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해버릴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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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해버릴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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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해버릴 것 같거든
2022.04.20.
“차를 마시러 왔네.”
일레온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겉보기에 크게 티가 나는 것 같지 않아도 엘리시아는 알 수 있었다.
일레온은 정말 기분이 좋을 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곤 했는데 왼쪽보다 오른쪽이 조금 더 미세하게 많이 올라가 있었다. 반년 동안 그의 심기와 불편함을 감지하기 위해 일했던 그녀는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그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여기는 찻집이 아닌데요.”
지난밤 먹먹한 가슴으로 펑펑 우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잔 자신과는 정반대의 상태이다. 엘리시아는 일레온이 꼴 보기가 싫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고 있지. 나도 눈이 보이거든.”
그런데 여길 왜 왔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공작저의 메이드들이 차 세트를 날라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때 일레온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받도록.”
“이게 뭐죠?”
카페 카르디날의 자그마한 로고가 자잘하게 박힌 갈색 종이 봉투였다. 엘리시아도 익히 알고 있는 포장이었다. 왜냐면 대공저에서 나오던 마지막 날에 이걸 일레온에게 사다 주려고 했었으니까.
「초콜릿이 먹고 싶어. 카페 카르디날에서 팔던 거.」
일레온에게 줄 것이었다. 하듄샤로 끌려간 그녀는 그날 온종일 그 봉투가 손바닥 안에서 눅눅해질 때까지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그러고도 그에게 주기 위해 샀던 거니까,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버릴 수가 없어서 공작저 제 방의 서랍 한구석에 넣어놓았었다.
갑작스럽게 초콜릿 봉투의 공격을 받은 엘리시아는 어째야 할지 몰랐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이걸 아는 척하는 건 안 되겠지?’
엘리시아는 하듄샤에서 오래 지낸 신관이었다. 그러면 이런 세속적인 카페의 디저트 따위 알 리 없을지도 몰라.
그녀가 자연스럽게 어리둥절한 기색을 내보이자 일레온이 입을 열었다.
“카페 카르디날에서 파는 초콜릿이지.”
“이걸 왜 주세요?”
“좋아할 것 같아서.”
엘리시아는 멀뚱히 초콜릿을 쳐다보았다.
“어떤 여자가 이걸 좋아한다고 했었거든.”
“그럼 그분께 드려야죠.”
엘리시아가 시큰둥해하자 일레온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갑자기 등을 세우고 앉으며 제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지 않나.
“차 드릴게요. 뭘 좋아하세요?”
차를 마시러 왔다며 앉은 일레온을 빨리 보내고 싶었다. 그녀가 묻자 일레온이 턱을 문질렀다.
“설명을 해주지 않을 건가.”
“직접 골라보세요. 공작저의 차는 전부 값진 것들이라 무엇이든 맛이 좋답니다.”
어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엘리시아는 제 행동을 의식하며 말을 골랐다.
“영애가 골라주는 걸 마시도록 하지.”
엘리시아는 찬찬히 차를 살폈다.
일레온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진하게 볶은 새카만 블랙티가 눈에 들어왔다.
엘리시아는 그것을 일레온 앞에 놓인 찻잔에 한 스쿱이나 퍼넣었다.
물을 붓자 붉다 못해 검어 보이는 찻물이 진하게 우러났다.
“드세요.”
“이건?”
“블랙티예요. 아주 인기 있죠. 건강에 좋거든요. 저도 매일 마셔요.”
“흠.”
일레온이 손을 뻗어온 건 불시였다. 어깨가 넓고 팔도 긴 그는 자그마한 테이블 너머에서 일어나지 않고도 엘리시아의 턱을 쥘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엘리시아는 당황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대공 전하.”
샤프롱으로 앉아 있던 오제 부인도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이 자리에 일레온뿐이었다. 그는 여상하게 물었다.
“왜 화가 났지?”
“화가 나다니요? 제가요? 제가 왜요?”
“화를 내고 있잖아.”
“아니거든요.”
엘리시아는 울컥했다.
“어제 춤을 세 번 다 함께 춘 게 싫지 않다고 그대도 그러지 않았나.”
“네. 그랬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 일레온 나쁜 기만자 놈아. 차를 마실 거면 카리나 집에나 갈 것이지. 곧 죽어도 대감댁 노비였던 내 손으로 타준 걸 마셔야겠다 이거니?’
엘리시아는 자꾸만 열이 오르는 속을 달래기 위해 애를 썼다.
“몸이 좋지 않아서 이만 실례할게요.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응접실 밖으로 향했다.
달리 붙잡는 말은 없었다.
“정말 보기 싫어.”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엘리시아.”
“어머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마리엘라가 사용인을 보내지도 않고 제 방에 와있는 일은 없었다.
“클레벤트 대공은 돌아갔니?”
“네. 방금요.”
그녀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대공이 네게 무슨 이야기를 했니?”
“별건 없었어요. 차 얘기나 카페 카르디날 얘기를 했는데.”
만남 시간이 짧아 별일이 없었다.
“그래?”
그 별것 아닌 일을 곱씹는 마리엘라를 보자 엘리시아는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런 걸 묻는 거지?’
엘리시아가 보기에 마리엘라는 사서 걱정하는 타입이었다.
“제가 예법에 어긋나거나 실수한 건 없었어요.”
“그런 걸 걱정한 건 아니란다.”
마리엘라는 그제야 미소 지었다. 그렇지만 어딘가 고민이 많아보이는 얼굴이었다.
***
대공저로 돌아온 일레온은 의문에 휩싸였다.
“분명히 좋아한다고 했는데.”
눈이 보이지 않기에, 그는 더 세세한 것들을 기억하곤 했다. 보이지 않는 만큼 다른 감각, 다른 기억들로 보환을 해야 했으니.
「뭘 주문하시겠어요? 일레온 님.」
「뭘 주문할 수 있지?」
「커피, 차, 주스. 쿠키, 케이크, 초콜릿도 있어요.」
「넌 뭘 좋아하지?」
카페 카르디날에 함께 갔을 때, 그가 그녀에게 물었고.
「커피랑 초콜릿이요.」
「같은 거로 하지.」
분명히 그녀가 제 입으로 좋아하는 걸 고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 돌보듯이 아무 관심이 없고 시큰둥할 수가 있냔 말이다.
“그럼 뭘 좋아하지?”
옷을 사줄 때도 그렇게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방의 비밀을 알았어요. 이 자리에서 뭘 입어보든 전부 사게 될 것만 같아요.」
「뭘 걱정하세요. 대공 전하께서 벌써 스무 벌도 넘게 사셨답니다.」
「네? 뭐라고요? 저기요. 주인님. 쇤네는 이렇게 많은 옷이 필요하지 않습니다요.」
만약에 좋아했다면 거절하지 않고 입 다물고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레온은 한참 골똘히 생각했다.
“……돈인가?”
생각해보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할 때 로나가 가장 기뻐할 때가 ‘돈을 올려주겠다.’ 또는 ‘집사에게 얘기해서 금화를 더 주라고 해야겠군’이라고 했을 때였다.
“돈은 공작가에도 충분히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게다가 고심할수록 확실해졌다. 자신이 엘리시아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그가 답 없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집사가 대공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일레온이 눈을 뜨게 되어 몇 년 만에 집무실에서 그를 보게 된 집사는 방에 들어올 때마다 감격한 얼굴로 버벅거리다 들어 오곤 했다.
“무슨 일이지.”
“영지에서 걷은 세금과 특산물의 목록입니다. 이제까지 제가 정리만 하고 있었습니다만, 전하께서 보셔야 할 것 같아서.”
“고맙군.”
“뭘요.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지요.”
“오늘 유테르 공작가에 갔었지.”
“아, 아까 낮에 잠깐 출타하신 게. 그런데 그 댁에는 어쩐 일로 가셨습니까?”
유테르 공작가는 딱히 클레벤트 대공가와 연을 맺고 있는 가문이 아니었다.
“그 댁 영애를 보러 갔지.”
“네에? 아니 그럼 전에 갑자기 결혼하고 싶다고 하신 게.”
일레온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말씀해주셨으면 선물이라도 좋은 것을 준비했을 텐데요.”
“그 영애가 좋아한다고 했던 게 있었는데, 오늘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심각하게 말하는 일레온과 달리 집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원래 사람 마음이 그런 겁니다. 유행의 변화가 워낙 빠르니까요.”
“그런가.”
하아, 일레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뭐로 그녀의 환심을 사지?”
“대공 전하! 환심을 사다니요! 그런 말씀을…….”
베르나르가 펄쩍 뛰는 걸 보고 일레온이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니까 이상한가?”
“대공 전하께서는 가만히 서 계시기만 해도 호감을 얻으실 수 있는 분인데. 아아, 말도 안 됩니다.”
우리 대공님 최고. 세상에서 제일 멋진 대공 전하. 대공 바라기인 집사는 갑자기 울분이 치밀었다.
“그 영애는 어떤 분입니까? 대체 어떤 분이길래 전하께서 이렇게까지 하셔야 한단 말입니까?”
엘리시아를 떠올린 일레온의 입가에 진심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워.”
그런 일레온을 본 베르나르는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렸다.
“외모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 궁금하긴 했지만 말이야. 하지만 눈으로 보고 예쁘다고 느끼는 건 다른 문제 같군.”
“대체 얼마나 미인이시길래 대공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십니까.”
“오늘 차를 한 잔 달라고 했더니 내게 블랙티를 줬어.”
“네? 그건 전하께서 즐기시는 차는 아닌데요.”
집사는 돌려 말했다. 실상은 떫은맛을 질색하는 일레온이 싫어할 만한 차였다.
“그런데 그 차를 받고 웃음이 나더군.”
“네에?”
“내게 그 블랙티를 주는 그녀가 무척 귀여웠거든.”
“잘 상상이 안 가는 분이군요. 웃는 얼굴이 무척 아름다운 분인가 봅니다.”
조금 해탈한 얼굴로 주인의 연애 상담에 대꾸한 집사를 보며 일레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화가 난 얼굴이었어.”
“……그런데 귀여웠다고 하신 겁니까?”
“그래.”
“아, 예.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집사는 대화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우리 대공 전하께 저렇게 함부로 대하는 여자가 있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베르나르는 언젠가 그 영애를 한번 꼭 봐야겠다고 별렀다. 언젠가 손님으로 대공저에 발을 들이게 될 날이 온다면 나의 대공께 대접했다는 블랙티 보다 열 배는 쓴 차를 내어주리라.
문밖의 집사가 그러거나 말거나 일레온은 작게 중얼거렸다.
“벌써 또 보고 싶은 걸 어쩌지.”
***
다음 날, 일레온은 또 공작저를 찾아왔다.
“유테르의 낙원을 구경시켜줄 수 있겠나.”
일레온의 말을 들으며 엘리시아는 생각했다.
‘어제 그 블랙티는 도저히 안 되겠나 보지?’
차를 내달라고 하면 또 블랙티를 줄까봐 정원 구경을 핑계 대는 것 같았다.
엘리시아는 뒤에 멀찍이 선 오제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손님이 찾아오시면 아예 안 볼 수는 없나요?”
“네? 아, 아가씨.”
“이렇게 꼭 나와서 맞이해야 하는 건가 해서요.”
대공을 앞에 세워놓고 예법을 파괴하는 엘리시아를 보고 오제 부인이 뒷목을 잡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방금 건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
“들었지만 영애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엘리시아는 일레온과 함께 정원을 천천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설명을 해주지 않을 텐가? 영애의 목소리가 듣기 좋던데.”
“저도 모르는걸요.”
빙의해서 그런 거지만 기억상실이라는 콘셉트와는 아주 딱 맞아떨어졌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네.”
“안타깝군.”
“기억하지 못하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엘리시아의 입에서 툭 하고 튀어나왔다.
“덕분에 모든 걸 새로 시작할 수도 있잖아요.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잊은 것 중에 아쉬운 것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글쎄요. 아쉬운 게 있다면 잊지 않았겠죠.”
이상한 기분이었다. 엘리시아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원윤지의 생각이 아니라, 엘리시아가 그렇게 생각해서 말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이 튀어나갔다.
‘이렇게 남다른 외모에, 엄청 부자에 다정한 부모님에,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신분에, 차기 대신관이라고 불렸다면서?’
어찌 보면 엘리시아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자였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했을 리 없다고 여겨졌다. 그런데도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이 미묘하게 엘리시아의 신경을 건드렸다.
‘엘리시아가 되기 위해서 너무 신경 써서 그런가 봐.’
요 얼마간 그녀는 도망갈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엘리시아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자다. 그러면서도 그 삶에 끼워 맞춰져 사는 게 녹록지 않은 거 보면 그리 꽃밭 같은 삶은 아닐 수도 있었을까? 싶기도 했다.
문득 일레온이 입을 우물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뭘 드시고 계세요?”
“작은 사탕이야.”
“단 것 싫…… 어 하실 것 같은데요.”
일레온은 단 걸 싫어했다. 의아해하는 엘리시아를 보며 일레온이 싱긋 웃었다.
“사탕이라도 빨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해버릴 것 같거든.”
그의 시선이 엘리시아의 입술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