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백 분의 일이라도 좋으니까 (37/151)


38. 백 분의 일이라도 좋으니까
2022.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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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요. 정해진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말이죠.”

입안에서 말이 툭 하고 입 밖으로 굴러나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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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치 자신이 아니라, 몸의 주인인 엘리시아가 그렇게 생각해서 튀어 나가는 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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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는 그대를 만날 운명이었나 보군. 운이 좋은걸.”

일레온이 해사하게 웃었다.

얼굴에 한 점 근심도 걱정도 없이 밝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마음에 드리운 알 수 없던 그늘이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문득 엘리시아는 그를 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레온의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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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래. 매일 하는 일이 먹고 자는 일밖에 없으면서.’

객관적으로 그랬지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막연한 피로감이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 원래 엘리시아가 가지고 있던 걸까? 그녀는 답답해서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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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고민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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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제가 무슨 고민이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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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데뷔탕트를 치른 후 구혼장을 단 한 장도 받지 못했다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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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어떻게 아세요?”

안 그래도 오제 부인이 그걸로 뭐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낯선 사교계에 남자들을 선보기 위해 여기저기 살롱에 드나들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아서 골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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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알게 됐지. 우선 이 집에 발걸음하는 이가 나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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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리원이셔서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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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가 원한다면 내일이라도 가져올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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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주세요. 그거 받았다고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일레온이 진지한 얼굴로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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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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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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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영애를 마음에 둔 것처럼.”

일순 새 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무그늘의 서늘함도, 슬슬 불던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엘리시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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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만큼 좋아해달라는 게 아니야. 그래도 백 분의 일이라도 좋으니까 그대도 내게 진심이길 바라.”

그 순간 말하지 않아도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로나라는 걸 아는구나.

그래서 반만 찾았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찾아왔구나.

밀려오는 감정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했다. 엘리시아를 아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만 그녀를 몰랐다. 스스로는 자신이 엘리시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로나에 가깝다고 여겼다.

일레온은 로나를 안다.

엘리시아 그녀가 로나라는 걸 그가 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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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

일레온의 눈이 오제 부인을 찾았다. 언제 사라졌는지 기척도 없이 시야에서 오제 부인이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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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께서 보시기에는 합격점인 것 같은데.”

일레온이 커다란 손으로 엘리시아의 양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내리는 일레온이 낮게 눈을 내리떴다. 그도 긴장을 하는 걸까? 붉은 눈동자를 반쯤 가린 긴 속눈썹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엘리시아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일레온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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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가벼운 접촉이 지나고 그녀가 눈을 뜨려 할 때였다.

다시 그의 숨결이 엘리시아에게 닿았다.

여태 감고 있는 눈꺼풀 위에.

숨을 참고 있던 코끝에.

그리고 그 아래 사리문 입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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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의 입술에는 조금 더 길게 머물렀다. 가볍게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코끝에 샌달우드 향기가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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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키스는 그대가 내게 먼저 해주길 바라.”

일레온의 말에 엘리시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것을 보고 그는 흐뭇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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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매일 여기 오는 이유를 알았나?”

엘리시아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수도 콘스탄스 에비뇽 최고 번화가, 블랑 에비뉴.

황궁까지 직선으로 이어진 넓은 도로 가운데로는 마차가, 그 옆으로는 사람이 걷는 인도가 분리된 길가에 말쑥하게 정리된 가로수와 꽃장식들이 화사함을 자랑했다.

그 옆으로 면면이 화려한 간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가게들은 모두 유리 쇼윈도를 갖춘 고급 상점이었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보통 귀족들도 몸을 사릴 만큼 어마어마한 사치품들이 서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별천지들 속에, 검은 바탕에 선명한 황금빛 글씨로 ‘Auge’라고 적힌 간판이 매달린 가게는 고급 상점들 사이에서도 일등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레온은 말을 시종에게 맡기고 성큼성큼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보자 매니저가 깍듯한 태도로 얼른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를 맞이하며 상점의 주인, 오제 부인이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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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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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지.”

인사를 생략하고 격의 없이 대하는 일레온의 태도는 신뢰와 친밀감의 표현이었다. 그에 오제 부인은 일레온에 대한 호감이 더욱 깊어졌다. 권력과 화제의 정점에 선 이가 제게 친근하게 대하는 건 어느 모로 보나 자신에 대한 환대였기 때문이다.

일레온은 부인의 앞에 서류 봉투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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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이게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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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해보도록.”

봉투 안에서 나온 건, 클레벤트 가문이 소유한 고급 다이아몬드 광산의 1년 치 채굴분을 오제 보석상에 독점으로 일괄 공급하겠다는 계약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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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런 것을 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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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이 애써주어서 영애의 손을 한번 잡을 수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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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감사합니다.”

오제 부인은 급히 머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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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께서 아직 그리 완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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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

오제 부인은 난처한 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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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공작부인께서 절차와 품위를 중시하시니 정식으로 구혼장을 보내시면 반대하실 이유는 없을 겁니다. 혼사는 가주이신 유테르 공작께서 결정하실 일이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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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일레온이 작게 한숨을 쉬자 오제 부인은 제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지나는 느낌이었다.

건강한 야생마처럼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루비보다 더 붉고 아름다운 눈동자에 수심이 어리다니.

일레온을 상심하게 하는 유테르 공작부인이 원망스러워서 제가 다 속상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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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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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닙니다!”

오제 부인은 잠시 사교계 최고의 중매인이라는 자부심과 품위도 잊고 펄쩍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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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가씨께서 흠이 많아 사교계에 내놓기 부끄러워하시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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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인정할 수 없군. 그녀에게는 흠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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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제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엘리시아 아가씨께 흠이 있는게 아니라, 상황이 조금 미묘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완벽한 신붓감이시지요. 사실 그 정도로 아름답고 정숙한 아가씨가 수도에 흔치 않답니다. 아마 올해의 신부 중 가장 아름다운 분이실 겁니다.”

‘흠’이라는 말에 못마땅한 듯이 하늘을 향해 올라갔던 일레온의 눈썹이 ‘올해의 신부’라는 말에 평온을 되찾아 제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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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일레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흐뭇한 미소를 짓자 오제 부인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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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이걸 화가들을 불러서 그림으로 남겼어야 했는데.’

그런 기분이 저절로 들었다.

일레온의 미소 유지에 엘리시아가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이 결혼을 꼭 성사시켜서 수도 거주민 중에 그의 미소를 못 본 사람이 없도록 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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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혼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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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제 선에서 거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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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전하려는 자들은 없었나?”

오제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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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혼장은 그렇다 치고 대공 전하께서 매일 유테르 공작저에 발길을 하신다고 소문을 내었어요. 감히 대공 전하와 경쟁하려는 가문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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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하군. 유능한 부인께 부탁드리기를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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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대공 전하. 호호호.”

체면도 잊고 새소리를 내며 웃던 오제 부인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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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하신 물건이 완성되었지요.”

그녀가 내어온 커다란 빌로드 상자는 제법 묵직해 보였다.

일레온은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은 티아라와 목걸이 세트였다.

백금으로 만든 프레임에 촘촘히 다이아몬드를 박아넣고 커다란 핑크 다이아몬드가 가운데에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세트로 만들어진 목걸이 역시 새하얀 달빛을 따오기라도 한 듯, 시리고 찬란한 빛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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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짧았는데 수고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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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의 일을 맡을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오브제를 보는 오제 부인의 얼굴도 상기되었다.

이 정도의 돈과 보석을 써서, 이런 어마어마한 보물을 만들 수 있는 기회는 보석 장인의 인생에도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이다. 만들 수 있는 재능과 실력이 있어도, 프러포즈용 반지나 데뷔탕트에 나갈 처녀들의 가느다란 목걸이나 만들어 팔며 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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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어울려.”

손끝으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티아라를 어루만지며 일레온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진하고 꿀처럼 흘러내리는 엘리시아의 블론드에는 황금빛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백금으로 제작한 티아라라면, 그녀의 머리 위에서 여신의 광휘처럼 빛이 나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며 일레온은 잠시 가슴이 벅찼다. 이 티아라와 함께 그녀의 머리 위로 씌워질 하얀 베일을 떠올리니 하루라도 빨리 그 모습이 보고 싶어 가슴이 뻐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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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건은 어떻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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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대공저로 갖다주게.”

프러포즈용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꼼꼼히 확인을 마치니 시간이 제법 걸렸다.

일레온이 대금의 지불각서에 시원스레 사인을 하자 오제 부인은 감동해서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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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 가세요. 대공 전하.”

가게 밖으로 나온 일레온은 말을 건네받고 대공저를 향했다.

그새 해가 져서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거리가 꽤 볼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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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수도 구경을 못 했다고 했었는데.”

기억을 잃어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신관으로 지내 유흥과 멀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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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함께 와야겠군.”

엘리시아가 별천지를 보고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니 제법 좋은 생각을 했다며 일레온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저로 혼자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곧 둘이 함께할 날을 상상하는 사내의 심장은 뜨겁기만 했다.

***

일레온이 돌아간 후, 방으로 돌아온 엘리시아는 조금 흥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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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정말 날 좋아하는 거야?”

혼잣말치고는 목소리 톤이 높아 부끄러웠다.

카리나가 했던 얘기가 있었지만, 일레온 본인이 아니라는데. 그런 건 이제 마음속에서 치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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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일레온을 좋아했나 봐.”

남주 버프 그런 게 아니다.

그냥 그의 곁에 머무르는 것이 좋았다.

여기 공작저에서 지내는 것보다 그쪽이 더 좋았던 것 같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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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키스도 아닌데 고작 입술에 뽀뽀 한번 했다고 가슴이 이렇게 설렐 일인가.

아침까지만 해도 우울한 기분에 휩싸여있던 엘리시아는 갑자기 세상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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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아.”

처음 호숫가에서 눈을 떴을 때 가장 처음 떠오른 기억.

원작 엔딩을 봐야 원래 세계에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꼭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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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이 변하는 이야기는 많은걸.”

그것 또한 흔한 클리셰가 아니던가. 어제까지만 해도 내 원작은 왜 이 모양인가 한탄하던 일조차 일레온의 말 몇 마디에 멀어졌다.

사비엘로 인한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일레온의 손을 잡는다면 말이다.

엘리시아가 들뜬 마음으로 방안을 배회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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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방문 밖에서 마리엘라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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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머니.”

그녀는 밝게 웃으며 방문을 열어주었다.

그 얼굴을 본 마리엘라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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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방에 들어오고도 마리엘라가 뭔가 망설이는 것처럼 보여서 엘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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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께서 네게 뭐라고 하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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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혼장을…… 주고 싶다고 하셨어요.”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엔 좀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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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마리엘라는 긴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좋은 얘기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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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그는 안 돼.”

역시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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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엘리시아는 별렀던 사람처럼 즉시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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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 부인도 대공 전하가 수도 제일의 신랑감이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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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는…….”

마리엘라는 말문이 막혔다. 사랑에 빠져 귀를 틀어막은 것 같은 딸에게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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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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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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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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