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운명을 되돌릴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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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운명을 되돌릴 기회
2022.04.16.

“나와 결혼할 사람.”
엘리시아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쌍쌍이 열을 지어 플로어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돌던 이들이 엘리시아와 함께 멈추어 선 일레온 때문에 어중간하게 밀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은 이들이 마주 보고 선 일레온과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춤을 추는 대열이 엉망이 되자 음악을 연주하던 악단까지 손을 멈추어 플로어는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뭔가 말해야 해.’
그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받아넘겼어야 했는데, 이미 그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리고 선뜻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추, 축하드려요.”

“고맙군.”
엘리시아는 주춤주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아해하는 눈초리가 모조리 두 사람에게 쏠려있었다.

“춤을 너무 오래 췄어요. 저는 그럼 이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숨쉬기에도 버거운 느낌에 엘리시아는 도망치듯 회장에서 빠져나갔다. 엘리시아는 한산한 테라스에 뛰어들 듯 뛰쳐나가 문을 닫았다.

“헉. 헉.”
심장이 엉망으로 쿵쾅거렸다.

“지금 일레온이 뭐라고 한 거야.”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찾고 있는 여자는 분명 ‘로나’였다.

「나와 결혼할 사람.」
결혼을 하겠다고? 로나와? 그럴 리가 없었다.
일레온과 로나는 아무 사이가 아니었다. 단순히 주인과 메이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야.”
로나가 아니다. 일레온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로나를 찾고 있는 거로 생각하고 들었다.
……카리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제가 대공저를 떠난 후, 일레온이 눈을 뜨기까지는 며칠의 텀이 있었다.

‘그 사이에 혹시 카리나를 만났나?’
합리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럼 그 얘길 왜 나한테 했을까?
그리고 왜 나와 첫 춤을 췄을까? 옆에 카리나 영애도 있었는데 말이다.
사비엘이 다녀간 후 쓰러졌다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몸으로 익숙하지 않은 드레스를 입고 일레온과 춤을 연달아 세 곡이나 추었더니 머리에 산소가 부족한 기분이었다. 엘리시아는 심호흡을 하려 애썼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였다. 달칵 소리와 함께 테라스의 문이 열렸다.

“로나 양?”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까지 복잡한 머릿속을 떠돌던 카리나가 서 있었다.

“우리 이야기 좀 하죠?”
***
오늘 데뷔탕트는 혼자 주목을 받으며 치러낼 줄 알았다.
카리나가 자신과 함께 또 한 명의 영애가 늦은 데뷔탕트를 치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황궁에 도착한 후였다.

“그런 건 미리 알려줘야지. 황후께서 너무하셨어.”
해링턴 백작부인이 무시당한 기분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혼자면 흰 드레스를 입은 것만으로도 꽃이 되겠지만, 경쟁자인 영애보다 허술해선 안 된다며 몇 번이고 그녀의 차림새를 꼼꼼하게 살폈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리나는 별로 아무렇지 않았다.
데뷔탕트를 잘 치러야 하는 건, 혼기가 꽉 차서 구혼장을 받아야 하는 영애들의 숙명이었다. 하지만 사비엘과 깊은 관계가 된 자신은 구혼장을 받으면 흠이 드러나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가문의 위신, 집안의 명예.
허울뿐인 남작가의 여식으로 자유분방하게 자란 그녀에겐 그런 것이 요구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입고 먹고 누리는 모든 것이 해링턴 백작가에서 얻어지는 이상 집안 격에 맞게 행동해야 할 것이 자명했다.

‘황궁 무도회이니 사비엘이 오겠지.’
계속 자신을 피하는 그와 뭔가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데에 골몰한 나머지, ‘다른 영애’가 있다든지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저 여자가 유테르 공작가의 영애라고?’
로나 해라팰리스. 제게 수도로 오기 전, 영지에서 점을 쳐주었던 노파의 양손녀라며 은혜를 갚겠다고 찾아와 한 번 만나주었던 그녀였다.

‘잘못 본 거 아니겠지?’
제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공기 좋은 산골 마을에서 자란 카리나는 눈이 대단히 좋았다. 스스로를 의심할 정도로 똑같이 생긴 여자였다.
게다가 황궁에 와서 해링턴 백작부인에게 들은 바로는 유테르 공작가의 영애, 엘리시아는 수도에서 유명한 신관이라고 했다.
어린 나이에 성소에 들어 13세에 신관이 되었고 올해 스무 살이 되었는데, 사고로 인한 기억상실로 얼마 전에 파문당해 공작가로 돌아왔다나.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정말 신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존재가 아닌가 생각했다. 차기 대신관을 바라볼 정도의 신실함 속에 살다가, 신성력을 잃었는데 돌아간 자리가 공작가의 외동딸이라니 말이다.

“당신, 나에게 할 말이 있지 않아요?”
카리나는 분한 마음이었다. 자신이 로나를 만나기 위해 카페 카르디날에 며칠이고 찾아가 애타게 기다렸던 걸 떠올리면 울컥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나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눈물 나게 반가웠다. 그녀는 묻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 말이다. 얼마나 로나를 다시 만나길 간절히 바랐던가.

“거짓말을 한 건 미안해요.”

“거짓말이었군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기억을 잃고 있었어요. 지금도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고요. 그때는 로나로 살고 있었지요. 당신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는 바가 있어서 만나러 갔던 거예요. 신전과 가족들은 그 후에 우연히 마주쳐서 알게 되었고요.”

“그럼…… 지금도 기억이 안 나요? 엘리시아 당신이?”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은 거짓말이 아닌 거로 보였다. 그 순간 카리나의 가슴에 어떤 환희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 계시는 신관 엘리시아가 내려준 진짜의 것이겠지.’
제 미래에 대해서 조언해줬던 이야기 말이다.
수도의 대신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엘리시아가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을 잃었는데도 카리나 그녀의 사연을 기억했다면, 그건 분명히 다섯 주신과 오데르가 내린 진실한 신탁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게다가 수도에 오기 전, 영지에서 있었던 일까지 세세하게 말한 걸 보면 말이다.

“그때 당신이 내게 그랬잖아요. 내가 운명의 기로에 서 있다고요. 후회할 수도 있다고 말이에요.”

“맞아요. 그렇게 말했죠.”
카리나는 조급한 마음으로 엘리시아에게 물었다.

“당신 말대로였어요. 나는 후회하고 있어요.”
엘리시아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의 말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해서 무시했어요. 나는…… 내가 선택한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직접 그분을 만나본 게 아니니까.”
사비엘을 떠올리니 분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흐느낄 뻔했다. 카리나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엘리시아를 보았다.

“제발 부탁이에요. 제가 운명을 되돌릴 기회가 있을까요?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알고 싶어요.”
카리나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추슬렀다.


“사실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 카페 카르디날에 갔다가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이요?”

“거기서 어떤 남자를 만났거든요. 키가 크고 근사한 남자였어요.”
엘리시아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하는 게 보였다.

“그땐 몰랐는데…… 오늘 알았어요. 그분이 클레벤트 대공님이시라는 거. 아까 영애랑 춤추었던 분이요.”
카리나의 말에 엘리시아가 뭔가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물었다.

“이상한 일이요?”

“네. 카페에서 불량한 남자들이 제게 시비를 걸었어요. 그때 지나가다 저를 구해주셨거든요. 그런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카리나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요. 세상에 저랑 그 남자 단둘만 남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어요. 이름도 모르는 남자인데, 겨우 몇 분 전에 마주쳤을 뿐인데 어디선가 운명이 제게 바로 저 사람이라고 속삭이는 그런 느낌을…….”
엘리시아가 휘청거리는 걸 보고 카리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 괜찮아요?”

“네. 사실 몸이 좋지 않았거든요. 춤을 무리해서 추였던가 봐요.”
그녀의 얼굴이 정말 창백해서 카리나는 주춤했다. 뭐라도 해주어야 할 것 같아서 제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숄을 벗어서 건네주자 엘리시아가 거절했다.

“괜찮아요. 카리나 영애. 당신의 운명은 제자리를 찾아갈 거예요.”
그 말에 카리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하아.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 말이 필요했어요.”

“제게 고마울 것 없어요. 영애의 운명이 그렇게 인도한 걸 테니까요.”
기분이 좋아진 카리나가 물었다.

“몸이 좋지 않다면 내게 기댈래요? 마차까지 함께 가줄게요.”
***
무슨 정신으로 공작저에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엘리시아. 잠깐만 이야기 좀 하자꾸나.”

“내일. 내일 하면 좋겠어요.”

“잠깐이면 돼.”
꼭 걸어 잠근 방문 밖에서 마리엘라가 안절부절못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래요. 죄송해요.”
계속 방문을 열어주지 않자 마리엘라가 한숨을 쉬며 시녀들을 물리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흑.”
눈물이 흘렀다.
왜 눈물이 날까.
왜 자신이 슬퍼하는 걸까.
복잡한 머릿속에서 뭔가가 뱅글뱅글 돌면서 의문을 띄웠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카리나가 나타나기 직전, 스스로도 ‘혹시 두 사람이 만났는가’에 대해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자신이 놀라거나 충격받을 필요는 없다.

‘원작이란 건 참 대단하구나.’
그렇게나 일어나야 할 일이 그대로 일어나는 걸까.

‘그러면 나도 곧…….’
사비엘에게 좋지 않은 일을 당하게 될까 생각하니 손발이 차가워졌다.
일레온과 춤을 출 때만 해도 즐겁고 행복했다.
눈을 뜬 그를 마주 보는 건 매우 기쁘고 보람찬 일이었다. 매일 그가 눈을 뜨길 바라지 않았던가.
그의 손을 잡고 사방이 반짝거리는 곳에서 춤은 단둘이 추는 거구나 깨닫기도 했다. 첫 춤이란 예쁜 추억을 마음에 남기기에 좋은 구실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카리나의 질투를 자극하고 싶었던가보다.
춤이 끝나자마자 카리나가 달려와 제게 ‘운명’에 대해 확인하고 싶어하는 걸 보니 말이다.

“어쩌면 내가 로나라는 걸 아는 게 아닐까 했어. 그가 찾고 있는 게 나인 줄 알았는데.”
조금은 그럴 수도 있을까? 생각했다.
일레온이 눈을 뜨고 나면 더는 곁에 둘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아닐지도 모른다고.
대공저에서 나가게 될지 모르니까 착실하게 돈을 모으고 있었지만, 그 돈을 쓸 일이 없길 바랐다.
대공저에서 오래오래 일할 수 있기를.
일레온의 곁에서 계속 머물 수 있기를.
그가 자신을 간절히 필요로 해주기를.
그래서 이 낯선 세계에서 원윤지가 ‘로나’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기를 말이다.

“말도 없이 사라진 주제에.”
그런 걸 바랐다니.

“그런데 왜 울지.”
그토록 일레온에게 카리나를 데려다주기 위해 애를 쓰지 않았던가.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는데 속이 시커멓게 타버린 것 같았다.
다음 날, 엘리시아는 마리엘라에게 불려갔다.
저주처럼 제 운명에 따라붙은 유테르의 낙원 안에서, 한참 동안 그녀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제 어떻게 된 거니.”

“너무 긴장해서 예법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났어요. 정말 죄송해요.”
마리엘라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한참 엘리시아의 얼굴을 살피며 눈치만 보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저어, 마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무슨 일로?”

“엘리시아 아가씨를 찾고 계신데요.”

“엘리시아를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데. 혹시 하듄샤의 신도면 그냥 돌려보내도록 해요.”

“클레벤트 대공께서 아가씨를 뵙길 청하고 계세요. 그래서 응접실로 안내해드렸습니다.”

“뭐? 대공 전하께서?”
잠시 후, 급히 옷을 갈아입은 엘리시아는 오제 부인과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엘리시아를 보고 일레온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잘 지냈나?”

“……어제 궁에서 뵈었는데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일레온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뜬금없는 말이었다.

“차를 마시러 왔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