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부러워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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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부러워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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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부러워하겠지
2022.04.02.
“괜찮나.”
나직한 일레온의 목소리가 머리 꼭대기에서 들렸다.
몇 번인가 이런 순간이 있었다.
책을 읽다 일레온의 곁에서 잠이 들었을 때.
공원에서 벌을 쫓다 그에게 안기듯 넘어졌을 때.
울컥.
엘리시아는 속에서 치미는 감정을 갈무리하려 애썼다.
“일…….”
저도 모르게 그를 부를뻔한 엘리시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나를 모르는데.’
그리고 그녀도 그를 몰라야 했다.
엘리시아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아…….”
자신을 뚫어질 듯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일레온은 고개를 숙여 그의 품에 안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보고 있었을까? 엘리시아는 팔에 소름이 돋았다.
늘 가까이에서 마주했던 초점이 사라진 회색 눈동자가 있던 자리에 선명한 원색이 빛나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홀린 듯이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빨간 눈동자는 무섭거나 이상하지 않을까 했는데.’
보통 사람의 눈동자와 다른 색이니까. 실제로 보면 어떨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진짜 일레온의 눈은 아주 아름다웠다. 신비롭게 예쁜 빨간색이었다.
그때 정원에 둘러진 관엽수들 너머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엘리시아는 당황했다.
제 허리에 둘러진 일레온의 팔이 여전했다. 누가 보면 남녀 사이에 밀회라도 나눈다고 여길 정도로 몸이 밀착된 상태였다.
“가,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인사치레의 말이 오가고 엘리시아는 의아했다.
‘응?’
놓아달라는 뜻이었는데 묘하게 일레온이 자신을 더 꽉 끌어안은 듯한 느낌이었다.
“저어…… 대공 전하.”
‘일레온 님’이 아닌 그에 맞는 호칭을 찾은 엘리시아가 그를 불렀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이만 놓아주셔도.”
익숙한 일레온의 향기를 그의 품에서 느끼고 있자니, 자꾸 마음이 서글퍼졌다.
게다가 점점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 같아 불안했다.
“대공 전하? 놔주세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부러워하겠지.”
“……네?”
엘리시아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가 얼른 다물었다. 그가 앞이 보이지 않을 때도 말발이 쳐지지 않는다고 느낀 적은 많이 있었지만, 주종관계라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가 보다.
“농담이야. 웃으라고 한 말인데 영애는 웃지 않는군.”
일레온은 그녀가 바로 설 수 있게 도와주었다. 발밑이 보이지 않는 풍성한 스커트 탓에 엘리시아는 조심조심 바로 섰다.
“영애 이름은?”
“엘리시아 유테르라고 합니다.”
엘리시아는 얼른 치마를 펼치며 무릎을 굽히는 인사를 했다. 질리언과 마리엘라 앞에서만 했었는데, 일레온. 너 그거 알아야 해. 가족 빼고 네가 처음이란 거. 엘리시아는 괜히 민망해서 속으로 아무 말을 주워섬겼다.
“엘리시아 유테르라고. 엘리시아라. 엘리시아.”
몇 번이나 곱씹듯 중얼거리는 일레온은 마치 그녀의 이름을 외우려는 것처럼 보였다.
‘왜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내가 대공인 줄 어떻게 알았지?”
“그…… 그게 소문을 들어서…….”
“무슨 소문?”
“클레벤트 대공께서 눈을 되찾으셨다고.”
“아아. 그렇군. 소문이라. 소문을 전해 듣고 있었단 말이지.”
엘리시아는 묘하게 자꾸 그가 제 말에서 꼬투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으으. 불편해.’
문득 마리엘라의 간곡한 표정이 떠올랐다.
「네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건,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란다. 유테르 공작가의 망신이지.」
그녀는 엘리시아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절대로. 절대로 네가 대공의 메이드로 일했다는 게 알려져선 안 돼. 네가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도 추문이란 건 그런 거란다. 진실과는 상관없어. 자극적이면 그만이니까.」
그냥 일레온이 눈을 뜬 모습을 보고 싶다고만 막연히 생각했다.
막상 일레온을 마주치니 궁금한 게 많았다.
‘물어보고 싶어.’
기분은 좀 어떤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등등.
하지만 아마도 마리엘라는 자신이 일레온과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하얗게 질려 벌벌 떨 것이 틀림없었다. 엘리시아를 낳은 어머니는 걱정이 많은 편이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엘리시아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었다. 언제 일레온을 또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자신이 로나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되니까.
잔뜩 긴장한 상태로 돌아서려 할 때였다. 갑자기 일레온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엘리시아 영애.”
“네?”
“이것도 인연인데 함께 차라도 한잔 들지.”
“저, 저랑요?”
엘리시아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일레온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고, 데이트 한 번 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연을 집사 베르나르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차, 그놈의 차.
「참한 영애 손목은커녕 차 한잔 마신 적이 없는 우리 전하께서 이대로 독수공방 지내셔야 한다니!」
그런데 그 차 한잔을 왜 지금 마시자는 거지? 그것도 나랑?
엘리시아가 대답이 없자 일레온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정원의 나무 사이 아늑한 곳에 티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아까 시녀가 마리엘라를 기다리는 동안 쉴 곳을 안내해주겠다더니 여기였던가 보다.
‘근데 왜 찻잔이 두 개지?’
황후궁에 불려간 마리엘라 몫인가? 의아해하며 엘리시아는 먼저 자리에 앉은 일레온에게 다가갔다.
테이블 위의 차는 세 종류가 준비되어 있었다.
“차는 세 가지가 있어요. 말린 오렌지차, 홍차. 홍차는 색이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로 진해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꿀에 절인 생강차예요.”
엘리시아는 그에게 세세하게 차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일레온의 곁에 붙어섰던 엘리시아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으아! 내가 이걸 왜 설명하고 있는 거야!’
일레온이 앞을 보지 못할 때는 늘 이런 식으로 엘리시아가 모든 것을 하나씩 설명해주곤 했다. 그는 로나의 설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차를 고르곤 했다. 정말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엘리시아가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더니 일레온은 눈을 감고 그녀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었다. 설명이 끊기자 그가 눈을 떴다.
“왜? 계속하지.”
“아, 하. 하. 하. 제, 제가 차를 좀 좋아……해서…….”
엘리시아는 삐걱거리며 말린 오렌지차를 집게로 집어 일레온의 찻잔에 넣었다. 기계적으로 찻주전자를 들어 올려 뜨거운 물을 찻잔에 막 부었을 때였다.
“오렌지차를 마시겠다고 한 적 없는데.”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레온은 단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꿀에 절인 생강차는 탈락. 그리고 검게 보일 정도로 진하게 볶은 홍차도 별로였다. 천천히 진하게 우린 홍차와 티푸드를 곁들인 애프터눈 티는 귀족들의 고급 취미였다. 일찍이 전쟁터를 떠돌아야 했던 일레온은 오래 우러난 홍차의 떫은맛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굳이 홍차를 마신다면 연한 붉은 색의 잎을 고르고 가볍게 우려낸 맛으로 마셨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피한 셈이었다.
“왜 내게 오렌지차를 주었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전하의 눈동자 색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어울리나?”
“네. 빨강 다음은 주황이니까. 예, 예쁘잖아요.”
“그래? 예쁘다고 생각하는군.”
미친.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니, 원윤지야.
엘리시아는 황궁 나들이를 위해 곱게 단장한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엘리시아 영애.”
“네?”
왠지 영혼을 탈곡기로 탈탈 털리는 기분을 느끼며 그녀가 일레온을 보았다.
“영애.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나?”
빨간 눈동자. 신이 된 자가 남겨준 선물이라고 했던가.
그의 눈을 마주치자 왠지 일레온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초면입니다. 대공 전하.”
하지만 엘리시아에게는 아직 오리발을 내밀 이성이 남아있었다.
“그래. 초면이군.”
그는 엘리시아가 만들어준 오렌지차를 마셨다. 찻잔을 깨끗하게 비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마셨어. 솜씨가 좋군.”
“아닙니다. 제 부족한 솜씨가 전하께 폐가 되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또 보지. 엘리시아 영애.”
엘리시아는 멍하니 정원수 사이로 사라지는 일레온을 바라보았다.
“또 보자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우득.
사비엘이 나무 사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는 이를 갈았다.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진 지는 오래였다.
“일레온 클레벤트 네가 감히 내 여자를.”
그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
세라피나 황후는 기분이 좋았다.
데뷔탕트에 대해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마리엘라를 황후궁에 잡아두었다가 느지막이 보냈다.
‘사비엘은 엘리시아 영애와 함께 있겠지?’
귀족 가문의 결혼은 일반적인 결혼이 아니다. 사실상 계약서를 꾸려 사업을 하는 것과 진배없다.
줄 것과 받을 것을 나누는 결혼.
그런데도 젊은 귀족 아가씨들은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마치 정략결혼은 불행한 결혼생활의 시작이고 연애결혼은 사랑이 넘치는 이상적인 결혼생활의 시작일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세라피나도 귀족가 아가씨로 자랐던지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황제와 황후 앞에 딱딱하게 앉아 수박 겉핥기식으로 날씨 이야기나 할 알현 자리를 피해 사비엘과 엘리시아가 따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리엘라를 붙잡아두고, 사비엘에게 시간에 맞추어 정원으로 가도록 했다.
“이쯤이면 황태자에 대한 선입견 없이 서로를 알아보았겠지.”
세라피나 황후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비엘이 그리 품성이 나쁜 아이가 아닌데, 외모가 훌륭한 탓에 귀족 영애들과 몇 번 연애를 했기로서니 여색을 밝힌다고 소문이 나버렸다. 정작 그렇게 떠들어대는 사교계 입들 역시 처음 교제한 이와 결혼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둘이 함께 보낼 시간을 마련해주면 서로 호감을 갖고 천천히 만나갈 수 있을 거라고 세라피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황후 폐하.”
“그래. 어떻게 되었지?”
정원의 두 사람을 살펴보고 오라고 보낸 황후궁 시녀가 돌아왔다.
“황태자 전하께서 정원에 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런…… 그럼 그 긴 시간 동안 엘리시아 영애는 정원에 혼자 있었단 말이냐?”
“아니요. 우연히 클레벤트 대공께서 지나다 영애를 보시고 함께 차를 드셨다고 합니다.”
“뭐? 일레온이?”
세라피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감히 내 궁에서.”
황궁은 세라피나의 영역이었다. 거기서 거슬리는 똥파리가 아끼는 꽃 주변을 어슬렁거린단 말인가.
“눈을 되찾다니…….”
일레온을 떠올리는 황후에게서 싸늘한 기운이 풍겨나왔다.
***
대공저로 돌아온 일레온은 찾아온 손님을 맞았다.
“분부하신 대로 엘리시아 유테르 영애에 대해 싹 긁어왔습니다.”
1000골이나 주고 ‘로나’를 찾는 걸 의뢰했던 길드에 엘리시아의 뒷조사를 의뢰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찾을 때는 무능해 보였던 정보 길드는 존재하는 여자의 자료를 모아오는 데는 선수였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그래. 나중에 부를 테니까.”
일레온은 두툼한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찬찬히 엘리시아 유테르의 삶을 눈에 담았다.
“반년 전 습격 때 크게 다쳐서 두문불출하던 영애가 겨우 건강을 회복했다라.”
대외적으로는 그렇고 엘리시아 영애가 기억상실로 하듄샤에서 파문을 당해 저택으로 돌아온 건 고작 2주 전이라는 것이다.
사라진 여자와 나타난 여자.
일레온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찾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