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눈먼 대공
(41/151)
41. 눈먼 대공
(41/151)
41. 눈먼 대공
2022.05.25.
“대공 전하께서, 그 클레벤트 대공 전하 말이에요.”
“무슨 일인데?”
“다시 눈이 멀어버리셨대요.”
로리에의 말에 엘리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눈이 멀다니?”
“저번에 대공저에서 사람 뽑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친구가 대공저에서 일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며칠 모든 일에 의욕이 없는 듯 지내던 엘리시아의 격렬한 반응에 로리에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친구가 얼마간 일을 했었어요. 대공저에 일거리가 한가득하다더니 갑자기 그만두게 됐다지 뭐예요. 왜 그만두냐 물어봤더니, 대공 전하께서 다시 앞이 보이시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서 예전처럼 고용인들을 다시 내보낸다고 했나 봐요.”
“앞이 안 보이다니. 왜? 이유가 뭐래?”
“그, 그건 저도 잘.”
엘리시아가 다그치듯이 묻자 로리에는 기가 죽은 듯 말꼬리를 흐렸다.
“……말도 안 돼.”
엘리시아는 희게 질렸다.
며칠 전, 구혼장을 주러 올 때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나.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된 걸까? 그가 오지 않는 이유는 제가 청혼을 거절해서라고만 생각했는데.
‘일레온이 앞이 보이지 않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눈을 뜬 후 그의 삶은 주인공에게만 허락된 탄탄대로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엘리시아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원에 등을 들고 오가는 경비들이 보였다. 엘리시아의 방에 검은 불꽃이 일어난 후로 마리엘라가 극도로 불안해하며 공작저의 호위와 경비를 늘렸기 때문이다.
‘내가 가야 해.’
하지만 도통 방법이 없어 보였다. 몰래 공작저를 빠져나갈 방법이…….
“앗!”
로리에가 염색약을 휘젓다가 에이프런에 크게 튀자 얼굴을 찌푸렸다.
“에이. 튀어버렸네. 아가씨. 저 옷 좀 갈아입고 와도 될까요? 세제에 담가놓으려고요.”
“로리에.”
“네?”
엘리시아는 로리에가 무척 약한 서글프게 웃는 얼굴로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내 부탁 좀 들어줘.”
잠시 후, 엘리시아는 로리에에게 빌린 메이드 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보닛 안에 꽁꽁 감추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늦은 밤인 데다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문은 경비가 그리 삼엄하지 않아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몇 번 그들을 피하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늦은 밤이라 삯마차도 다니지 않는 길을 엘리시아는 달렸다.
전개가 바뀌었다.
일레온의 눈이 다시 멀어버리다니.
그런 내용은 원작 어디에도 없었다.
‘나 때문인가 봐.’
달리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그녀는 헉헉대며 발을 멈추었다.
‘내가 약을 먹였기 때문이야.’
나타나지 않는 카리나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가.
그리고 마음에 걸렸던 순간, 순간들.
비를 맞은 꽃잎이 지는 걸 보았을 때.
엉망이 되어버린 약을 보며 망친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때.
일레온에게 그 약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으로 낫게 해줄 약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찮다. 네가 가져온 거라면 뭐든 열심히 마셔보겠다고 했잖아.」
일레온을 떠올리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냐, 그거 아냐. 정말 이상했다고.
먹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타버린 것 같다고. 색도 이상하고, 냄새도 이상하니까 버려야 할 것 같다고.
망설였던 건 컵을 잡고 어쩔 줄 몰라하던 제 손을 감싼 그의 체온이 따뜻했기 때문이다.
「나를 생각해 준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다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일레온은 자신이 주었기 때문에 그 약을 먹었다.
그렇게 아프고 힘들 줄 알면서도.
자신은 책임지지 못할 일을 벌인 셈이었다. 그렇게 옆에 있어주겠다고 했지만, 일레온을 고통 속에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그렇게 겨우 회복한 눈인데 그걸 다시 잃고 말았다니.
“나 때문에.”
원작을 눈곱만큼 알기로서니 주제도 모르고 나댄 결과였다.
여주가 먹였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해서라도 카리나를 그에게 데려갔어야 했는데.
엘리시아는 자책하며 대공저를 향해 달려갔다.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달리는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그녀의 족적을 따라, 돌바닥 위로 작은 물방울이 발자국 대신 남았다.
***
자정을 향해가는 시각, 태양궁은 고요에 싸여 있었다.
황제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밤바람에 꺼질 듯 말 듯 춤을 추는 촛불에 비친 그의 그림자는 기괴하게 커졌다가 나약하게 가늘어졌다를 반복했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시여.”
황제는 통고의 기도를 올렸다.
“우리를 신좌에 오르신 오데르의 영광 곁으로 이끄소서.”
콘스탄스 제국에서는 건국 신화를 섬겼다.
죽음 후에 신좌에 오른 오데르처럼, 삶이 다 하면 신적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 궁극적인 신앙의 추구였다.
“모든 번민과 오욕을 씻어내게 하시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황제의 표정은 힘이 부쳐 보였다.
“죽음에 이르는 날 오데르께서 앉으신 곁에 제 영혼이 머물도록 안배하여 주소서.”
황제의 기도가 끝날 즈음, 기척도 없이 누군가 태양궁에 들었다.
촛불에 일렁이던 황제의 그림자에 다른 그림자가 하나 더해졌다.
“정말 감동적이군.”
검은 수도복을 입은 남자의 목소리에 황제는 고개를 숙였다.
신의 말씀을 전하러 온 이는 얼굴을 마주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제국 황제마저 고개를 조아리게 만든 이는 의외로 젊은 목소리였다. 하얀 가면으로 얼굴 전체를 가린 남자는 제국 최고의 존엄을 앞에 두고도 기세등등했다.
“하문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신의 대리인이시여.”
“오늘 온 건 다른 게 아니고 예언서 때문이다.”
“무엇이든 말씀하소서.”
“엘리시아 유테르가 황태자비 후보라고 공표해라.”
“예? 유테르 공작가의 여식을 말입니까.”
“그래.”
황제는 잠시 생각했다. 황후인 세라피나가 사비엘의 짝으로 엘리시아를 탐탁하게 생각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시아가 신관이었다가 파문당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엘리시아 영애의 기억이 돌아오면 하듄샤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는지요?”
“엘리시아가 신관으로 하듄샤에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다.”
신의 뜻은 알 수가 없었다.
평생을 걸고 선량하길 바라시면서, 때때로 사소한 것도 그에게 바랐다.
그 이유를 마크시스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황태자비가 아니라 후보로 족하신 겁니까.”
“그리해두면 순리대로 흘러가겠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가 순종하자 신의 대리자는 올 때처럼 갈 때도 기척 없이 사라졌다.
고개를 든 황제는 그사이 수년은 더 늙은 사람처럼 기운이 없어 보였다.
“끄응.”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돌바닥에서 몸을 일으킬 때도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오데르의 힘.
혈족에게 한 대에 한 명씩에게만 내려오는 오데르의 피는 신좌에 오른 이의 후손이라는 증표였다.
그 피 자체에 많은 것들이 약속되었다.
남들보다 느린 노화, 긴 수명, 명민한 판단력과 맑은 정신, 우월한 힘, 그리고 소드마스터.
오데르의 피가 발현시키는 것으로 가장 먼저 소드마스터를 꼽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오데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남들보다 우월한 신체적 조건과 힘을 가지고도 소드마스터가 되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오데르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황제는 천천히 자신이 머무는 침실로 향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황제의 공간을 보는 그의 표정은 쓸쓸했다.
그 공간을 지나 한쪽 벽에 당긴 장치를 건드리자, 숨겨진 문이 달칵 하고 열리며 벽의 일부가 움직였다.
황제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단출하고 소박한 가구 몇 점이 놓여 있었다.
침대와 책상, 간이 서가에 책 몇 권이 꽂혀 있었다.
황제는 옷을 벗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오데르를 연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부황이 생전에 보였던 모습을 떠올리면 아무리 에너지가 남아도는 척을 해도 기억 속의 부친을 재현하는 건 무리였다.
겹겹이 가죽과 털로 꿰어 장식된 황제의 가운마저 무거워서 버거울 지경이었다.
천천히 옷을 벗은 황제는 거울을 보며 눈에서 렌즈를 빼었다.
달칵.
렌즈를 빼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황제의 눈동자는 붉은빛이 아니라 연한 파란색이었다.
“하아.”
황제는 긴 한숨을 쉬며 딱딱한 침대에 몸을 누였다.
화려한 황궁 안에서 인간 마크시스에게 허락된 휴식처는 호사스러운 침실 뒤에 숨겨진, 작은 방 한 칸 그곳이 다였다.
***
대공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을 지나 새벽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헉. 헉.”
철문에 기대어 엘리시아는 숨을 골랐다.
어찌나 힘들게 뛰어왔는지 이미 행색은 엉망이었다. 그녀는 옷 소매로 대충 땀을 닦았다.
하인들을 다시 내보냈다던 로리에의 말대로 대공저는 낯익은 분위기였다.
자신이 대공저를 떠나기 전, 일레온의 눈이 아직 보이지 않을 때와 똑같았다.
적은 불빛.
상주하는 고용인이 거의 없어 조용한 저택.
그리고 잠그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 대공저의 정문.
엘리시아는 조용히 철문을 열었다.
덜컹.
을씨년스럽게 삐걱거리면서 열린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두근, 두근.
긴장한 엘리시아는 저택으로 향했다.
“일레온. 일레온을 봐야 해.”
머릿속에 남은 생각은 그것뿐인 것 같았다.
그의 안위를 확인해야 한다고.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야겠다고.
「사과하지 마. 그렇게 깔끔하게 사과하고 다신 안 볼 것처럼 굴지 말라고.」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제발. 내게 이러지 마.」
선명한 붉은 눈동자에 슬픔이 담뿍 어렸다.
욱씬.
생각만 해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어째서였을까.
처음 대공저에 와서 어둑한 방 안에 엉망으로 구겨져 있던 일레온을 본 순간, 엘리시아는 그와 자신이 동류라는 느낌이 들었다.
기억이 전혀 없는 누군가의 몸에 빙의한 자신과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좌절하고 있는 그.
둘 다 마음대로, 바라는 대로 살기 힘든 삶이었다.
일레온에게는 손발이 필요했고, 엘리시아에게는 존재할 곳이 필요했다.
그들은 실체와 그림자처럼, 해와 달처럼, 낮과 밤처럼 경계 없이 서로에게 기대었다.
집사 베르나르는 로나가 온 후로 일레온이 달라졌다며 놀라워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일레온이 자신이 나타난 후 달라진 이유가 두 사람이 서로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내어주고, 무언가는 받는 관계였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그가 행복하길 바랐다.
카리나를 만나 눈을 되찾고, 예쁘게 살아가기를.
하지만 카리나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때부터 모든 것이 틀어졌다.
매일 공작저를 찾아오는 일레온을 보았을 때 싫지 않았다. 찾는 사람이 있다면서 제집에 발걸음하는 그를 보면 혹시 내가 로나인지 아는 걸까 기대하는 마음도 들었다.
왜냐면 공작저에서라고 엘리시아가 진짜 엘리시아였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눈먼 짐승의 꽃> 책 속 세계에서 그녀가 머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일레온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할 수는 없었던 걸까.’
그런 정답을 찾기 힘든 생각을 하며 내내 엘리시아는 괴로웠다.
조용한 공작저 안으로 들어서자, 막 2층 복도로 홀 위를 집사 베르나르와 눈이 마주쳤다.
“로나 양!”
집사는 그녀를 보자 놀란 얼굴로 득달같이 1층으로 달려내려 왔다.
“이 시간에 찾아오다니. 그동안 어디서 지냈습니까?”
“일레온 님은 어디 계세요?”
“침실에 계십니다. 그것보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동안 월급으로 준 돈까지 전부 두고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그게, 사정이 있었어요. 일레온 님은요? 눈이…… 다시 안 보이시다니 어떻게 된 거예요?”
엘리시아의 말에 베르나르의 낯이 흐려졌다.
“그건……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인지.”
문득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렇군요. 로나 양. 전에 전하께 드렸던 약이 무엇입니까? 그걸 다시 한번 구해야겠습니다.”
“네?”
“전하께서 드시고 눈이 회복되었던 약은 그것뿐인지라.”
“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주인님 먼저 뵐게요. 아직 깨어계실까요?”
“깨어계십니다.”
집사의 말에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침실로 향했다.
똑똑.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엘리시아는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침대 옆에는 은은하게 초가 하나 밝혀져 있었다.
“이, 일레온 님.”
천천히 다가가자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는 일레온이 보였다. 그는 눈을 뜬 채였으나, 눈동자는 보석같이 빛나던 붉은 빛을 잃은 상태였다.
그걸 보자마자 엘리시아는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흘렀다.
“어쩌다가…….”
말을 끝낼 수조차 없었다.
“와 준 건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레온에게 다가갔다. 그 와중에 제가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인 모습을 그가 볼 수 없다는 게 못내 슬퍼 눈물이 주룩 쏟아졌다.
“왜 왔어.”
일레온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언제든지 또 나를 버릴 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