 서로 아끼고 다정한 부부는 예의바르고 성품이 반듯한 이들이었다. 덕분에 공작가 저택의 분위기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훈훈했다.
“엘리시아. 좋은 아침이구나.”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버지.”
유테르 공작, 질리언은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을 한 지적인 남자였다. 다수의 제국 역사서를 편찬했다는 그는 학자의 풍모를 풍겼는데, 특히 안경이 매우 잘 어울렸다. 로나는 제국에서 안경이 가장 잘 어울리는 미남에 아버지인 질리언을 뽑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어제는 잘 잤니?”
“네. 어머니께서는요?”
“후후. 늘 그렇지 뭐. 식겠다. 얼른 들렴.”
그들은 함께 아침을 먹었다. 한가지 로나가 의아한 건, 마리엘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가 하듄샤에서 파문당한 걸 그리 큰일처럼 여기지 않는다는 거였다.
‘치맛바람이었을까?’
엘리시아가 하듄샤에 가게 된 게 마리엘라의 의지가 영향을 준 일이었나. 마리엘라는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내내 자신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지다. 그 이후로는 밝고 긍정적인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그 밖에 질리언과 공작저 고용인들은 엘리시아의 귀환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오늘부터 선생을 몇 분 모셨어요.”
“벌써?”
질리언이 마리엘라의 말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벌써가 아니에요. 늦게라도 데뷔탕트를 치르려면 서둘러야 한다고요.”
마리엘라는 그녀의 정신세계에서 삭제된 예법과 제국사를 도로 채워 넣기로 한 것 같았다.
「잊어버린 시간들을 채울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가르쳐주시면 무엇이든 열심히 배울게요.」
낯선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했던 말을 고작 사흘 만에 손바닥 뒤집듯 없던 일로 하자고 할 수 없었던 로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취업 성공해서 다신 공부 안 해도 될 줄 알았는데.’
사람 일이란 이렇게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자 앳된 얼굴의 메이드가 재빨리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알아보라고 한 일은 어떻게 되었니?”
로나가 묻자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눈을 뜨셨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