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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 (25/151)

25.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202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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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오의 햇살은 태양궁의 천장 정가운데로 떨어져내렸다. 그 눈부심을 살짝 비낀 자리에 성대하게 오찬이 차려졌다. 일레온을 보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16550647296972.jpg“기적과도 같구나.”

마크시스 오데르 콘스탄스 황제는 예순을 넘긴 나이였다. 정정하지만 기력이 예전 같지 않은 황제의 눈가에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이 흘러넘쳤다.

16550647296972.jpg“진작 궁에 들지 그랬느냐.”

16550647296983.jpg“회복된 눈으로 바깥 불빛을 보는 게 위험할 수 있다고 하여 정양하였습니다.”

일레온의 말에 황제는 서운한 기색이 다분했다.

16550647296972.jpg“그래도 그렇지. 하나뿐인 조카의 눈이 회복된 걸 남들보다도 늦게 알아야 하겠느냐.”

16550647296983.jpg“송구합니다.”

16550647296972.jpg“그러고 보니 사비엘은?”

황제가 묻자 세라피나 황후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16550647297006.jpg“황태자께서는 바쁜 일이 있어 자리하기 어렵다 하셨습니다.”

16550647296972.jpg“바쁜 일은.”

가당치 않다는 듯 황제가 중얼거리자 세라피나 황후의 얼굴이 굳었다.

16550647296972.jpg“제국의 파수꾼이 돌아왔구나. 7년 전쟁의 전공을 제대로 치하해주지 못해 내내 마음에 걸렸지.”

16550647296983.jpg“지난 일입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폐하.”

황제는 일레온에게 후한 미소를 지었다.

16550647296972.jpg“무엇이든 청해보게. 전공은 전공대로, 대공의 병환이 나아진 것은 따로 축하할 터이니.”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일레온이 입을 열었다.

16550647296983.jpg“황명으로 혼사를 허락해주십시오.”

16550647316957.jpg“무어라?”

일레온의 말에 황제와 황후가 동시에 눈이 커졌다.

16550647297006.jpg“전쟁터에서 돌아와 내내 대공저에 머무셨던 분이. 혼사를 논할 여인이 있단 말입니까?”

세라피나 황후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16550647296983.jpg“네. 그렇습니다.”

황제가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일레온을 보다 호탕하게 웃었다.

16550647296972.jpg“허허. 그리하겠다.”

16550647296983.jpg“제가 어떤 여인을 원해도 반대하지 않고 허락하신다 약조해주십시오.”

16550647296972.jpg“얼마든지 그리해주겠네.”

큰 경사라도 난 것처럼 웃는 황제와 그 옆에서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후 앞에 일레온은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그 눈동자를 되찾다니. 세라피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드레스 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제 아들 사비엘의 자리를 위협하는 불길한 색이다. 처음 사비엘이 푸른 눈동자로 태어났을 때는 이토록 세상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둘째, 셋째 황자를 낳아서라도 ‘오데르’를 낳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몇 년 후, 대공가에 시집간 황제의 누이 레브 황녀가 일레온을 낳았다. 황가의 직계가 아닌 곳에 ‘오데르’의 특성을 지닌 아이가 태어난 일은 처음이었다. 그 후로 세라피나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일레온이 눈을 잃은 동안 잊고 살았던 불행이 스멀스멀 그녀의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듯했다.

16550647296983.jpg“칙서로 내려주십시오.”

그 와중에 일레온은 제 할 말을 또박또박 하고 있었다.

16550647296972.jpg“칙서? 칙서라니.”

16550647296983.jpg“방금 제 혼사에 대해 하신 말씀 그대로 적어서 서류로 만들어주시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황제가 허허허 하면서도 그러마 하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세라피나 황후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16550647297006.jpg‘이국의 노예나 포로라도 되는 거야?’

그게 아니면 ‘어떤 여인을 원해도’ 반대하지 않고 허락해달라고 요구할 필요가 있냔 말이다.

16550647297006.jpg‘한미한 가문이나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대공비가 되는 건 괜찮은 일이지.’

사비엘도 중요한 혼사를 앞두고 있다. 아직 황제에게 말도 꺼내지 못했는데, 일레온이 물꼬를 터주었으니 그것도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다.

16550647297006.jpg“원하는 대로 해주시지요. 당장.”

세라피나 황후가 미소 지었다.

16550647296972.jpg“허허허. 오찬 하다 말고 칙서를 내리게 생겼군.”

기어코 오찬을 마치자마자 황제의 집무실로 쫓아가 원하던 칙서를 손에 넣은 일레온은 손에 잡힌 황금빛 술이 달린 두루마리를 가볍게 던졌다 받았다.

16550647296983.jpg“이거면 되겠지.”

로나를 찾는 건 둘째치고, 그녀를 합법적으로 대공비에 앉히기는 어려울지 몰랐다. 아직 제대로 된 고백을 못 했지만, 일레온은 그녀를 찾기 전에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생각이었다.

16550647296983.jpg“이걸 손에 넣을 기회는 지금 한 번뿐이었으니.”

7년 전쟁의 공적은 대단히 치하받아야 마땅했다. 7년 전쟁에서 그가 제국의 땅으로 만든 영역은 지금 제국 전체의 1/3에 달했다. 일레온이 수도로 귀환하기 전만 해도 7년 전쟁으로 얻은 영토의 반은 그에게 영지로 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그가 시력을 잃고 개선행사에 나설 수 없게 되자 모든 것이 흐지부지되어버렸다. 하지만 일레온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는 손 많이 가고 이민족이 사는 드넓은 영지보다 로나의 불분명한 신분을 해결해줄 이 칙서 한 장이 더 귀했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로나가 신분증명을 낼 수 없어서 대공저에 일하러 오게 되었다는 건 기억했다. 잠시 로나를 떠올린 일레온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16550647296983.jpg“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그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유능한 집사 베르나르를 영지로 내려보냈다. 일레온 자신이 갔어야겠지만, 제가 눈을 잃은 동안 내내 영지를 관리했던 건 그였으니까. 그리고 대공가에 산적한 일거리들을 하나하나 해결했다. 아무리 베르나르라도 주인을 대신해서 결정할 수 없는 큰 일들이 밀려 있었다. 부관인 세드릭이 심부름 길드를 채근해서 로나의 뒤를 쫓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증발해서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여자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머리카락을 치렁거리며 일하는 메이드는 없다. 평소 로나가 머리카락을 하녀들이 흔히 쓰는 보닛 안으로 꼼꼼하게 올려묶곤 했는데 그래서 그럴까. 고작 외모를 특정하는 색으로 사람을 찾는 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전단을 붙일 수는 없었다. 로나의 불분명한 신분 때문이었다. 대공가에서 신분이 없는 여자를 찾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어딘가에 있을 로나가 위험해질지 몰랐다. 현상금을 받기 위한 사냥감 취급을 받을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계속 뭔가가 일레온의 심기를 건드렸다. 뭔가 전제조건이 잘못되어서 로나를 찾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일레온이 태양궁에서 본성으로 이어지는 긴 복도를 걸을 때였다. 맞은 편에서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태양궁을 향해 걸어오는 여인들이 보였다. ***

16550647339092.jpg‘일레온!’

엘리시아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격조 있는 대리석 기둥 사이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내렸다. 그 가운데를 걸어오는 일레온은 엘리시아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보다 훨씬 커 보였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 그가 당당하게 빛 사이를 걸어온다. 흰 대리석에 금빛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민 태양궁의 전실에서, 일레온보다 빛나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구부정하지도, 천천히 엘리시아의 손길을 기다려야 하지도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완벽했던 것처럼, 더는 어떠한 도움도 조력도 필요해 보이지 않는 완성체라는 느낌이었다. 신이 만든 가장 완벽한 피조물. 신좌에 오른 전설 속의 피를 물려받은 가장 뛰어난 인간. 일레온이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워질 때마다 그의 발소리가 심장에 점점이 찍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16550647339092.jpg「일레온이 눈을 뜬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

  <눈먼 짐승의 꽃>에 묘사된 일레온을 상상했다. 하지만 글로 묘사 된 모습을 떠올린 것과 실제로 마주한 일레온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햇살이 비쳐 더욱 선명한 붉은 눈동자를 무엇으로 표현해야 제대로 말했다고 할까. 눈을 되찾은 일레온이 너무 아름다워서 엘리시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가 입고 있는 제복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한 치의 삐뚤어짐 없이 여며진 단추와 매무새는 누가 챙겨주었을까. 집사 베르나르가 했을까. 아니면 다른 메이드를 고용했을까. 대공저에서 사람을 많이 뽑고 있다고 했으니 누군가가 그의 의전을 챙겼을 것이다. 카리나가 일레온을 선택하지 않아서, 그가 눈을 뜨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발작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그를 보며 가슴이 아파서 울었던 시간들이 또렷했다. 그때 백번, 천 번 기도하며 기적처럼 와주길 바랐던 미래가 지금 이 순간이었다. 그런데 일레온이 눈을 떠서 기쁜데 이 기분은 뭘까? 가슴 벅찬 감정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물러나고 그 자리로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알고 있었지만, ‘로나’가 필요 없어진 그를 보는 건 기쁨과 동시에 서운했다.

16550647339092.jpg‘어쩌면 지금 가족과 신분을 찾게 된 건 그가 로나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을 번거롭게 할 것은 세계관이 보정한다. 자연스럽게 로나가 떠나게 이야기가 그녀를 이끈 것이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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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정에 변화 없이 일레온이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등 뒤로 멀어져간다.

16550647339092.jpg‘그에게 더는 내가 필요하지 않아.’

그 순간 가슴 한복판이 욱신거렸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엘리시아는 잠시 발을 삐끗했다.

16550647361066.jpg“엘리시아.”

마리엘라가 그녀를 붙잡았다.

16550647361066.jpg“괜찮니?”

16550647339092.jpg“네. 죄송해요. 새 구두가 익숙하지 않아서.”

엘리시아는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곧 황제와 황후의 알현이었다. *** 황제와 황후는 품위 있는 이들이었다. 유하고 모나지 않은 유테르 공작부인의 성품과 맞물리니 차를 마시는 내내 분위기가 부드럽게 흘러갔다. 세라피나 황후는 마리엘라의 말처럼 엘리시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16550647297006.jpg“엘리시아 영애가 진행하는 기도회마다 꼭 참석했었답니다. 기억이 나지 않나요?”

16550647339092.jpg“네. 황후 폐하.”

16550647297006.jpg“기도회가 끝나고 영애에게 독대를 청하면 황후라도 신 앞에는 똑같은 사람이라 두, 세 시간도 기다렸답니다. 이것도 기억이 나지 않나요?”

16550647339092.jpg“네. 죄송합니다. 폐하.”

황후는 신관 엘리시아가 진행하는 기도회마다 참석했다고 했다. 하듄샤에서 큰돈을 쾌척하여 엘리시아가 성물을 만들어 준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모든 것이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그저 죄송해할 뿐이었다.

16550647297006.jpg“기억을 잃었다고는 해도 이 정도일 줄.”

16550647339092.jpg“죄송합니다.”

황후는 뭔가 실망한 듯 보였다. 달그락. 엘리시아는 찻잔을 내려놓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버렸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내려놓았어야 했는데, 예법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16550647339092.jpg“실례하였습니다.”

거듭 사죄하자 마리엘라가 난처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16550647361066.jpg“예법도 모두 잊어버려서 처음부터 배우고 있답니다.”

16550647297006.jpg“저런. 그래서였군요. 엘리시아 영애가 예전과 다르게 자세가 나쁘다고 생각했답니다.”

황후는 그제야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16550647297006.jpg“몸에 밴 예법마저 잊을 정도라니, 정말 심각하군요.”

16550647361066.jpg“그래도 건강에 이상이 없다니 그것만으로도 신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16550647297006.jpg“데뷔탕트는 어찌 되고 있습니까.”

황제는 건강을 회복한 걸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후로, 내내 세라피나 황후가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16550647361066.jpg“때를 놓쳤지만, 사정이 있었으니 올해 안에 치르려고 합니다.”

16550647297006.jpg“다음 주에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에서 하지요.”

16550647361066.jpg“황후 폐하.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시일이 촉박하여 그때까지는 어려울 듯합니다.”

16550647297006.jpg“해링턴 백작가의 영애도 그날 데뷔탕트를 치르기로 하였지요. 카리나 영애도 늦은 데뷔탕트인지라 이 사람이 허락해주었어요.”

16550647361066.jpg“아아.”

마리엘라가 난처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세라피나 황후가 크게 인심을 썼다는 듯 미소지었다.

16550647297006.jpg“엘리시아 영애도 그날 함께 하도록 해요.”

16550647361066.jpg“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마리엘라가 머리를 숙이자 세라피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았다. ‘죄송합니다’만 연발하다 나온 엘리시아는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16550647339092.jpg“죄송해요. 어머니.”

16550647361066.jpg“그럴 것 없어. 누구나 긴장하는 자리이니.”

그때 황후궁의 시녀가 다가와 마리엘라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16550647361066.jpg“잠시 황후 폐하께서 따로 하실 말씀이 있다는구나.”

16550647405148.jpg“엘리시아 아가씨께서는 정원에 쉴 자리를 마련해두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리엘라가 자리를 비우자 엘리시아는 혼자 천천히 정원을 둘러보려 했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금 전에 마주쳤던 일레온의 잔상만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엘리시아는 멍하니 허공을 보며 의미 없이 정원을 서성거렸다.

16550647339092.jpg“앗!”

정원 바닥에 박힌 장식돌의 가장자리를 헛디딘 엘리시아는 휘청하며 넘어질 뻔했다. 탁. 누군가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익숙한 샌달우드 향기가 엘리시아의 코끝에 닿았다.

16550647422354.jpg“괜찮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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