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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비밀 잘 지키면 (43/151)


43. 비밀 잘 지키면
202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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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 참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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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어느 가문이지?」

 
일레온이 무심하게 묻자 베르나르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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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테르 공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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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테르 공작가라고? 아직 유테르 공작이 젊은 나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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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공작님이 아니라 그 댁 영애가 급사했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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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렇군.」

 
베르나르가 바삐 일에 집중하는 제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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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 둘뿐인 공작가가 아닙니까. 바쁘시더라도 직접 가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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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께서도 참석하실 예정인가?」

 
그 말에 유능한 집사가 얼른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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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그 영애 말입니다. 황태자 전하의 패악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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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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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황실에서 쉬쉬하려고 후계도 아닌 공작가 외동딸의 장례에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모두 참석하시려는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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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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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테르 공작 부부는 충격이 커서 딸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영지와 수도 저택을 팔겠다고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제야 서류를 살피며 건성으로 듣는 듯하던 일레온이 고개를 들었다. 무려 건국 신화의 공신 중 하나인 공작 가문이 황실에 항의하는 뜻으로 작위를 버리겠다고 시위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쯤 되니 겨우 흥미가 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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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조만간 제국의 공작가가 하나로 줄겠군.」

 
클레벤트 대공가와 유테르 공작가는 서로 교류가 그다지 없었다.

예전 유테르 공작가라면 중앙 귀족 정치의 중심이었던 시절도 분명 오랜 세월에 녹아 있었다. 지금 와서는 가주인 질리언 유테르 경이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학자다운 면모에 괴짜 같은 은둔형 성격이라 저택에 틀어박혀 사교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는 편이었다.

권력의 중심은 과학과 기술, 투자와 이재에 밝은 신흥 귀족에게 옮겨가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

황녀를 어머니로 둔 일레온에게는 그런 것조차 그리 큰 근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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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에서 지내니 시끄럽군. 되도록 빨리 전선으로 복귀하고 싶을 지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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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아직 눈을 회복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주인 바라기인 집사가 펄쩍 뛰자 일레온은 장난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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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알면 얼마나 걱정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눈을 회복하시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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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자연스럽게 대답하고는 일레온은 잠시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눈을 어떻게 회복했지?

누가 내 눈을 고쳐주었다고?

그 부분이 무언가로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흐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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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얼른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집사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서둘러 나가버렸다.

일레온은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서류에 마저 사인을 휘갈겼다.

장례식이 열리는 곳은 황궁의 북쪽, 성벽을 맞대고 있는 성소 하듄샤였다.

일레온은 처음 발을 들인 낯선 장소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전체적으로 흰 석재를 이용하고 초록색 잎을 드리운 사철나무들로 정원이 꾸며져 있어 쌀쌀한 겨울인데도 보기 좋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세상을 떠도 아쉬움 없을 이가 아니라 젊은 아가씨의 장례다 보니 무거운 공기가 하듄샤를 감싸고 있었다.

죽음의 무게.

전쟁터에서 수없이 많은 이의 목숨을 거둔 그에게 장례란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호사스럽게 꽃장식이 놓인 장례를 보며 작열하는 태양에 타오르는 모래밭에, 때론 얼어붙은 동토 아래에 겨우 수습해서 묻고 돌아온 부하들이 생각났다. 그렇게 타인의 장례에서, 지인이었던 이들의 장례를 추억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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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

 
집사가 제게 황금으로 만든 장미꽃을 건네었다. 그가 추모를 할 차례였다.

검은 제복을 입고 제단 위에 놓인 관에 다가가며 일레온은 잠시 조소했다.

차림새 때문에 일레온이야 말로 피에 미쳐 날뛰는 짐승, 전장의 사신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이미 수없이 많은 귀족들이 다녀갔는지 젊은 영애의 관 바깥까지 황금 꽃송이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일레온은 과한 노잣돈에 한 푼 보태어주기 위해 빈틈을 찾아 황금 장미를 찔러넣었다.

몸을 일으킬 때, 그제야 안에 누워있는 장례의 주인이 보였다.

아주 예쁜 여자였다.

그러나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레이스와 손목까지 내려온 소매 사이로 이상한 흔적이 보였다.

마치 목을 조르고 손목에 밧줄을 묶었던 것 같은.

핏기가 가신 얼굴은 죽음을 맞은 이라기보다는 잠든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를 지켜보던 일레온의 눈이 커졌다.

……죽었다고? 엘리시아가?

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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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데도 가지 않을게요.」

 
엘리시아는 그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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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 일레온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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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그가 바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해주었다.

그런데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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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일레온의 눈이 침대 위를 훑었다.

없다. 없어. 엘리시아가 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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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그가 소리를 지르며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려 할 때였다.

달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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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레온 님.”

침실문이 열리며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시아가 황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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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세요?”

그는 엘리시아를 허겁지겁 끌어안았다. 너무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놀란 얼굴로 보던 엘리시아가 이내 그의 머리와 어깨를 다독이듯이 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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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놀라셨어요? 땀 좀 봐요.”

익숙한 듯 메이드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엘리시아가 그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하지만 일레온은 그녀의 허리에 두 팔을 감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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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꿈을 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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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꿈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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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기억 안 나. 무서웠어.”

일레온은 잔상처럼 밀려오는 꿈의 마지막 장면을 잊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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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깼는데 네가 없었잖아. 어디 갔었어?”

말도 안 되는 탓을 지껄이며 일레온은 엘리시아에게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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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이었어요. 정말. 씻고 옷을 갈아입었을 뿐이에요. 집사님과 잠시 이야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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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고 했잖아?”

악몽의 여파로 어처구니없는 말을 연속으로 하고 있었으나 엘리시아는 그가 다시 실명해서 예민한 탓이라 여겼는지 아무렇지 않게 그를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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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일레온 님.”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환장하게 좋았고, 서서히 돌아온 이성에 수치심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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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체면이 말이 아니군.’

도대체 고개를 들고 어떻게 엘리시아를 봐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제가 앞이 보이지 않는 거로 아는 게 천만다행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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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옷을 가져다드릴게요.”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축축하게 젖은 셔츠 때문에 등에 한기가 느껴졌다. 그쯤 체온을 뺏긴다고 일레온이 큰일 나는 건 아니었지만, 엘리시아는 토닥여주다 손에 느껴지는 찬기운이 신경 쓰인 것 같았다.

그가 팔을 풀자 엘리시아는 재빨리 그의 새 셔츠를 가지고 왔다.

엘리시아는 예전에 늘 했던 대로 일레온의 손에 셔츠를 쥐여주고 방에서 나가려 했다. 일레온은 무엇이든 되도록 그가 혼자 하길 원했기 때문에 엘리시아가 직접 무언가를 다 해준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밀어내는 여자에게 보상심리가 타오르는 일레온은 평소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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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아입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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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엘리시아가 당황한 듯 입술을 동그랗게 벌렸다.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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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힘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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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변명처럼 덧붙인 말에 엘리시아가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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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이대로 계세요. 단추를 풀게요.”

엘리시아가 고개를 숙이자 달콤한 체리블러썸 꽃냄새가 제게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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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부끄러워하잖아?’

그가 해달랄 때는 그러려니 대답하고는 막상 셔츠 단추를 푸는 엘리시아의 뺨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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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겠네.’

일레온은 제 짧은 판단을 후회했다.

엘리시아가 단추 다섯 개를 푸는 시간이 다섯 시간쯤 걸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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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다 됐어요.”

그녀가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물론 렌즈가 눈을 가려주어 엘리시아는 몰랐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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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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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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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를 벗어야 새 걸 입혀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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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돼, 됐어. 이건 내가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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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러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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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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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식사 준비를 할게요.”

엘리시아와 일레온은 마주 선 채 어색하게 허둥댔다. 그녀가 방 밖으로 사라지자 새 셔츠를 품에 꼭 안은 일레온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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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해본 놈들이나 하겠군.”

도대체 어색해서 이런 짓을 며칠이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또 잠시 후 바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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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해보세요.”

제게 입술을 조금 내밀고 뜨거운 수프를 호호 불어서 떠먹여주는 엘리시아를 보면서 일레온은 입을 벌리는 것도 까먹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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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워.’

오늘 이 생각을 몇 번째 하는 건지. 매우 한심한 작태였지만 일레온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엘리시아를 보느라 눈과 마음이 모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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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세요? 입에 맞지 않으세요?”

그가 입을 벌리지 않자 엘리시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일레온의 표정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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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기울인 거 귀여워.’

머리에 화살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어제까지 멀쩡했는데 하루 만에 사람이 이렇게 돌 수가 있나.

일레온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자조적인 태도로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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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괜찮아. 아까 좀 뜨거웠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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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은근 오랜만이어서.”

엘리시아가 배시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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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있잖아요. 일레온 님.”

응, 나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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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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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게.

엘리시아가 떠먹여준 수프 일곱 숟가락에 일레온은 영혼을 판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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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저를 로나로 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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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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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제 몰래 집을 나왔거든요. 부모님께서 저를 찾고 계실 거예요. 집사님은 제가 누군지 모르시잖아요. 다른 하인들도 그렇고요.”

엘리시아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혼사는 가문과 가문의 문제였다. 클레벤트 대공가의 가주는 일레온 자신이지만, 엘리시아가 시집오려면 유테르 공작의 허락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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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누구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저는…… 일레온 님 곁에 있을 수는 없을 거예요.”

추문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소문은 없는 게 좋았다. 다행히 여기는 ‘로나’가 반년 넘게 지낸 곳이었다.

그녀를 로나로 아는 이들이 머무는 곳.

그 틈에 녹아들 듯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제 메이드가 된다면 예전처럼 자연스레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일레온의 심기를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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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으세요?”

그렇게 물으면서도 엘리시아는 의아한 듯했다.

누구보다 대공가 가주로서 귀족들의 예법에 정통할 그거 못마땅한 기색을 폴폴 풍기고 있으니 말이다.

일레온은 좋다 싫다 대답 대신 엘리시아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천천히 제 쪽에 끌어당긴 손등에 가만히 입술을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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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레온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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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와는 이런 거 못 할 텐데.”

엘리시아가 매몰차게 손을 거두어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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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요.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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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손해 보는 것 같은데.”

그런 일레온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엘리시아는 안절부절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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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 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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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큰일.”

그가 뻔뻔하게 대꾸하자 엘리시아는 속이 상한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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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에 있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그러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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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위해서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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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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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어떻지?”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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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저도 일레온 님이랑 있고 싶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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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당분간은 로나라고 여길 테니까.”

그제야 엘리시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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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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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말씀을.”

나 좋자고 하는 일인걸.

일레온이 기꺼운 마음에 희희낙락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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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잘 지키면 상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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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상?”

……하고 묻자마자 엘리시아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끌어당겼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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