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또 나를 버릴 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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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또 나를 버릴 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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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또 나를 버릴 거면서
2022.05.28.
“언제든지 또 나를 버릴 거면서.”
버리다니. 어떻게 스스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일레온의 말은 만년설에 묻혀 있던 얼음조각을 깎아서 만든 날붙이 같았다. 아주 차갑고,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그래서 한마디 한마디 들을 때마다 엘리시아의 심장에 서늘한 상처를 만들었다.
“네가 옳은 선택을 한 거야. 다시 눈이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깨달았어.”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선명한 눈동자의 색만큼이나 당당하고 기품이 서려 있던 말투에 언제 그랬던 적이 있냐는 듯 슬픔이 배어났다.
“언제 또 병이 시작될지 모르는 남자의 구혼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리 없었겠지.”
일레온이 느낀 비참함이 배가 되어 돌아왔다.
그런 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상처 주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엘리시아는 어쩔 줄 몰랐을 뿐이었다.
빌린 몸의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원작도 제대로 다 아는 것도 아니었다.
마리엘라는 일레온에게 주려던 초콜릿 봉투가 저절로 타서 사라진 건, 원작을 거스를 때 일어나는 부작용과 같은 것이라 했다.
그걸 눈앞에서 직접 본 건 마리엘라의 말을 듣고 이해해서 받아들이거나 상상해본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생생한 공포.
방금 타버리고는 재 한 점 남기지 않고 사라진 봉투처럼, 저렇게 되는 게 그녀 자신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부채질했다.
일레온은 무려 남주였다.
원작의 흐름에 무엇보다 정 가운데에 있어야 할 존재.
그의 곁에 있는 것이 무엇보다 위험한 일이었다. 누구보다 가장 직접적인 원작의 영향을 받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이 세계가 처음 맞이하는 원작의 시간이었다. 엔딩을 향한 첫 여정이 시작되려는 때.
‘아파. 너무 아파.’
마음이 아팠다. 뭔가 항변하고 싶기도, 그가 하는 말에 아니라고 부정해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을 날카롭게 후비는 통증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흐흑.”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엘리시아는 그제야 제 마음의 깊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일레온을 그저 남주니까 독자의 마음으로 애정했다면 이렇게까지 자신이 좌절할 리 없었다.
그가 내미는 구혼장을 받아주지 못한 것이.
아름답게 빛을 발하는 붉은 눈동자를 기쁘게 웃는 얼굴로 마주하지 못한 것이.
이토록 슬플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가.”
두 번째 절망.
처음이 아닌 이 상황이 도리어 일레온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드나 싶었다.
예전처럼 비통해하고 좌절하며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짐승 같은 모골송연한 소리로 울부짖지도 않았다.
그냥 시들어서 썩어 문드러질 날만 기다리는 상한 화초 같았다.
아까 침실에 들어올 때 보았던 모습대로 조금의 미동도 없이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허공을 보는 그는 가련해 보였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
말 한마디 한마디가 냉기를 품었다.
엘리시아 그녀를 향한 한기가 아니었다. 일레온이 겪고 있는 끝없이 어두운 그 세계의 온도였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어뜨렸을 때였다.
그때 그가 덮고 있던 시트 위에 놓인 손이 보였다.
‘떨고 있어.’
커다란 남자의 커다란 손.
제 얼굴을 한 손에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손이 고작 하얀 시트 자락을 모아 움켜쥔 채 떨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조심스레 그 손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일레온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무 데도 가지 않을게요.”
카페 카르디날에서 그랬던 것처럼.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손을 끌어다 제 뺨에 대었다.
“아무 데도.”
하지만 그는 그때처럼 제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져주지 않았다. 그것이 엘리시아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아직 그의 마음이 꽉 닫힌 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제게 평생을 언약하려던 남자의 마음이 이렇게 한순간에 돌아서지는 않았을 테니까.
“일레온 님.”
눈을 깜빡이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에 대고 있는 일레온의 손바닥 안으로 흘렀다.
“저는…… 로나예요.”
‘로나’라는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일레온이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당신의 눈이 되고, 손이 되어줄게요. 예전처럼.”
길이 든 작은 동물이 애교를 부리기라도 하듯 엘리시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고 뺨을 부볐다.
“또 네가 나를 떠난다면.”
일레온의 얼굴에 감정이 떠올랐다. 엘리시아가 이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무표정하던 가면에 금이 갔다.
“나는 살 수 없을지도 몰라.”
그의 손을 여전히 뺨에 눌러 댄 채로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 일레온 님.”
하나뿐인 진심이었다.
그가 바랄 것 같진 않지만 지금 일레온이 원한다면 그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 목숨을 태워서 그가 눈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주고 싶어.
엘리시아는 쉼 없이 눈물을 흘리며 초점 없는 잿빛으로 돌아간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그때 가만히 엘리시아의 눈물로 젖어들던 일레온의 손이 움직였다.
조심스레.
손끝으로 흐르는 눈물을 거두어 닦아주려 했다.
“그만 울어.”
“아. 죄송합니다.”
엘리시아는 어느새 그의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펑펑 운 탓에 그가 덮어야 할 시트가 축축해져 있었다.
“얼굴 좀 닦고 올게요.”
당황한 그녀가 막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몸이 그대로 일레온의 손에 잡혀 끌려갔다.
“가지 마.”
“……일레온 님.”
“잠깐이라도 싫어.”
귓가에서 낮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대로 있어.”
일레온이 협탁 위를 더듬어 손수건을 한 장 집어 건네주었다.
몇 시간을 대공저까지 뛰어온 데다 한참 울고 나니 엘리시아는 갑자기 기운이 뚝 떨어지는 걸 느꼈다.
‘안 되는데. 잠을 자려면 내 방으로 가서…….’
게다가 일레온의 품이 이렇게 익숙할 건 무어란 말인가.
그의 단단한 팔이, 넓고 폭신한 침대가, 대공님 침대의 시트의 사각거리는 촉감까지 거슬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엘리시아는 점점 의식이 흐려지는 걸 느꼈다.
‘일레온…….’
여기서 잠들게 두지 말아 달라고, 다른 하인이나 베르나르를 불러서라도 방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뭔가로 딱 붙인 듯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
스르르 눈이 감기자 불가항력을 받기라도 한 듯 엘리시아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일레온은 그러고도 초점 없는 눈동자로 한참 동안 품 안에 안겨 있는 엘리시아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시아.”
가만히 이름을 불러도 그녀가 미동도 하지 않자 그는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품에 안겨 있는 엘리시아가 아무런 무게도 나가지 않는 것처럼 살짝 들어 자세를 고치자 그녀는 조금 전보다 그에게 더욱 꽉 안긴 자세가 되었다.
일레온은 부어있는 엘리시아의 눈가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내내 울던 뺨은 그렇게 눈물을 닦아내고도 아직도 물기가 남기라도 한 것처럼 촉촉했다.
그 생생한 감촉을 느낀 일레온이 삐딱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잘못했잖아.”
신의 후손, 신의 핏줄.
오데르로 태어나 우월한 존재로 살아온 일레온은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해본 적이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는 부정, 긍정을 논할 수 없는 상태로 광인처럼 지냈으니 제외하고.
그런데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엘리시아의 앞에만 가면 머저리가 되곤 했다.
엘리시아는 다방면으로 제게 무심하게 굴었다.
카리나와 자신을 붙여주기 위해 자리를 피해준 거란 사실을 알았을 때 정말 뭔가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기분이 상했는데.
분명 불쾌한 마음으로 간다는 기별도 없이 대공저로 돌아가기까지 했는데.
놀랍게도 일레온은 대공저에 도착하자마자 후회했다.
엘리시아가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화가 났을 거라 생각하지?」
「……모르겠어요.」
「하, 그걸 모른다?」
대놓고 마음이 상했노라 티를 내보기도 했다.
「카리나 영애는 아름답고 현숙한 분이에요.」
「전하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찾고 계신 분이 있다고요. 찾긴 찾았는데 반만 찾았다고. 저는 그분이 카리나 영애일 거라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만들어드리면 좋아하실 줄 알고…….」
엘리시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향이 엇나간 이야기를 하며 일레온의 화를 돋웠다.
그가 원하는 건 자신과 엘리시아 둘의 미래지향적인 대화였다.
그런 그에게 다른 여자를 만나보라고 권하고 소개하려고까지 하다니.
여태 자신이 열을 올리며 했던 행동들은 다 뭐란 말인가.
안 하던 짓을 해서 뭔가 대단히 그녀가 인정할 수 없을 만한 행동을 한 게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정도였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대를 보러 왔다는 걸 믿어줄 건가. 구혼장이라도 써와야 진심이라 생각해줄 텐가?」
「구, 구혼장이라고요?」
「보통 영애들은 그런 형식적인 서류를 주고받기 전에 데이트를 먼저 하는 걸 좋아한다던데. 그대는 정말 남다르군.」
「뭐예요. 지금 저를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거예요?」
「그래.」
결국 그 상황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어이없게 고백을 해버리게 되지 않았던가.
정말 제대로 잘 해주고 싶었는데.
엘리시아에게 오래오래 예쁜 추억으로,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만한 인상적이고 훌륭한 고백을 하고 싶었다.
그 배경이 될만한 장소, 시간, 필요한 무언가까지.
엘리시아에게 빨리 고백을 하지 못한 건 일레온이 그답지 않게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척 설렜기 때문이었다.
아니, 나다운 게 뭔데?
그는 자신이 원래 이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준 여자에게 다정하고, 세심한 남자.
여태 상대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엘리시아를 떠올리며 타인의 기쁨을 위해 움직이는데도 결국 자신이 행복해지는 마법 같은 일에 자주 가슴이 벅차올랐다.
서둘러 합법적으로 그녀를 대공저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과, 지금 이 순간을 잠시라도 더 만끽하고 싶은 풋내나는 행동 사이에서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그걸 거절할 줄 몰랐지.”
엘리시아의 손은 아주 예뻤다. 희고 자그마한 손은 손가락이 가늘었는데 손끝에 자리한 손톱까지 고운 분홍빛이라 작고 예쁜 꽃 같았다.
제 손의 반은 되려나? 싶게 아담한 손이 황궁 연회장에서 제 어깨에, 제 손 위에 차례로 놓였을 때 일레온은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그동안 엘리시아가 저 손으로 제게 식사를 떠먹여 주고 입가를 닦아주었다고 생각하니 아까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 손에 어울리는 반지를 주문하려고 얼마나 고심했던가.
하지만 반지 주인은 아직 그걸 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일레온은 엘리시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제 눈가로 손을 움직였다.
탁.
손끝으로 살짝 눈동자를 건드리자 붉은빛을 가리고 있던 렌즈가 빠졌다.
“놔주지 않을 거니까.”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붙잡는데 진심이었다.
이렇게 가증스러운 연기를 할 정도로.
***
어떤 꿈은 그것이 꿈이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잠깐 졸았다가 깨어난 일레온은 그답지 않게 무거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상한 일이군.」
오데르인 그가 피로를 느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전쟁터에서 크게 상처를 입거나 해서 과하게 실혈을 했을 때나 가끔 겪을 만한 수준이었다.
「무슨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뭔가 ‘나다운 게 뭔데?’ 같은 사춘기 소년이나 할법한 말을 곱씹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언가 뿌듯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겪어본 적 없는 감각만이 생생하게 가슴에 남아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사이에 쌓인 일거리들이 가득하였다.
「차라리 검을 휘두르는 쪽이 더 편할 것을.」
이렇게 하나하나 들여다보지 않아도 될 일이니 말이다. 일레온이 물을 한 모금 삼키며 검은 글자에 눈을 고정하려 할 때였다.
똑똑.
「들어와.」
충직하고 유능한 집사 베르나르가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지?」
「장례식에 참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