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무리한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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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무리한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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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무리한 부탁
2022.04.23.
“사탕이라도 빨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해버릴 것 같거든.”
장미꽃잎처럼 고운 색으로 부풀어 오른 엘리시아의 입술을 보며 일레온은 입안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목이 답답해서 정장을 차려입느라 두르고 온 타이라도 풀어버리고 싶었다.
“뭘요?”
“글쎄.”
뭘 하고 싶은지 알면 엘리시아가 그의 앞에 서 있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속을 알면 부리나케 도망가고 말 거라는데 일레온은 대공저의 저택과 거기에 딸린 토지라도 걸 수 있었다.
‘밑바닥은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는데.’
일레온은 남들이 우러러 빛나던 삶에서 가장 비참한 곳까지 단번에 떨어졌었다. 그 바닥에 비루하게 누워서 발버둥 치는 동안 ‘일레온이라는 사람의 가장 바닥’까지 스스로 목격했다.
진창에 빠진, 수렁 같은 날들이었다.
인간성을 버리고 자포자기한 일레온은 스스로를 짐승만도 못하다고 조소했다. 그런데 그 생활에 끝이 보이지가 않아서 그는 영혼부터 퇴색한 채 시드는 중이었다.
그보다 바닥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로나의 손을 잡고 하나하나 다시 일상을 찾아가면서는, 그보다 낫다고, 어제보다 낫다고 하루하루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은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것이었던 걸까.
엘리시아의 입술에 부드럽게 닿고 싶은 마음과 퉁퉁 부어오를 때까지 물어뜯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그녀의 웃는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자신 때문에 마음 아파 우는 모습도 보고 싶다.
품에 끌어안고 그녀가 가장 안심하고 쉴 수 있는 곳이 되어주고 싶다가도, 허리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거칠게 끌어안아 구속하고 싶기도 했다.
여기가 진짜 그의 바닥이었다.
눈이 멀쩡해져도 머리가 이상해진 것만 같다.
‘이제까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여성에게 연심을 품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미 성인식을 치르던 열여섯 나이에도 일레온은 어른의 것을 뛰어넘는 체격을 갖췄다.
그렇다 보니 젊다 못해 어린 데다 출중한 그에게 호기심 어린 유혹의 눈길이 머무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여인들이 한 명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스스로도 몇 번이나 의심했던 적이 있었다.
적의 수급을 베어낼 때는 또렷하게 보이던 얼굴이 무도회에 들어서기만 하면 그저 똑같은 꽃들이 피어 있는 꽃밭 같기만 한 건지.
장미는 장미요, 튤립은 튤립일 뿐.
예쁘지만 황궁 정원에 만발해도 그저 장미로군, 하고 지나치는 것처럼.
일레온에게 여태 여인의 존재가 음, 여자로군, 이 정도 감상에 그친 셈이었다.
그런데 처음 황궁에서 엘리시아를 본 날, 그녀가 로나라는 걸 깨닫는 순간 정수리부터 무언가가 자신을 관통하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참기가 너무 힘들어.’
그는 단련된 기사였다. 자기 자신을 담금질하여 살아 있는 제국의 검이 되었다.
그런데 엘리시아를 마주할 때마다 미칠 듯이 심장이 뛰며 제 손 닿는 곳에 두고 싶은 충동이 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손 닿는 곳에 두고 싶다고?’
일레온은 그 와중에 점잖게 표현된 속내를 곱씹었다.
‘당장이라도 대공저로 데려가고 싶군.’
모든 예법과 절차를 생략하고 말이다.
하지만 귀족의 혼사를 야만족 부락의 약탈혼처럼 치를 수는 없는 법.
엘리시아의 명예를 위해, 그녀 부모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일레온은 짐승처럼 날뛰는 본심 위로 번듯한 대공의 거죽을 들썼다.
‘그러고 보니 정말 웃는 모습을 못 봤잖아.’
집사가 그리 말하지 않던가.
「머리카락은 금발인데, 조금 흔치 않은 금발이랄까요. 부스스한 색이 아닌 잘 우러난 차처럼 색이 짙답니다. 그리고 눈동자 색은 보랏빛인데 이것도 아주 흔한 보랏빛은 아닙니다. 색이 진한 데다 웃을 때마다 초롱초롱하게 반짝반짝 빛을 내는데 순수하고 귀여운 인상이랍니다.」
아직 베르나르가 말했던 것처럼 초롱초롱 반짝반짝 빛을 내며 웃는 눈동자도 보지 못했다. 자신의 처지가 집사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니 이보다 한심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세요.”
일레온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을 알지도 못하면서 엘리시아는 그를 도발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네. 뭐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뭐라도 해보는 게.”
어느새 입안을 달게 메우고 있던 사탕은 녹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허락해주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샤프롱이 멀리서 흠흠 하고 잔기침 소리를 냈다.
“조금만 더 고민해보겠어. 아직은 후회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으니.”
일레온은 주머니에서 작은 사탕을 꺼내어 엘리시아에게 하나를 건네고 제 입에도 밀어 넣었다.
“맛있어요. 슈발리에가 만든 건가 봐요.”
엘리시아는 무심코 대공저의 요리사 이름을 입에 올리고도 사탕을 맛보느라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대공저의 요리사는 솜씨가 좋지.”
“어. 우와. 이런 데가 있었네.”
야트막하게 물이 흐르는 곳에 작은 수련들이 오밀조밀 피어 있는 것을 보며 엘리시아가 탄성을 냈다.
“여긴 너무 넓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게 너무 많아요. 앗, 우리 얼른 가서 저거 봐요.”
“그래.”
엘리시아가 ‘우리’라며 자신을 재촉하자 그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일레온은 나풀거리는 금빛 머리카락과 드레스 자락을 눈에 담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일레온이 돌아간 후, 엘리시아는 복잡한 생각들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분이 이상해. 아까 그건 뭐였을까.”
그와 있을 때 입 밖으로 굴러나간 말들이 꺼끌꺼끌하게 마음에 걸렸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진심인 것 같았다.
「덕분에 모든 걸 새로 시작할 수도 있잖아요.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잊은 것 중에 아쉬운 것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글쎄요. 아쉬운 게 있다면 잊지 않았겠죠.」
엘리시아 유테르의 진심.
“하아.”
한숨을 쉰 엘리시아는 가만히 제 가슴에 두 손을 포개어 올려보았다.
두근, 두근.
손바닥 아래로 여리게 뛰는 심장 소리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엘리시아는…… 혹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신관이었다면 뭔가 특별한 힘을 가졌을지도 몰랐다.
“그것보다 엘리시아는 어째서 신관이 된 거지?”
이 세계에서 신관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수도하는 몸이었다.
암구호를 알고 때가 되면 스스로 신전을 찾아온다는,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신관.
하지만 정말 신과 말이 통할 정도로 신력을 쌓는 건 다른 문제라, 대부분은 수련 신관에 머물러있고 정식으로 신의 선택을 받아 고위 신관이 되는 자는 드물다고 했다.
수련 신관이어도 하듄샤에 적을 둔 이상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훨씬 자유롭게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면도 있어 본인이 신관을 그만두길 원하면 퇴직하듯이 얼마간의 지원금을 얻어 하듄샤를 나갈 수도 있었다.
파문당해서 공작저로 돌아오기 전, 며칠 하듄샤에서 머무는 동안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신관은 결혼을 하지 않잖아?”
불분명한 원작 내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관인 그녀가 어째서 황태자의 약혼녀가 될 수 있었던 건지 말이다. 게다가 아이까지 가졌었다니.
“혹시 지금. 지금인가?”
갑자기 팔에 소름이 돋았다. 마침 일레온은 눈을 되찾은 시점이다. 그리고 카리나는 일레온의 마음을 얻고 싶어한다. 둘이 카페 카르디날에서 운명적 만남의 포인트도 지났고 말이다.
지금부터 자신이 사비엘과 엮여서 원작대로 끔찍한 죽음을 맞으면 나중에 일레온과 카리나가 이어질 때 두 사람을 단단하게 붙여줄 접착제 사연이 되는 걸까.
엘리시아는 차가워진 손끝으로 소름이 돋은 양팔을 비비며 치를 떨었다.
“안 돼. 그건 절대로 싫어. 이제까지도 얼마나 절박하게 살아남았는데.”
오직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말이다.
그러자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나 도대체 뭘 고민한 거야?”
여태 일레온 때문에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서운하고 복잡하던 것이, 책 밖의 독자의 자리로 돌아가자 명쾌하게 느껴졌다.
“일레온은 카리나를 찾고 있다고 했었지.”
데뷔탕트에서 나와 세 번이나 춤을 추었던 건 역시 그녀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그리고 카리나도 일레온과 잘 되길 바라고 있었고.”
세상의 소음이 멈추고 일레온과 단둘이 남은 것 같고. 아, 카리나의 사랑을 응원해줘야 하는 입장인데 왜 이렇게 배알이 꼴리는 건지 엘리시아는 그 이유를 오글거리는 표현 탓이라 여겼다.
“어쨌든 둘이 잘 되면 그 뒤엔 서로 사랑하면서 원작대로 될 테고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거잖아.”
그 전에 사각 관계의 희생양이 되는 것만 어떻게든 잘 피하면 말이다.
갑자기 그간 골치 아프던 복잡한 사념이 일시에 풀린 것만 같았다.
“그럼 여태 날 찾아왔던 이유는 뭐지?”
내가 로나인 걸 알 리는 없고.
“정말로 차를 마시러 온 거였나?”
황궁에서 내가 타 준 차 맛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던 걸까?
매일 차를 타주던 로나의 손맛이 느껴졌을지도.
엘리시아의 의문은 의외로 엉뚱한 곳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엘리시아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네? 제게요?”
오늘의 일레온은 다녀간 후였다. 엘리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로리에가 방긋 웃었다.
“아아, 아가씨. 너무 사랑스러우셔라. 그 손님은 아주 어여쁜 아가씨세요. 해링턴 백작가의 영애, 카리나 님이시라고 해요.”
“뭐? 카리나?”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무,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아니. 아니야. 응접실로 안내해주겠어?”
그 말에 안심한 어린 하녀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아이 참, 아가씨도. 큰 실수라도 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벌써 안내해드렸답니다.”
“그래. 고마워.”
괜히 미안한 마음에 엘리시아는 로리에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날려주고 응접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엘리시아 영애.”
그림같이 곱게 앉아 있던 은발 머리카락의 여자가 엘리시아를 보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카리나 영애. 편하게 앉으세요.”
마주 앉은 두 아가씨는 잠시 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일레온과도 차를 마셔서 그런지 앞에 놓인 디저트를 보기만 해도 식욕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저어…….”
“그런데…….”
입을 연 건 거의 동시였다. 카리나가 멋쩍게 웃더니 먼저 말하라는 듯 엘리시아에게 손짓했다.
“먼저 말씀하세요.”
“네. 아니 제가 할 말은 어쩐 일로 찾아오셨냐는 거였어요.”
“아아.”
카리나는 잠시 또 입을 다물고 찻잔을 어루만졌다.
‘무슨 일이지?’
그녀가 제게 말 못 할 일은 없을 거였다. 두 사람은 그럴만한 깊은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이윽고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카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클레벤트 대공께서 요 며칠 매일 공작저에 오셨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그 순간 갑자기 엘리시아의 머릿속에 번뜩 뭔가가 지나갔다.
‘아, 이럴 수가.’
일레온이 왜 매일 오는지, 별로 무슨 할 말도 없으면서 공작저에 와서 저를 보자 하는지 여태 몰랐는데.
“저어, 혹시 엘리시아 영애가 저를 도와주실 수는 없을까요?”
카리나가 초록빛 눈동자를 빛냈다.
“대공 전하와 제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러니까 일레온은 무도회 때 자신이 찾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했고, 반만 찾았다고 했었다. 그리고 카리나와 카페 카르디날에서 우연히 마주쳤지만, 선뜻 그녀에게 다가가긴 어렵겠지. 일레온은 연애 경험이 전혀 없었으니까.
‘일레온도 내게 카리나와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나?’
거기에 생각이 다다랐다.
선뜻 수락의 말을 하지 않자 카리나가 엘리시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너무 무리한 부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