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 유혹과 의혹 (45/151)


45. 유혹과 의혹
2022.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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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엘리시아 하면 안 돼?”

엘리시아는 그대로 굳었다. 다음 순간 뒷목이 굳는 느낌이 나면서 혈압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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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제가 이거 하지 말랬죠?”

그가 이것저것 못하겠다고 어리광부리듯이 매달리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거들어주다 조금만 가까이 가면 식충식물처럼 그녀를 자꾸 끌어안으려 드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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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던 거 아니에요?”

냉정하게 일레온을 밀어내자 그가 불만스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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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는 역시 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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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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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가 무리라고.”

일레온이 처량하게 검지로 욕조 바닥에 알아볼 수 없는 글자를 쓰는 걸 보며 엘리시아는 그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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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말려드릴게요. 일찍 주무세요.”

흐느적거리는 연체동물로 종이 바뀐듯한 일레온이 그녀에게 다시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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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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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시아는 한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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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레온 님은 제가 공작저로 끌려가길 바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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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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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도와주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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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돕지 않았다는 거지? 내 집에 숨겨주고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공작저에서 엘리시아를 찾는 심부름꾼이 찾아왔지만 딱 잘라 모르쇠로 일관하며 돌려보낸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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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 남은 사용인들은 모두 정예라고요. 싹 내보내고 새로 뽑고 싶으신 거예요?”

한 사람이라도 이 꼴을 보면 큰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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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

일레온의 태도가 진지하게 바뀌자 엘리시아는 그제야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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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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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지에 갈래?”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문제에 엘리시아는 눈만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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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벤트 영지에요? 갑자기 거긴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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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주방장이 빵을 잘 만들어.”

엘리시아는 갑자기 수년 늙는 기분이 들었다.

라면 먹고 갈래? 그거였니.

일레온은 작정했는지 목소리를 은근하게 낮추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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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에 고양이도 있어. 내 방 안에. 고양이 보고싶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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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면 저도 있어요.”

응? 고양이?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엘리시아는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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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고양이 타령이야.’

빙의하고 고양이를 본 적도 없는데. 일레온이랑 허튼소리 대결을 하다 보니 이젠 아무 말이 막 튀어나와 문제였다. 하지만 여기서 질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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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앉으세요. 이러다 감기 걸린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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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아파. 살살해. 서비스가 엉망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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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고 고용하신 거 아니잖아요.”

엘리시아는 그러면서 손에 힘을 빼고 조금 전보다 조심조심 일레온의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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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 눈을 떴을 때 네가 내 옆에 없는 게 싫어.”

일레온이 수건을 쥔 손을 감쌌다.

초점을 잃어버린 잿빛 눈동자가 마치 제가 보이기라도 하는 듯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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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있어줘.”

엘리시아는 그에게 약했다.

아마 그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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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혼장을 거절했으니까 자기가 나를 더 좋아하는 줄 알 거야.’

그렇지만 실은 엘리시아가 그를 더 많이, 오래 좋아했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알기 훨씬 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좋아했었으니까.

아주 오래전? 그게 언제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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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짐승의 꽃>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스스로 납득하고 나니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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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레온을 다시 낫게 할 방법은 없는 걸까?’

10년에 한 번 피는 영약이 다시 피어나려면 정말로 10년 뒤이려나. 설정 구멍으로 적당히 내일이나, 아님 모레, 이번 주 말쯤 하나 더 꽃이 피는 일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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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때 머릿속에 커다랗고 두꺼운 책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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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무슨 기억이지?’

원윤지는 <눈먼 짐승의 꽃>을 휴대전화 앱으로 읽었다. 그러니 그런 책이 떠오른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어느 땐가부터 자연스럽게 원작을 생각하면 실존하는 책처럼 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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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을 수가 없잖아.’

만약에 있다 해도 카리나가 눈을 고쳐준 후 둘이 함께 모험하며 일레온이 황위에 오르게 되는 엔딩까지 가는 이야기인데, 두 번째 실명에 대처하는 요령이 나와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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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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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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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답답하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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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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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요?”

일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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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누군가 저택을 감시하려 할지 모르니. 산책은 당분간 밤에만 해야겠군.”

엘리시아도 궁금한 게 있는 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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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준비하고 올게요.”

사실 산책을 하려면 머리를 감고 씻기 전에 했어야 했는데.

내내 그의 눈을 낫게 한 풀이 돋았던 자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일레온이 너무 철통 마크를 해서 저택 밖으로 이틀 동안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미 곱게 말린 머리가 좀 아까웠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

유테르 공작저는 밤을 잊었다.

해가 넘어가고 온전히 달이 뜬 후에도 공작저 주변이 불야성을 이룰 듯 온통 환히 불을 밝힌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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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흑. 엘리시아.”

침대에 누워 흐느끼는 아내를 보며 질리언은 어쩔 줄 몰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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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돌아올 거요. 그 애가 어디를 가겠소. 기억도 없는 아이인데.”

남편의 위로에 마리엘라는 발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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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없는 아이인데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면서 반년 넘게 살아 있었죠. 하듄샤에서 곱게 자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질리언은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아내의 화만 키운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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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쉬도록 하시오. 엘리시아는 내가 계속 찾아볼 터이니.”

질리언이 나간 후에도 마리엘라는 울면서 가슴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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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사실대로 말했어야 했어.”

모든 것을 엘리시아에게 털어놓기에는 시기상조였다.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 견디기 힘들어하면서 집을 나가버릴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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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고분고분하게 따르려는 줄로 알았는데.”

일레온의 구혼장을 거절한 후로 엘리시아는 조용해졌다.

조용해졌달까, 의욕이 없어 보였다.

일레온은 왜 안 되냐고 제게 대들 듯이 따질 때의 격렬한 기세에 비하면 차라리 낫다고 여겼다.

어쨌든 그녀는 제가 시키고 바라는 일들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편지 한 통, 쪽지 한 조각 남겨두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태로 엘리시아가 사라진 후에야 깨달았다.

그 애는 괜찮아서 그리 지냈던 게 아니었다. 이해도, 납득도 하지 못했지만 불길한 검은 불꽃의 강제력에 잠시 겁을 집어먹은 것뿐이었다.

그렇게 웅크리고 있다가, 힘을 모으고 있다가 마리엘라 그녀가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방심한 순간 집을 나가버렸다.

마치 그동안 마리엘라가 공들여온, 엘리시아를 살리고 도피시키기 위해 준비한 모든 것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리엘라는 허망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엘리시아를 찾아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제부터 어째야 할지 더 큰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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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시간이 흘러서 사비엘의 집착만 더 키웠어.’

황태자가 엘리시아에 대해 잊어주길 바랐다. 세라피나 황후가 끈덕지게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노는 걸 좋아하고 여자와 유흥에 관심이 많다던 그가 신전에 틀어박힌 제 딸에 대해선 잊길 바랐다.

그랬는데 사비엘이 제집 정원에서 티테이블에 끼어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리엘라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원수를 꼭 그런 곳에서 마주쳐야 했을까.

외나무다리나, 또는 막다른 곳에서.

그런 핀치의 순간 원수를 마주치면 둘 중 하나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건 대자연의 이치였다.

마리엘라가 덧없는 후회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훅.

일순 불어온 바람이 침실 안의 촛불을 꺼트렸다.

스으으.

방 안에 드리운 그림자로부터 검은 그림자가 몸을 세로로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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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잘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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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텍.”

여상하게 인사를 건네는 흰 가면을 쓴 사내를 보고 마리엘라가 치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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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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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 내가 가지 못할 곳이 있을까.”

소매와 치맛자락이 넓은 신관복을 툭툭 털며 소나텍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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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시작의 때를 맞이한 소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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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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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벼르고 기다렸던 때가 아닌가?”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흰 가면 위로도 숨길 수 없는 조롱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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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아끼는 딸을 말이지. 지키려고 고군분투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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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

마리엘라가 욕을 하자 소나텍이 그녀를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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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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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냐고?”

가면 안쪽에 숨겨져 있던 검은 눈동자가 마리엘라를 쏘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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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고통받길 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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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흑.”

마리엘라가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자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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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살리고 싶다면 이제라도 빌어보는 게…….”

퍼억.

방문이 열리는 동시에 질리언의 검이 남자의 몸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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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피하려고 했는데 늦었……네…….”

다음 순간 남자의 몸이 회색으로 변하더니 쩌적 금이 가며 무너져내렸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풍화하기라도 한 것처럼 모래로 변해 산산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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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소? 마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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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에.”

질리언은 흐느끼는 아내를 끌어안았다.

절망이 흐르는 긴 밤의 시작이었다.

***

엘리시아와 함께하는 밤 산책은 오랜만이었다.

일할 때와 달리 길게 늘어뜨린 금빛 머리카락이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그녀가 걸을 때마다 부드럽게 물결치며 흔들렸다.

곱고 예쁜 것을 감상하자 일레온의 마음이 차차 너그러워졌다.

제게 다른 영애를 소개하려던 그녀가, 구혼장을 거절한 그녀가, 안 될 사이이니 다신 보지 말자던 그녀가.

그의 마음에 파란을 일으키던 말들이 모두 멀어지고 손을 대면 부드럽게 손가락에 감기는 블론드의 머리카락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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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은 오랜만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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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없는 동안은 산책 안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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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움직임이 부족하니 건강을 위해 했던 셈인데 매일 유테르의 낙원을 거닐었더니 따로 운동이 필요하지 않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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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랬겠어요. 저도 사실 정원에서 차를 마시다가 저택으로 돌아가는데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쉰 적이 있었어요. 그때 말이에요. 제가 흙에 앉아있다가 부끄러워했었는데. 기억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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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군.”

빨간 카멜리아의 카펫 위로 커다란 흰 꽃이 피어 있었다. 장식이 적은 흰 드레스를 입은 엘리시아는 얼마나 청초하고 아름다웠는지, 기분이 상해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풀리는 기이한 경험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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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좀 창피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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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창피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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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공작가 영애가 흙바닥에 그렇게 앉아 있는 건 좀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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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그대가 내게 다른 영애를 소개하려 한 점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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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일레온은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걸 참았다. 아무리 사유지 저택의 뒤뜰이라지만 밤에 내는 소리는 멀리까지 닿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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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저건 대체 무슨 짓이지?’

엘리시아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슬슬 걷는 그로부터 몇 걸음 앞으로 후다닥 앞서가더니 덤불이 엉망으로 자라있는 곳의 아래에 무릎을 꿇고 뭔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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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로나.”

그 모습에 당황스러워서 일레온은 그녀를 하마터면 엘리시아라고 부를 뻔했다. 그는 가까스로 엘리시아를 못 본 척 자연스레 그녀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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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 어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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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 여기에 있어요.”

그가 찾자 덤불에서 몸을 일으킨 여자가 얼른 다가와 팔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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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서 불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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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뭘 좀 떨어뜨려서 찾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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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떨어뜨렸다고? 그게 무엇이지?”

엘리시아가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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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행운의 동전 그런 거예요.”

저건 분명히 거짓말이다. 확실했다. 그렇지만 아는 척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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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으면 사람들을 시켜서 찾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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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역시 예상대로 엘리시아는 펄쩍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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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실 것 없어요. 저도 혹시나 해서 찾는 것뿐인데요.”

이 밤에 덤불 앞에 무릎까지 꿇고 머리에 마른 낙엽까지 붙여가며 찾던 것 치고 시시한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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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았다.”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야 엘리시아가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또 그때부터는 뭔가가 견딜 수 없게 신경이 쓰이는지 아까 그 덤불 방향을 자꾸만 돌아보기 시작했다.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보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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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뭔가 감추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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