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엮이지만 않으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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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엮이지만 않으면 되잖아
2022.04.09.
<눈먼 짐승의 꽃> 책에는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 반면, 책에 나오지도 않는 이들까지 이 세계의 자연스러움에 포함이다.
하지만 정말 아이러니한 비극은 따로 있었으니, 몇 줄로 묘사되고 말아버리는 등장하지 않은 등장인물이었다.
유테르의 낙원.
잉꼬부부 유테르 공작 부처가 진실한 사랑을 나눴다는 상징인 아름다운 정원.
그 정원의 작은 요정이라고 불리던, 질리언과 마리엘라의 사랑의 결정체 엘리시아.
그녀가 <눈먼 짐승의 꽃>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없으나, 딱 두 군데 엘리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첫 번째는 사비엘과 카리나의 초반 관계 묘사에 스치듯이 언급되는데, 그 내용이 전 황태자비 후보인 엘리시아가 사비엘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다가 자살한다는 내용이었다.
<“카리나. 난 내가 다시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못할 줄 알았어요.”>
<“왜죠?”>
<사비엘은 슬픈 눈빛으로 카리나를 보았다.>
<“당신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전 황태자비 후보였던 엘리시아 영애는 내게 집착했어요. 그것도 사랑이고 관심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에 나는 숨이 막혀 죽어가고 있었어요.”>
<“사비엘 님.”>
<카리나는 사비엘이 안타까웠다. 그는 제국의 황태자였다. 만인이 우러러보는 고귀한 존재에게도 마음의 상처가 깊게 남아 있다니.>
<“내 마음을 받아달라는 게 아닙니다. 나를 멀리하지만 말아줘요. 카리나.”>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더는 자신을 피하지 않으리라 확신한 사비엘은 그제야 카리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원작상, 카리나와 사비엘, 일레온이 삼각 썸을 탈 때, 엘리시아는 원래 이미 고인이었다.
두 번째는 작품 후반에 카리나와 사비엘의 관계가 완전히 끝장나고 그녀와 일레온 커플링이 확정될 때 등장했다.
<“엘리시아 아가씨는 황태자에게 살해당하신 겁니다.”>
<유테르 가의 유모가 하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제 말을 믿어달라며 눈물을 흘렸다.>
<“황태자의 꼬임에 넘어가 몇 번을 깊은 밤을 보내셨답니다. 하지만 황태자는 아이를 가진 엘리시아 아가씨를 외면했어요.”>
<“말도 안 돼요. 엘리시아 영애는 황태자비 후보인데 굳이 그런 일을…….”>
<유모는 카리나를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이게 전부 카리나 아가씨 때문입니다. 물론 당신의 탓이 아니지요. 하지만 당신이 나타난 후로 모든 것이 어그러졌어요.”>
<카리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사비엘이 제 앞에서 엘리시아가 자신에게 집착했다며 눈물 지었던 순간을 떠올리니 소름이 돋았다.>
<“엘리시아 아가씨가 황태자에게 집착했다고요? 천만에. 반대랍니다. 그는 잔인한 사람이에요. 언제 카리나 아가씨께도 같은 짓을 할지 모른답니다.”>
<유모는 시근대며 할 말을 마치고는 후련해진 얼굴로 곧 자리를 떠났다.>
엘리시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이럴 수가.’
책의 앞부분만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꽤 뒤쪽에 나올법한 이 내용을 자신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훌훌 넘겨보며 훑어본 와중에 빙의하게 된 자신에 대한 내용이라 이토록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분명히 대충 보다가 취업에 성공한 다음에는 앱 자체에 잘 안 들어갔었는데.’
언제 읽었는지 떠올려보려 하니 머릿속이 뿌연 안개가 들어간 것처럼 기억이 흐릿했다. 억지로 그 기억에 집중하려니 머리가 아파왔다.
“엘리시아 영애. 괜찮습니까?”
“네, 괘, 괜찮아요.”
손이 덜덜 떨렸다.
「유테르의 낙원이 낳은 작은 요정을 황태자비로 맞이하고 싶으신 거지요.」
황태자의 말 한마디가 기폭제가 된 것처럼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아이까지 가지게 만든 후 카리나에게 반해 황태자비 후보에서 내쳤다는 잔인한 사람이 눈앞에 앉은 이가 맞을까?
엘리시아는 혼란스러웠다. 실제로 마주한 사비엘은 아무리 보아도 신사적이고 멋진 사람이었다. 적어도 겉모습에서는 그렇게 흠잡을만한 데가 없었다.
샤프롱으로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앉아있던 예법 교사 오제 부인이 그런 엘리시아를 보며 자세를 바로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엘리시아가 좀체 나아지지 않자, 그녀가 너무 긴장했다고 느낀 오제 부인이 결국 일어나 다가왔다.
“황태자 전하. 외람되오나 오늘 엘리시아 아가씨께서 몸이 불편하신 듯합니다.”
“아, 그래요. 내가 너무 갑자기 찾아왔지요.”
“엘리시아 아가씨께서 건강을 회복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송구하옵니다.”
샤프롱이 나서서 엘리시아를 감싸자 황태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음에는 마차를 보낼 테니 황궁 정원을 산책하며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길 바랍니다.”
“황공합니다.”
사비엘이 사라진 후 오제 부인은 엘리시아를 보며 깜짝 놀랐다.
“아가씨. 엘리시아 아가씨!”
엘리시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절했다.
공작저를 나서며 사비엘은 오랜만에 짜릿함을 느꼈다.
“기억을 잃다니. 소문이 사실이잖아.”
오늘 갑자기 공작저에 찾아왔던 건 엘리시아가 정말로 기억을 잃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조금은 자신을 기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제가 공들여 그레로사로 향하는 자신을 납치했던 일을 말이다.
정말로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하는 엘리시아를 보며 사비엘은 이전의 실패가 지워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공략해보지 않은 엘리시아가 새것 같은 상태로 제 앞에 앉아 있지 않은가?
그를 두려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았다.
사비엘을 기억하면서도 그토록 모른 체할 수 있다면 그건 뛰어난 연기력에 찬사를 보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엘리시아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일레온에게 뺏기고 벼르던 그는 유테르 공작저에 득달같이 달려온 셈이었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었다. 엘리시아는 진짜로 사비엘을, 그에게 당한 일을 잊었다.
그가 뒤를 추적하던 반년 사이에 어디에 그리 꽁꽁 숨어지냈는지도 궁금했다.
엘리시아의 외모가 숨긴다고 숨겨지는 빛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그를 보고 미친 새끼라며 악다구니를 퍼붓던 여자가 예의를 차리며 ‘황공합니다’라고 말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길들일 생각이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욱신욱신.
그녀의 머리장식에 숨겨진 작은 칼에 찔렸던 목덜미가 일순 아파왔다. 사비엘은 제 목덜미를 손으로 문질렀다. 늘 짜증스럽던 아픔이 오늘은 그 통증마저 기꺼웠다.
***
데뷔탕트를 치르기로 한 무도회 당일, 황궁에 도착한 마차 안에서 마리엘라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아내를 보다 못한 질리언이 엘리시아를 염려했다.
“너무 무리할 것 없어.”
“괜찮아요. 이제 다 나았는걸요.”
엘리시아는 마리엘라를 향해 웃어 보였지만,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그러니까 황태자랑 엮이지만 않으면 되잖아.’
머리에 꽃을 꽂은 돌은 자가 되어서라도 그의 마음과 멀어지기만 하면 그로 충분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고 답답한지,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 것인지 엘리시아는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이게 전부 다가 아니라는 것처럼.
이미 카리나도 일레온도 원작을 벗어났다.
카리나는 황태자와 꽤 깊은 사이가 된 것 같았고, 일레온과는 만나지도 않았다.
일레온 역시 카리나를 본 적도 없다. 심지어 카리나가 고쳐주었어야 할 눈은 엘리시아인 자신이 낫게 해주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나도 황태자를 피할 수 있어. 비참하게 죽지도 않을 거고.’
엘리시아의 비극적인 죽음은, 카리나가 황태자의 정체를 알고 일레온을 선택하게 하는 장치로 넣어진 이야기이다. 지금 셋이 삼각관계가 아니니 자신의 죽음은 필요 없어진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사비엘을 만난 후, 엘리시아는 사흘을 열을 내고 땀을 쏟으며 앓아누웠다.
왕진을 온 의사는 ‘무서운 것을 보거나 크게 놀란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에 오제 부인이 저택에서 얌전히 차를 마시다 쓰러졌다고 설명하자 의사가 의아해할 정도였다.
“괜히 온 것 같아. 드레스가 헐렁할 정도라니. 더 쉬는 게 좋았을 것을.”
“황후 폐하께서 주신 기회인데 어떻게 그래요.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곤란해하실 일은 하지 않을게요.”
아닌 게 아니라 엘리시아도 데뷔탕트용 흰 드레스 탓에 자신이 더욱 창백해 보인다고 생각을 했다. 꾸밈을 도와주는 이들이 부지런히 애썼지만, 한계가 있었다.
‘카리나 옆에 있으면 더 비교되겠지? 잘됐네. 카리나가 예쁘면 그걸로 장땡이지. 망할 황태자 놈아 카리나한테나 잘해라.’
그러고 보니 둘이 혼담 운운하며 좋은 분위기 아니었나. 뜬금없이 제게 와서 황태자비 같은 소릴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황후도, 황태자도 말이다.
사비엘 너. 혹시 바람이니?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렇지만 제가 넘어가지만 않으면 될 일이라며 데드 플래그가 주는 긴장감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커다란 홀에 들어서자 별세계가 펼쳐졌다.
“와아.”
엘리시아는 조금 전까지 울적하던 감정도 잊고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진짜 돌과, 진짜 금. 거기에 커다란 샹들리에에 셀 수 없이 얹은 초들이 화사하게 빛을 비추었다. 그 아래 반짝이는 보석으로 치장하고 번들거리는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자 사방 어디에도 그늘이 없는 듯했다.
엘리시아는 잠시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힘든 빙의 생활에 이런 낙이라도 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뼈 빠지게 메이드로 일하다가 드디어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
곧 황제와 황후, 황태자 사비엘이 차례로 등장했다.
긴 축사와 헌사가 이어졌다. 오늘 무도회가 무슨 좋은 일 때문에 여는 거라고 한참 말했지만, 데뷔탕트 탓에 예법 수업과 춤 수업에 올인한 나머지 제국사 수업은 뒷전이 되어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문득 사비엘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엘리시아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설렘과 기대감을 담고 뛰는 것이 아니다.
제 심장에 칼을 꽂을 원수를 본 것 같은 불길함과 불안함을 안고 뛰었다. 엘리시아는 등 뒤로 땀이 나는 걸 느꼈지만, 여기서 기절할 수는 없다. 옆에 선 질리언과 마리엘라를 보며 견디려고 애를 썼다.
이윽고 황후가 카리나와 엘리시아를 곁으로 불렀다.
아름다운 두 아가씨가 눈에 띄는 흰 드레스를 입고 황후 앞에 나란히 머리를 조아리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오늘 여러분께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어요. 유테르 공작가의 엘리시아, 그리고 해링턴 백작가의 카리나입니다.”
모두 박수를 치며 다 큰 아가씨들의 뒤늦은 사교계 데뷔를 축하해주었다.
“그러면 누군가 첫 춤을 추어야 할 텐데…….”
황후는 사비엘에게 재빨리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사비엘은 황후의 눈짓을 받지 못했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카리나와 눈싸움을 벌이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유테르 영애의 첫 춤은 제가 함께 추지요.”
그때 불쑥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대, 대공.”
황후가 놀란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황후의 눈빛도 일레온의 차림새를 보며 일순 멍해졌다.
검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넘겨 훤한 이마를 드러낸 그는 제대로 성장한 상태였다. 흰 바탕에 금빛 자수로 장식한 제복은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정신을 차린 황후가 겨우 입을 열었다.
“대공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
“제가 못 올 곳에 왔습니까. 황후 폐하.”
“아니,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저택에 초대장이 와 있길래 와본 것뿐입니다.”
일레온의 눈이 엘리시아를 향했다.
“이런 좋은 구경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요.”
“첫 춤은 사비엘이…….”
일레온은 황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엘리시아의 허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지.”
그는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리러 온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