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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반하기라도 한 거야? (32/151)


33. 반하기라도 한 거야?
202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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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무리한 부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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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무리하다니요. 카리나 영애를 도울 수 있다면 저도 좋아요.”

엘리시아는 입을 한껏 벌리며 방긋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카리나가 안심한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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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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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요?”

카리나가 가라앉은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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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수도에 아는 사람이 없어요.”

실은 속 알맹이가 원윤지인 엘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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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황궁에서 마주쳤을 때 제가 엘리시아 영애가 제게 거짓말을 한 것처럼 몰아붙여서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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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기분이 나쁘실 수 있지요. 저도 저의 불완전한 기억 때문에 폐를 끼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어요.”

엘리시아가 원래 뭘 어떻게 하고 살았는지 모른다. 그녀는 하듄샤 안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자신의 부모조차 일반 신도들처럼 개별 면담을 요청하면 그 안에서만 만났던 것 같다.

그런 삶이 잘 상상도 가지 않는데, 엘리시아처럼 행동해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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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를 도와주는 거로 전에 제게 거짓말한 걸 용서해줄게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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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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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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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카리나. 서로 편하게 대하기로 해요.”

할 말을 다 털어놓아 마음이 편해졌는지 카리나는 아까와 달리 부드러운 얼굴로 차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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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여주 버프일까?’

분명 설정에 의하면 수도에서 먼 시골에서 영지도 없이 이름뿐인 남작가 여식으로 자랐다던데. 어쩜 이렇게 차 한 모금을 마시는 태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지 절로 찬사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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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 부인이 봤다면 잔소리를 세 시간은 했을 거야.’

아가씨들끼리의 만남에는 안전 장치인 샤프롱이 필요치 않았다.

그렇지만 오제 부인에게 예법을 배우면서 매일같이 자세가 바르지 않다고 잔소리를 들어 바람직한 아가씨의 흠 없는 자태의 기준만큼은 누구보다 줄줄 욀 정도가 된 엘리시아의 눈에 카리나가 꼭 교본처럼 완벽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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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정말 잘 된 거야.’

어쩜 타이밍도 이렇게 좋을까.

베르나르의 말을 빌리자면 피에 물든 전장의 날뛰는 짐승 같던 대공이 수도 사교계 아가씨들 앞에만 가면 서리 맞아 시든 나뭇가지 같다 하지 않던가.

아직 파릇한데 불쌍해 보인다고, 진전 없고 잠잠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일레온의 눈을 뜨게 해준 건 ‘로나’였지만, 그녀는 잘못 개입된 인물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로나라며 나설 수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정작 빙의한 엘리시아는 데드플래그가 확실한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일레온과 카리나가 잘 되고 원작 엔딩을 보면 자신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밤바다 은하수를 옮겨온 듯 환한 불빛으로 인공의 별천지가 펼쳐진 번화가가 있고,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이 오기 한 달 전부터 장바구니 놀이로 바쁘던 날들로.

원윤지의 일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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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건 그 엔딩을 보려면 내가 살아야 하는데.’

그건 지금으로서는 정보가 부족하니 최대한 사비엘을 피해 다니기만 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자신이 죽지 않더라도 사비엘이 카리나의 선택을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여자가 오뉴월에 한을 품으면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 않나.

황궁에서 제게 매달리듯 일레온의 이야기를 하는 카리나에겐 사비엘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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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대로였어요. 나는 후회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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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해서 무시했어요. 나는…… 내가 선택한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직접 그분을 만나본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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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부탁이에요. 제가 운명을 되돌릴 기회가 있을까요?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알고 싶어요.」

 
오히려 조금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비엘과 만났던 걸 후회하고, 일레온과의 인연을 이어나가려고 안달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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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내게는 다행인 일이지.’

원래 원작에서는 엘리시아의 죽음이 카리나가 황태자 사비엘을 선택하지 않게 하는 장치로 쓰인 셈인데, 이대로 일레온과 딱 붙어서 둘이 잘 먹고 잘 살면서 그가 황제가 되는 엔딩에 골인하기만 하면 소중한 귀환 티켓이 손안으로 떨어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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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잘 부탁해요. 엘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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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카리나.”

카리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엘리시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차를 마신 후, 카리나를 배웅하고 돌아섰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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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좀 쉬어야지 생각하며 방에 돌아가자 또 마리엘라가 기별도 없이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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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저를 부르시지 그랬어요. 제가 어머니께 바로 갔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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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냥 생각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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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으세요?”

마리엘라는 조금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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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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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아니, 카리나 영애가 네게 뭐라고 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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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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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널 찾아오다니. 널 찾아올만한 이유가 없잖니.”

엘리시아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도, 얼마 전에 일레온이 다녀갔을 때도 마리엘라가 이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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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야기를 했니?”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야겠다는 듯 집요하게 묻는 마리엘라를 보며 엘리시아는 짧은 한숨을 삼켰다.

***

콘스탄스 제국의 유일무이한 대공 일레벤 클레벤트.

그가 유테르 공작저에 매일 발길을 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 공작저에 와서는 엘리시아를 만나기를 청하고 차를 마시거나 함께 책을 보거나 정원에서 산책을 한 후 돌아갔다. 오늘도 대공이 돌아간 후, 오제 부인이 마리엘라의 방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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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 같아요?”

마리엘라의 물음에 대답하는 오제 부인은 조금 상기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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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께서 엘리시아 아가씨를 마음에 두신 것 같습니다. 마님. 마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여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남자가 하는 행동이 뻔하지요.”

그녀는 엘리시아의 부족한 예법을 속성으로 가르치기 위해 특별히 청한 인물로, 귀족들이 많이 드나드는 큰 보석점의 여주인이었다. 지금 수도에서 가장 발이 넓고 확실한 중매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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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께서 어찌나 엘리시아 아가씨께 빠져 계신지. 제가 자리를 비켜드려야 하나 싶을 정도랍니다.”

오제 부인은 그 말을 슬쩍 꺼내며 마리엘라의 눈치를 보았다.

샤프롱의 역할은 미혼인 아가씨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집안의 어른이 허락한다면 확실한 진전을 위해서 암묵적으로 자리를 비켜주기도 했다.

클레벤트 대공이라면 제국 최고의 신랑감이 아닌가.

그런 이가 제 눈앞에서 목하 구애 중이니 아가씨를 단속하는 샤프롱의 어깨도 올라가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마리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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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안 돼요. 절대로. 절대로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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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아가씨께서 신관으로 오래 계셨으니 걱정하시는 바는 이해합니다만 요즘 수도 젊은이들의 유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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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는 아직 어려요. 오제 부인. 내가 부인을 청할 때 단단히 이르지 않았나요.”

마리엘라의 단호한 태도에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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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님. 저야 마님께서 분부하시는 대로 따르지요.”

그러면서도 오제 부인은 아쉬운 듯한 얼굴이었다.

귀족들은 연애라도 기브 앤 테이크였다.

마음에 둔 여인을 매일 보러 오는데 장갑을 벗은 손이나 포옹, 가벼운 볼키스 정도는 허락을 해주어야 확실하게 구혼장을 가지고 올 것이 아닌가.

클레벤트 대공은 놓치기에 아까운 대어였다. 이렇게 ‘아무 일도 없는 사이’로 지내다가 홀라당 사이가 깊어진 다른 영애에게 청혼이라도 하면 후회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풋내기인 정숙한 영애 대신 그것을 감시하고 조언하기 위해 샤프롱이 붙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기도 했다.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밀당에는 타이밍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오제 부인이 느끼기에는 대공에게는 진작 키스 정도는 허락했어야 했다. 저렇게 매일 찾아올 정도라면 말이다.

황제 부부와 황태자, 그를 낳아준 황녀를 제외하고 제국 안에 일레온보다 신분이 높은 귀족이 없었다.

그런 그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공작저 문턱을 닳도록 드나들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클레벤트 대공은 그 나이에 후계자, 소가주 신분이 아니라 어엿한 대공가의 주인이었다. 이미 작위를 물려받은 이가 대리인도 세우지 않고 직접 이렇게 공작저를 찾아오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의중을 확실히 공작 부부에게 전하고 있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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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엘리시아는 아직 건강이 온전치가 않아요. 결혼은…… 아직 생각도 하지 않고 있어요.”

자신의 조언이 먹히지 않자 오제 부인이 뾰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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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탕트를 치른 해에 구혼장이 가장 많이 들어온답니다. 스무 살에 데뷔탕트를 치르는 일은 없습니다. 마님. 보통은 성인이 되는 열여섯, 늦어도 열일곱에 치르지요.”

그 말이 사실이었다. 귀족끼리의 혼인은 아주 어릴 적에 정해질 때가 많았다. 그러면 약혼 기간을 오래 두었다가 성인이 되자마자 식을 올리는 경우도 많았다.

데뷔탕트를 제 나이에 치르지 못하는 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뜻인데, 그 사정 자체가 흠이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건강이라던지 경제적 사정이라던지 말이다. 그래서 제 나이를 지나 사교계에 인사를 올리는 것 자체가 문제 있는 혼처 취급을 받는 게 보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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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께서도 열여섯에 약혼하신 부군과 열여덟에 혼인하시고 바로 엘리시아 아가씨를 낳으셨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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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래도 경우가 달라요. 절대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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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생각해보시지요. 엘리시아 아가씨께서 데뷔탕트를 치르고 여태 구혼장이 단 한 장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시는 일이 없게 조언하는 것도 제 역할이겠지요.”

오제 부인이 못내 아쉬운 듯 그녀에게 눈빛으로 허락하지 그러냐는 시선을 던지며 물러갔다. 오제 부인이 방 밖으로 사라지자마자 마리엘라는 참았던 한숨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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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숨을 쉬어도 숨을 쉰 것 같지 않았다. 명치 끝에 불이라도 붙은 듯 가슴 속이 홧홧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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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했는데.”

일레온이, 그 클레벤트 대공이 하필이면 엘리시아를 마음에 두다니.

요 며칠 그것을 지켜보는 마리엘라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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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화병이 난 것 같았다. 가슴 복판에 뭔가 응어리가 져서 약도, 답도 없이 화끈거리고 쑤시며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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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내 딸을…… 우리 엘리시아에게 반하기라도 한 거야?’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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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설마 엘리시아가 아니라 로나를, 그 애가 로나라는 걸 눈치챈 건가?’

어느 쪽이라도 골치 아픈 일인 건 자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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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탕트에 내보내지 말 걸 그랬어.”

마리엘라는 후회조로 중얼거렸다.

엘리시아를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그녀의 거취를 두고 마리엘라는 혼란에 빠졌다.

그 아이는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그늘 아래 숨겨두었어야 했는데.

어린 딸 아이를 신전에 밀어 넣어 신관으로 만든 건, 마리엘라의 숙원이었다.

그렇지만 엘리시아가 신도, 가족도,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해 하듄샤에서 파문당하는데 막을 도리가 없었다.

마침 황후가 데뷔탕트를 권하길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잠시 시간을 끌며 자연스럽게 순리를 거스르지 말고 지내보려 한 것뿐이었는데.

무도회 날 엘리시아를 끌고 가다시피 플로어로 데려가는 클레벤트 대공의 서슬을 보며 마리엘라는 소름이 돋았다. 내 딸을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완력과 단호한 손길에서 숨겨지지 않는 집착이 보았다고나 할까.

마치 일레온 클레벤트 그가 한번 문 먹이는 절대 놓지 않고 우리까지 물고가는 맹수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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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는 그 남자만 아니면 되는데.”

제국 모든 남자 중에 단 한 명, 엘리시아의 짝이 될 수 없는 남자가 바로 그 오데르의 대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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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괜찮아. 아직은.”

마리엘라는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쳤다.

누구보다 가장 정신을 차려야 할 사람이 그녀 자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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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예상대로 일레온은 또 공작저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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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대공 전하.”

엘리시아는 처음으로 그를 향해 미소 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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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소개해드릴 분이 있답니다.”

일레온은 뭔가 얼떨떨한 듯했다.

하, 일레온 얼굴이 왜 저래. 불시에 카리나랑 이렇게 만나니까 그렇게 당황스럽나.

그는 조금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일레온은 대단한 미남이었기 때문에, 그 모습조차도 색다른 매력이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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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공 전하. 해링턴 백작가의 카리나입니다.”

카리나는 얇은 하늘색의 시폰 드레스를 입었는데, 오늘따라 하늘이 푸르고 맑아서 그런지 위에서 내려온 천사같이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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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군.”

일레온이 짧게 인사하자 카리나의 뺨에 발그레해지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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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들 논다. 아니, 잘 놀라고 하고 내가 비켜줘야 하는데.’

사실 이런 역할을 해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엘리시아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하녀들이 내온 차를 대접하고 적당히 날씨 얘기를 한 후, 카리나의 드레스와 일레온의 옷에 달린 금단추를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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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아가씨.”

그때 미리 손을 써 둔 로리에가 부르자 엘리시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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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시 어머니께서 부르셔서. 두 분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좋았어. 자연스러웠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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