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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눈먼 짐승의 꽃 (34/151)


35. 눈먼 짐승의 꽃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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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까 마치 내가 질투라도 하는 것 같잖아.”

질투는 아닐 것이다.

질투를 하려면 그 전에 전제되어야 하는 감정이 있지 않나. 하늘에 맹세코 자신은 일레온에 대해 그런 사심이 없었다.

물론 일레온을 대할 때 늘 진심으로 대했다. 그가 책 속의 인물이라고 진짜 실존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가식적으로 상대하지 않았다.

그가 얼른 운명의 상대인 카리나를 만나 눈을 뜨고 행복해지길 바랐다.

원윤지는 그 모습을 눈에 담고, 기쁘게 원래 세계로 돌아갈 테니 말이다.

일레온이 잘생기고, 멋지고, 때론 가엽고 안타깝다는 감정을 불러일으켰지만, 어디까지나 주인공을 보는 독자의 마음이었다. 적어도 이제까진 그렇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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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나가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했을 때도 너무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선뜻 좋다고, 일레온과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즉답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새삼스럽게 기분이 가라앉는다.

왜지? 왤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감정에 자신이 집중해선 안 될 것 같은 금기시 된 거부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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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는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당연하잖아.”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껄끄러운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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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그만 생각해.”

그래. 이건 서운함이다. 잘 키운 아들을 장가보낼 때, 시어머니가 가질 법한 그런 감정이다.

엘리시아는 얼추 비슷한 감정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자신의 상태라고 스스로에게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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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시간이 됐나?”

엘리시아는 조금 옆으로 쳐진 해를 보고는 일어서서 스커트에 묻은 흙을 털었다.

티 테이블이 있는 정원으로 돌아가자 카리나가 혼자 차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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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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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이 있으시다고 먼저 일어나셨어요.”

카리나가 상큼하게 미소짓는 얼굴을 보니 뭔가 잘 되었나 싶었다. 엘리시아는 애써 씁쓸한 기분을 감추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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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와는 이야기를 좀 나누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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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카리나가 살짝 볼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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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구나. 그래. 둘이 이야기를 잘 나눴구나.

엘리시아는 한숨을 삼키며 카리나와 억지로 마주 웃었다.

***

해링턴 백작가의 저택으로 돌아온 카리나는 신경질적으로 모자와 드레스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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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아가씨? 잠시만요. 제가 얼른 도와드릴게요. 아야.”

도와주겠다며 다가서는 하녀의 손을 밀치듯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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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내 손으로 하는게 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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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카리나의 거친 손길에 등 뒤에서 지그재그 형태로 교차하며 드레스를 고정한 실크 리본이 뜯기는 걸 본 하녀는 제 일거리가 늘어났다는 사실에 잠시 탄식했다. 하지만 곧 카리나가 벗어 던지는 옷과 속치마를 품에 주워 안으며 주인의 비위를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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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티타임은 즐거우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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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웠냐고?”

카리나가 조소하자 눈치를 보던 하녀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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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나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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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가씨.”

무슨 말을 해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카리나 탓에 어쩔 줄 몰라하던 하녀가 챙긴 드레스를 안고 잽싸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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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혼자 되니 새삼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카페 카르디날 앞에서 일레온과 마주친 후로 카리나는 다시 그를 만나고 싶어 골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접점이 없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제국 신화의 상징, 오데르의 붉은 눈동자를 보고도 그가 소문이 자자한 눈먼 짐승 클레벤트 대공이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황궁 무도회에서 황후가 첫 춤을 권할 때, 일레온은 순식간에 엘리시아를 데리고 플로어로 가버렸다.

그때 나서서 그와 춤을 출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미 원수처럼 여겨지는 사비엘을 보고 너무 화가 나 노려보며 기싸움을 하다 기회를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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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카리나는 황태자와 첫 춤을 추도록 해요.」

 
그 와중에 특별히 황후의 주관으로 사교계에 데뷔하게 된 바람에, 빼도 박도 못 하고 세라피나 황후가 시키는 대로 사비엘과 춤까지 춰야 했다.

무려 ‘첫 춤’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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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사교계에 데뷔한 걸 축하합니다. 카리나.」

 
춤을 추며 제게 말을 거는 사비엘을 보며 카리나는 실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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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께서는 정말 대단한 분이시군요. 적어도 한마디 사과는 하실 줄 알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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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사과라니. 내가 영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단 말입니까?」

 
태연한 작태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발등이라도 거하게 밟고 손을 뿌리치고 나가고 싶었지만, 이제 막 사교계의 꽃봉오리로 인사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면을 깎는 짓을 하면 저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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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저를 꾀어내셨죠. 황태자 전하의 순정은 참으로 값싸군요. 뜨거운 맹세도 하룻밤이 지나 해가 뜨고 나면 식어버리니 말입니다.」

 
카리나의 말에 사비엘은 퍽 재미나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주변에서 뱅글뱅글 돌며 춤을 추던 이들이 그녀와 사비엘 쪽을 힐끗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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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하다니. 먼저 밤을 청한 건 그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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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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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보내지 말아달라며 확고하게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나.」

 
카리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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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순정이 값싼 게 아니라 반대겠지. 그대가 싸구려라 내가 쏟아준 정을 하루밖에 감당하지 못하고 질려버린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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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어처구니없는 폭언에 카리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전까지는 사비엘이 제게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매달린다면 용서해줄까 하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에게 품었던 자신의 연심까지 단번에 거짓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춤을 추느라 그의 팔 안에 안긴 채 듣는 모욕은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랗게 남은 미련마저 깡그리 불살라버렸다.

그 후로는 도피하듯 일레온에게 더 집착하게 됐다.

엘리시아가 제게는 두 명의 남자가 있다고, 두 번의 기회가 있다고 했으니까.

제게는 행운이 따랐다. 남들은 이런 기회를 평생 한 번 잡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제겐 두 번이나 선택권이 있다니. 그런데 그런 두 번을 다 놓치는 멍청이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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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물러나는 일은 절대 없어.”

카리나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

이제는 일레온이 단 한 번 남은 마지막 기회였다.

***

방에 들어서자마자 오제 부인은 호들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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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마님. 큰일입니다. 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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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큰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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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마당에서 다 잡아놓은 혼처를 뺏기게 생겼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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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제 부인은 숨넘어갈 듯 헉헉거리는 호흡을 고르며 급히 보고 들은 것을 쏟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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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클레벤트 대공께서 찾아왔는데 글쎄 엘리시아 아가씨가 카리나 영애, 그 해링턴 가의 양녀 말입니다. 대공께 그 영애와 이야기 나눠보라며 자리를 피해주었다고 하시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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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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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진심으로 잘됐다는 듯 선선히 대답하는 마리엘라를 보며 오제 부인은 발을 동동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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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찍 자리했어야 했는데. 아가씨 두 분께서 차를 마실 거라기에 대공께서 함께하실 줄 생각을 못 했습니다. 송구합니다. 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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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엘리시아의 샤프롱이니 해링턴 가 따님이 자신의 샤프롱을 대동하고 온 게 아니라면 그분까지 보호해야 할 의무는 없지요. 엘리시아에게 불미한 일이 없다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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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대공께서는 엘리시아 아가씨께 마음이 있는게 분명합니다.”

오제 부인은 제가 클레벤트 대공의 눈도장이라도 찍은 양 의기양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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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뒤늦게 가서 살펴보았는데 카리나 아가씨와 단둘이 계실 때는 태도가 달라지시던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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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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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상대에 흥미가 없다는 표정이었어요. 건성으로 대답하시고요.”

마리엘라가 묻자 오제 부인은 신이 나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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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국에서 최고의 신랑감 아닙니까. 의무와 구속이 많은 황태자비 자리보다 훨씬 좋을 수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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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 부인.”

그녀가 흥을 맞춰주지 않고 엄격하게 부르자 오제 부인은 김이 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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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압니다. 알지요. 엘리시아 아가씨께 잃어버린 기억과 신력이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신다는 걸.”

오제 부인은 이번만은 물러날 수 없다 여겼는지 두 주먹을 꼭 쥐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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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엄격한 삶이 꼭 자식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닐 수도 있지요. 기억이 돌아올지 아닐지는 불분명한 것이니. 마님께서도 다시 생각해보세요.”

오제 부인은 오늘도 끝끝내 아쉽다는 표정으로 마리엘라의 방을 떠났다.

긴 한숨을 쉰 마리엘라는 거울을 보았다.

곧 마흔 살을 앞둔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미인이 보였다.

하얗고 주름 없는 피부는 요정처럼 맑고 투명했다. 커다란 보랏빛 눈동자와 꿀처럼 진한 금발은 엘리시아의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슬픔과 번민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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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마리엘라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꼭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날 밤, 마리엘라는 늦은 시간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작은 문으로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삯마차가 그녀를 수도 외곽으로 데려다주었다.

수도 변두리에 얹어놓은 듯 자그마한 주택으로 조용히 들어간 마리엘라는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공작부인의 잠옷에도 미치지 못할, 수수하고 장식이 없는 간편한 복장이었다. 평민들이 시장에서 장사할 때나 입을 법한 옷이었다.

그것을 입고 마리엘라는 머리를 꼼꼼하게 땋아올린 후 갈색 머리카락의 가발을 썼다. 그러자 조금 전의 공작부인은 사라지고 평민 여자처럼 보였다.

다시 주택 밖으로 나온 그녀는 후드를 꼭 여민 채 다시 삯마차를 잡아 타고 하듄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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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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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황궁 북문과 이어지는 하듄샤를 둘러싼 커다란 숲. 그 안쪽 깊숙한 곳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신관복 차림의 여자가 마리엘라를 보고 반색했다. 붉은 머리카락의 끝을 하얗게 물들인 하듄샤의 신관, 이리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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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으셨어요. 시간이 얼마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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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이리스는 몰래 가져온 여벌의 신관복을 내밀었다.

마리엘라는 숲속이라는 사실도 거칠 게 없다는 듯, 입고 온 옷을 벗고 신관복을 걸치고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쓰고 온 갈색 머리 가발을 이리저리 손질하자, 오는 동안에는 안쪽으로 숨겨져서 보이지 않던 희게 물들인 끝이 바깥으로 내려오며 대신전의 신관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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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으로 가세요. 로벤과 에쇼가 기다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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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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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서두르세요.”

마리엘라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아무렇지 않게 하듄샤의 정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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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하길.”

마리엘라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을 때였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이 창을 들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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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이 늦었군요.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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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고인의 가족분들을 위로하느라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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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마리엘라는 그들 앞에 검은 천을 바느질해서 만든 돈주머니를 내보였다. 장례식에 신관이 가서 기도해주면 받아오는 기부금이 든 주머니였다. 제법 묵직한 것을 내려다보며 문지기들이 창을 치우고 길을 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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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주신의 눈이 되어 봉사하시는 분들께 영광이 가득하길.”

인사를 마치고 마리엘라가 안으로 들어서자 로벤과 에쇼 형제가 그녀를 보고는 눈인사를 하고 바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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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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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앞을 보고 걸으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가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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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한드로 님께서 철야 기도회에 드셨으니 3시간 정도 나오시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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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요.”

마리엘라는 목걸이처럼 걸고 온 회중시계를 꾹 눌렀다.

하듄샤의 안은 미로처럼 구불구불했다. 외부의 신도들이 드나드는 구역을 지나면, 오래 지내며 숙련된 신관들 외엔 길을 잃고 빙글빙글 돌게 되어 있는 공간이 한참이었다.

하듄샤에 침입하려 한 자들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신도들은 이런 구역이 있는지도 모른다. 깊숙한 안쪽에 신관들의 거처가 있고, 그 아래 지하에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었다.

마리엘라는 로벤과 에쇼의 뒤를 따라 깊은 지하로 향했다. 몇 번을 왔었지만, 올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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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안에 나오셔야 합니다.”

돌아나가는 시간까지 감안해야 했다. 마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임에도 방 안은 환하고 밝았다.

돌을 깎아 둥글게 만든 방 안에는 거대한 제단이 놓여있고 그 위에는 두툼하고 커다란 책이 놓여있는 게 보였다.

제단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하듄샤 신관들만이 아는 암구호를 외워야 했다.

마리엘라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 그 말을 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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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곳이 <눈먼 짐승의 꽃> 책 속의 세계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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