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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잠깐만 엘리시아 하면 안 돼? (44/151)


44. 잠깐만 엘리시아 하면 안 돼?
2022.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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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레온은 믿을 수가 없었다.

엘리시아의 입술이 닿은 건 왼쪽 뺨이었는데, 그 자리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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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왜 이러지?’

가슴 근육을 뚫고 몸 밖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고장 난 심장이 널을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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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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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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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비밀 잘 지키면 상은 자기 전에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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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 그래.”

일레온이 허둥거리자 금방 공기가 이상해졌다. 그와 엘리시아는 서로 내외하며 또 어색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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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럼 저 잠깐만 집사님께 다녀올게요.”

엘리시아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 어디 갔었냐고 떨던 것이 마음에 걸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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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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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가 허락하자마자 엘리시아는 부끄러운 듯 두 뺨을 손으로 감싼 채 침실에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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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처럼 대해달라고?”

본인이야말로 자신의 행동이 ‘로나’와는 다르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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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왜 그런 꿈을 꾼 거지?”

엘리시아의 장례식이라니.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재수 없는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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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생생했어.”

그래서 그렇게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마치 정말 실제로 일어난 일을 본 것처럼 모든 것이 그렇게 현실 같았다.

공작가의 젊은 여인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에 그러려니 하며 영지 예산안에 사인하던 자신의 손놀림과 시답지 않아하는 태도까지도 너무 진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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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현실의 반대라지.”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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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가 내 옆에서 오래 살게 될 거다 그런 뜻인가?”

일레온은 애써 악몽의 의미를 찾으려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두고두고 잔상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는 딴생각을 하기 위해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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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아질 만한 생각을 해.”

엘리시아.

그녀를 생각하자마자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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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로나로군.”

그 생각을 하자마자 잠깐 기분이 다시 저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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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달라고 하지?”

옷을 갈아입혀달라고 한 건 무리수였다. 엘리시아가 단추를 풀 때 스치듯이 제 가슴에 닿은 손끝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모르겠는데 뺨을 붉힌 채 제 단추에 집중하며 매달려 있는 엘리시아가 보이는 이상은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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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일레온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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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현실이야.”

그런 악몽 속이 현실이라고 자각하는 그런 꿈은 다시는 꾸고 싶지 않았다.

***

사비엘은 모처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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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어.”

그의 침실에 놓인 우리는 급히 구해온 것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모나게 처리된 자리가 없이 둥글게 곡선을 이루고 있는 디자인은 전체적으로 새장과 비슷했다. 아닌 게 아니라 꼭대기에는 갈고리를 걸어서 천장으로 매달아 올리기라도 할 것처럼 진짜 새장처럼 고리까지 달려 있었다.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들었는지 매끈한 겉면은 전체가 금으로 도금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철제 우리처럼 상스러워 보이지 않고 우아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거기에 우리의 문을 여닫는 잠금쇠 부분에는 보랏빛 자수정을 박아넣어 고상하게 장식까지 되어 있었다.

그런 것을 침실에 들인 황태자의 불순한 의도를 모른다면 그 자체로 귀한 보물처럼 보일 정도의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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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다. 내 후하게 상을 내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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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공합니다. 황태자 전하.”

부관이 머리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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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장에 대한 답은 아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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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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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흠.”

사비엘이 눈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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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하군.”

방문 목적과 시간이 적혀 있지 않은 초대장을 보냈다.

유테르 공작 정도라면 그 뜻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건 왕궁 비사에 얽힌 것으로 흔히 결혼 적령기가 된 황태자나 황제가 마음에 둔 여인을 궁으로 불러들일 때 쓰는 방법이었다.

세라피나 황후는 엘리시아가 태어나자마자부터 그녀를 제 짝으로 점찍었었다. 유테르 공작가 정도의 명문가에서 보기 좋은 터울로 황태자비 감이 태어났으니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혼인에 대해 논의하기도 전에, 아직 약혼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했을 때 엘리시아가 하듄샤로 출가해버렸다.

그 일을 두고두고 황후가 얼마나 아깝고 분해했던가.

그런 어머니의 심경은 사비엘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엘리시아 유테르는 마땅히 제 것이었어야 할 여자였다. 그것을 신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지금은 일레온 클레벤트 그 새끼에게 뺏기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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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내 것에 손을 대려 해?”

전쟁터에서 구르던 놈이 사비엘 그의 꽃밭에 흙발로 마구 들어와 설치는 걸 본 기분이었다.

일레온을 떠올리고 나자 사비엘은 조바심이 났다. 그가 부르자 부관이 바로 침실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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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셨습니까.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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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유테르 공작가에 다녀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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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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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유테르를 끌고 와. 억지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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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황태자 전하. 유테르 공작가는 다섯 주신의 후손인 개국공신 가문입니다. 너무 무리하게 진행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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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명을 거역하는 것이냐!”

사비엘이 짜증스레 소리를 지르자 부관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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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마라. 이 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이 누구인지. 네놈의 가문과 처자식이 누구의 광영을 입게 될지.”

가족을 입에 올리자 부관이 입을 다문 채 얼굴이 희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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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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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야 할 거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부관은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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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리 굼떠서야.”

정말 인재가 귀한 세상이었다.

말을 한 번만 해서는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인가. 꼭 두 번, 세 번씩 말해야 하는지 사비엘은 한숨이 나왔다.

사비엘은 손수 수건을 가져다 금으로 도금된 철창을 닦으며 설레는 시간을 보냈다. 그를 애타게 했던 만큼 보물처럼 꼭꼭 숨겨 둘 생각이었다. 사비엘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그녀를 볼 수 없도록.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우리에 갇힌 엘리시아를 망상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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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

부관이 돌아왔는데 빈손이었다. 그것을 본 사비엘이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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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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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전하.”

부관은 벌써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벌벌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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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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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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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테르 공작저에 가니 저택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엘리시아 영애가 지난밤 가출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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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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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저에서도 사람을 풀어 엘리시아 영애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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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을 해? 그게 말이 되나? 그 여자가 가긴 어딜 가?”

부관은 공작저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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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께서 그런 초대장만 보내시지 않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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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마님께서도 보자마자 쓰러지셨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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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아가씨께서 얼마나 속상하셨으면 집을 나가셨겠어. 그리 귀하고 고운 분께서.」

 
공작저에서는 사실상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이 사비엘 탓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제 주인에게 그대로 고했다간 늘 농담인 듯 진담처럼 자신을 협박할 때마다 꺼내는 처자식과 가문이 박살 나는 게 바로 오늘일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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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기억을 잃으신 탓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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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어버린 게 왜?”

부관은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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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채 저택에서 지내기를 힘들어하셨다고 합니다.”

로리에라던가. 엘리시아 영애를 직접 모셨다는 어린 하녀 한 명이 철철 울면서 그 비슷한 말을 하긴 했으니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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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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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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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뒤를 쫓아라. 분명히 멀리 가지 못했을 테니. 수도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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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받들겠습니다. 전하.”

부관이 물러간 후, 사비엘은 분에 못 이겨 침실 안의 물건을 부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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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술을 가져와!”

사비엘은 독한 술을 잔뜩 마시고 엉망이 된 방 안의 귀한 것들을 박살 내다가, 이미 망가진 것들을 차례차례 또 짓이기는 무익한 짓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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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제 분을 이기지 못해 날뛰다 지쳐 쓰러진 그는 술기운에 기절하듯 잠들었다.

휙.

늦은 밤, 사비엘의 방을 밝히던 촛불이 일순 날아든 한 줄기 바람에 누가 불어 끄기라도 한 듯 동시에 꺼졌다.

스으윽.

가구들이 으슥하게 드리운 그림자 끝이 잡아당긴 것처럼 늘어났다. 곧 그 어둠에서 빠져나오기라도 한 듯 검은 인영이 황태자의 침실에 나타났다.

검은 신관복을 입고 후드를 눌러 쓴 이는 흰 가면을 쓴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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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왔구나. 사비엘.”

남자는 엉망이 된 채 잠들어 있는 사비엘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위에서 이리저리 손을 젓자 마치 사내의 손끝에서 꽃이 피어나듯이 무언가 움트더니 이내 팔락팔락 날갯짓을 하며 공중을 날아다녔다.

그것은 작은 새였다. 칠흑을 떼어내 만든 것처럼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새였다. 새는 남자가 이리저리 손짓하는 대로 팔락거리며 잘도 날아다녔다.

곧 새가 사비엘의 이마에 살며시 내려앉자 남자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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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각인된 역할에 충실하거라.”

황제에게는 ‘신의 대리인’이었던 남자가 잠든 사비엘에게 최면을 걸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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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엘리시아 유테르가 네 것이 될 테니.”

사비엘의 이마에 앉아있던 새가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하다 다시 팔랑팔랑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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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어느새 사비엘은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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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

집요하게 그 이름을 되뇌는 그를 보며 어둠 속으로 스며든 가면 아래에서 흡족한 웃음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

우리 주인님이 달라졌어요.

엘리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예전에 일레온은 무엇이든 그 스스로 해내길 원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계속될 때까지 노력하면서 연습을 하고 또 하며 천천히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늘리는 데 긴 시간을 할애했다.

그뿐 아니라 혼자 하다가 실패하기라도 하면 어찌나 속상해하는지.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달래주느라 진이 빠지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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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감겨줘.”

그렇다 보니 그동안 업무 강도가 그리 높은 게 아니었다.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온종일 일레온의 시중을 들어도 힘에 부친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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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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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요 이틀 사이에 일레온은 온갖 것을 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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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혼자 잘하셨잖아요?”

그걸 또 해주자면 못 해줄 일은 아니었으나, 혼자 해보라고 거절한다면 돌아오는 그의 반응이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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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고 있던 거 아니야. 늘 비누가 남아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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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만져보시면 비눗기가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헹구신다고 하셨잖아요. 제게 검사받으신 적도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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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안 돼서 수건으로 닦고 있었어.”

이런 식으로 ‘실은 잘 했던 게 아니었다’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지면서 도와주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일레온을 욕조 안에 앉혀두고 엘리시아는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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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그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한 일레온이 시무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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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런 것까지 부탁하는 건 좀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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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힘들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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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군.”

일레온이 웃자 너른 대공의 욕실 안에 불이라도 밝힌 것 같았다. 일레온의 웃는 얼굴을 보자마자 엘리시아는 정신 에너지가 회복되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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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우면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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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살살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넣어 문지르니 비누 거품이 인 까만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

제게 머리를 온전히 내어준 채 욕조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일레온은 거꾸로 보아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 드러난 목울대가 그가 숨을 쉴 때 간간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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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아는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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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엘리시아는 스스로를 단호하게 꾸짖었다. 일레온에게 ‘로나’로 대해달라고 말한 게 무색해지지 않나. 무엇 때문에 안되는지는 제가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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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로 마리엘라가 알기라도 하면 머리채를 잡혀 끌려갈지 몰라.’

속 알맹이인 자신은 그녀의 딸이 아닌데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조금 억울하긴 한데, 엘리시아의 몸으로 살고 있으니 이 세계의 신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한숨을 쉬며 일레온의 머리를 헹구어주려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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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물을 붓다 튀었는지 일레온이 손으로 눈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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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죄송해요.”

엘리시아는 얼른 욕조 안으로 들어가 그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수건으로 물이 떨어지는 머리를 감싸며 그를 살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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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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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파요? 별로 물이 튀는 것 같지 않았는데.”

일레온이 눈을 가렸던 손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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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엘리시아 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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