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운명의 톱니바퀴2022.03.23.
기묘한 환상이 그녀를 스쳤다. 카리나는 머릿속에서 무언가 끼워 맞춰지는 소리를 들었다. 차칵, 차칵, 차칵. 잃어버렸던 운명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주위의 소음이 점점 작아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흑발에 적안을 가진 남자와 그녀는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둘만의 세계에 빠졌다. 그 남자의 뒤에서 환한 빛이 비쳤다. 하늘하늘 꽃잎 비가 내리는 것도 같았다. 찬란한 미모의 남자 뒤로 밤 그늘이 졌다. 그 위로 쏟아질 듯 빛나는 별과 은하수. 세상의 어떤 보기 좋은 것들을 전부 가져다 대어도 그 남자가 가진 아름다움보다 한 수 아래였다. 지독하고 파괴적인 존재였다. 카리나는 그를 본 순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흐릿한 머릿속에 떠오른 건 점쟁이 노파의 말이었다.
「곧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야. 강한 운명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지. 아주 운명적이고 열렬한 사랑을 하게 될 거야. 그 남자는 키가 크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군. 눈은…… 콜록콜록.」
키가 크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그리고 눈은…… 듣지 못했다. 사비엘도 키가 크고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그의 눈은 파란색이었다.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이는 붉은 눈동자였다.
카리나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뭔가 거대한 운명의 흐름이 그녀를 이 자리로 이끌었다. 카페 카르디날로, 오늘 이 사람을 만나도록. 저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라 카리나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 내내 곱씹던 로나의 말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운명이 돌아온 것만 같았다.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제 자리를 찾은 듯한 예감이 그녀를 휩쓸었다. 그때였다. 내내 꾹 다물려 있던 남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가 무어라 말할지 카리나는 벌써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분을 구할 수 있어 영광이군요.’
그 문장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랐다. 어딘가로부터 제게 손에 잡힐 듯 선명한 미래가 흘러들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다행이군. 그럼 이만.”
왁자지껄한 카페 앞 대로의 소음이 그녀의 귀로 밀려들었다. 건달들이 아직도 얼마 떨어진 곳에서 카리나를 욕하며 멀어지는 중이었다.
‘방금 그건…….’
영혼과 영혼이 마주한 것 같은 교감이었다. 아찔할 정도로 깊고 달콤한 접합. 이런 건 처음이었다. 이런 엄청난 감정이 저 혼자만 느낀 거라고? 카리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저 남자와 눈빛이 통했었다. 하지만 그 몇 초 사이에 그는 이미 꽤 멀어져 있었다.
“저, 저기요! 잠깐만요!”
카리나의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않았다. 남자의 뒷모습은 곧 번화가의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 유테르 공작저의 정원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공작부인인 마리엘라가 직접 정원을 가꾸는 취미가 있기도 했지만, 아내 사랑이 지극한 질리언이 그녀를 위해 특별히 큰 공사를 했다. 넓은 땅에 얕은 해자를 파고 일부는 땅을 돋아 높낮이를 둔 곳에 물가에 피는 꽃부터 산천에 자라는 초목까지 두루 가꾸니 그 자체로 자연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유테르의 낙원. 그 가운데에는 작은 음악당이 있어, 마리엘라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얼굴에 그늘이 져 있고 근심이 가득했다.
“어머니.”
엘리시아는 붙임성 있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엘리시아.”
딸을 보며 마리엘라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휴.”
마리엘라는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한숨부터 쉬었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엘리시아는 그녀의 한숨이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왜냐면 마리엘라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엘리시아가 하듄샤에서 파문당한 거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무슨 일이든 그리 중요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관련된 일로 길게 한숨을 쉰다고 하니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황후 폐하께서 널 보자고 하시는구나.”
“황후 폐하께서요?”
마리엘라는 수심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예절이 부족해서 그러세요?”
엘리시아는 마리엘라의 손을 잡았다.
“그때까지 열심히 더 배워볼게요.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어머니께서 창피하시지 않을 정도가 되도록 노력해볼게요.”
조금 전까지 3시간 넘게 예법 수업을 받다 온 엘리시아는 그 말을 하며 속으로 눈물이 찔끔 났다. 허리를 코르셋으로 꽉 졸라매고 몸을 반듯하게 세우고 앉으라니. 답답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졸라맬 데가 어디 있다고.’
엘리시아의 몸매는 더할나위 없이 이상적이었다. 얼굴은 작고 뼈대는 가냘프고 온몸에 군살이 없이 날씬했다. 그런 허리를 굳이 코르셋으로 한 번 더 조여 더욱 가늘어 보이게 만들어야 하냔 말이다. 그동안 대공저에서는 메이드로 일했기에 그녀는 코르셋이 처음이었다. 그건 정말 괴물 같은 물건이었다. 몸의 가운데를 꽉 졸라매니 하체와 상체를 두루 흘러야 하는 피가 가운데서 끊긴 것 같달까. 수업이 끝나자마자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마리엘라가 오래 기다렸다고 해서 입은 채로 달려온 참이었다. 마리엘라가 엘리시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깊은 눈매에 알 수 없는 슬픔이 걸렸다.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걸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조하듯 중얼거린 말을 알아듣지 못한 엘리시아가 자신을 응시하자 그녀가 고개를 들며 미소지었다.
“아니란다. 그냥 해 본 말이야.”
마리엘라가 커다란 황금빛 황실 문장이 찍힌 편지를 집어들었다.
“황후 폐하께서 닷새 후에 보자고 하셨단다.”
“그렇게 빨리요?”
“네가 하듄샤에서 파문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모양이야. 황후께서는 널 무척 좋아하셨단다.”
도대체 이 화기애애한 내용에서 어느 부분이 마리엘라를 걱정스럽게 하는지 엘리시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얼른 물어보았다.
“어머니. 저는 기억이 없잖아요. 무엇이든 말씀해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무슨 큰 실수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엘리시아는 조바심이 났다.
“하아. 엘리시아. 황후께서는 널 황태자비로 맞이하고 싶어하신단다.”
“네에?”
엘리시아는 눈을 크게 떴다.
“황태자비라니…….”
그녀는 마리엘라를 보았다. 마리엘라의 반응은 이상했다. 하듄샤에서 파문당할 때, 엘리시아는 좌절에 가까운 마리엘라의 행동이 ‘자식이 서울대를 때려치울 때 사교육에 올인했던 부모 반응’과 비슷하다고 이해해보려 했다. 그런데 지금 이건 ‘서울대 때려치운 자식이 하버드에 수석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유학은 싫은 부모’ 같았다. 혹시 제국의 황태자비 자리는 신전 대신관 후보보다 낮은 지위인 걸까? 아무리 원작을 조금 읽었기로서니 이런 부분까지 다 알 수는 없었기에 엘리시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 음. 제가 봐도 황태자비가 되기에는 제가 많이 부족하긴 해요.”
게다가 황태자라면 원작에서는 카리나의 서브남주였다. 분명히 카리나가 자신과 황태자 사이에 혼담이 오고 간다고 직접 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황후가 자신을 황태자비로 삼고 싶어한다니 이건 또 대체 무슨 일일까.
“부족하긴.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란다. 다 어미인 내가 부덕해서이지.”
마리엘라는 슬픈 얼굴로 웃었다. 아, 로리에가 이 얼굴을 보았으면 내가 아니라 어머니 쪽으로 입덕을 했을텐데. 엘리시아는 아름다운 공작부인의 슬픈 얼굴에 숙연해졌다.
“황실과의 혼담을 거절할 귀족이 어디 있겠냐마는 엄마는 내키지가 않는단다.”
그녀는 음악당을 둘러싼 낙원을 둘러보았다.
“유테르 공작가는 대대로 특출난 분들이 많았어. 큰 부를 이루었고. 하지만 네 아빠는 역사의 연구와 외국을 여행하는 걸 좋아하신단다. 나도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라 정치적인 일에 관심도 없지. 조용히 정원이나 가꿀 뿐인걸.”
그렇게 말하기에는 유테르 공작가의 권세가 그리 낮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게 바로 문제였다.
“황태자비가 된다면, 황궁 안에서 살아야 할 텐데 그것도 원하는 이에겐 행복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불행일 수도 있는걸.”
엘리시아는 헤에 하고 벌어지려는 입을 다물었다.
‘마리엘라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그녀는 자식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정말 이상적인 어머니였다.
“너는 어쩌고 싶니? 그런 자리에 마음이 있다면 아빠와 의논해볼게.”
“음. 별로 황태자비가 되고 싶진 않은 것 같아요.”
그저 카리나와의 혼담이 어찌 된 건지 궁금하긴 했다.
“저는 모든 걸 잊었어요. 이제부터 차근차근 처음부터 배우고 익혀야겠지요. 어머니께서 파문당한 일로 걱정하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될 거예요. 저는 저를 믿어요.”
취직에 성공하면 다시는 인생의 진로에 대해서는 걱정도 고민도 없을 줄 알았다. 갑자기 이 세계에 떨어져 메이드로 일하게 된 건 생존을 위해서였지만, 엘리시아는 스스로 반문했다. 과연 이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된 게 아니었다면, 현실에서 인생의 진로에 대해 다시는 고민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그게 아니라는 걸 사실은 알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이, 취직하고 나면 승진이, 승진 하고 나면 남들 다 한다는 결혼이, 결혼 하고 나면 또 집집마다 없으면 모두가 입을 대는 애 낳아야지. 끝이 없을 고민의 굴레를 벗어나 잠시 행복회로를 돌리고 싶은 것이었다. 언젠가 튀어나올 것을 미리 걱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
“저는 분명히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믿을 수 있고 확실한 건 나 자신이었다. 엘리시아는 제게 그런 운과 힘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처음엔 집도 절도 없이 차가운 호숫가에서 죽을 뻔했는데, 결국 혼자 힘으로 반년이나 살아냈고 운 좋게 이렇게 가족들까지 찾게 되지 않았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엘리시아.”
마리엘라는 그제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금 후련한 얼굴이었다. 스무 살이나 된 다 큰 딸을 마리엘라는 아주 어린 아이 대하듯 했다. 아마 엘리시아가 세 살이란 어린 나이에 하듄샤에 귀의한 탓인 듯했다.
“그나저나 걱정이구나. 갑자기 드레스를 구해야 하니.”
“드레스요?”
마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 격이 떨어지는 옷을 입을 수도 없고. 이렇게 빨리 드레스를 구할 수가 없을 텐데.”
아무리 간단한 드레스라도 제작에 몇 주는 걸린다며 마리엘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엘리시아의 머리에 번뜩하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제게 좋은 수가 있어요.”
*** 루톤 가에 위치한 의상실 ‘르발레인’. 황금빛 글씨가 반짝거리는 간판을 올려다보며 일레온은 중얼거렸다.
“이런 곳이었군.”
그가 보아도 평민이나 메이드가 드나들기는 어려울 것 같은 가게였다. 일레온은 의상실에 직접 와본 것이 로나와 함께 온 게 처음이었다. 왜냐면 대공저에는 몇 곳 유명 의상실과 계약을 해두고 계절 의상이나 큰 행사에 옷을 맞춰야 할 경우 부르면 직접 그들이 저택으로 오기 때문이었다. 굳이 로나를 데리고 왔던 건, 반년 내내 대공저에만 머물렀던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비엘이 나타나기 전까지 상당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날 손으로 만져보았던 옷들의 감촉이 아직도 손끝에 남은 것 같은데. 그 옷을 입어야 할 여자가 사라졌다.
“어서 오세요. 대공 전하.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그의 붉은 눈동자를 본 에밀리는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얼른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전에 주문했던 옷 때문에 들렀지.”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대답했다.
“예, 대공 전하. 주문 취소와 환불이 완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