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짐승의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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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짐승의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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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짐승의 본능
2022.06.18.
“보여.”
엘리시아가 멍하니 그를 응시하자 일레온이 그녀의 머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일레온의 손끝에 잡혀가는 하얀 아카시아 꽃잎을 보며 엘리시아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보인다니 그게 무슨 말이…… 어, 어.”
그 서슬에 불안정하게 요동친 야트막한 배 너머로 순식간에 엘리시아의 몸이 기울었다.
풍덩.
“엘리시아!”
찰박거리는 물소리에 일레온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묻히며 멀어졌다.
엘리시아는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가라앉았다.
‘윽.’
햇빛을 반사할 때 따스하고 잔잔해 보였던 강물은 물 아래 거센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
‘으읍. 큭!’
큰 숨을 들이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물에 빠진 탓에 금방 숨이 막혔다. 엘리시아는 수면을 향해 팔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몸은 물 아래로 점점 끌려들어 갔다. 다리를 움직여보려 했지만 치렁하고 겹겹이 둘러 입은 드레스 자락이 푹 젖어 다리에 묵직하게 감겨왔다.
‘사, 살려줘…….’
코와 입으로 숨 대신 밀고 들어오는 물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차가운 물 속에서 뜨끈한 눈물이 눈 밖으로 밀려나는 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일레온!’
그가 점점 가라앉는 자신을 향해 헤엄쳐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일레온…….’
나 너무 무서워. 빨리 구해달라고 엘리시아는 아직 잡히지 않는 그를 향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렇게 간절히 그를 바라볼 때였다.
자신을 향해 수중 생물이라도 된 것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던 남자의 눈동자가 박리시키기라도 한 듯 너덜거렸다. 순간적으로 눈동자가 두 개가 된 것처럼 보였다.
‘아…….’
초점을 흐릿하게 한 채 회색을 띠던 눈동자가 물살에 벗겨진 듯 떨어져 나갔다.
그 자리에 보인 건 붉은 빛.
점점 수면에서 멀어져 어두워지는 물 아래에서도 생명의 근원인 핏방울처럼 선명하게 보이는 빨간 눈동자.
오데르의 상징, 그 눈동자였다.
다음 순간 폐가 쥐어짜진 듯 통증이 느껴지며 정신이 흐릿해졌다.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빨간 신호는 멈추라는 뜻인데.’
위험하다는 뜻으로 쓰인다고, 한 번쯤 일레온에게 말해볼 걸 그랬다는 엉뚱한 생각을 끝으로 엘리시아는 의식을 잃었다.
***
마크시스 황제는 황후궁을 향해 걷고 있었다. 도열한 채 황제의 뒤를 따르는 이들을 거느린 그는 위풍당당한 제국의 찬란한 태양, 그 자체였다.
그는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예언서의 ‘말씀’을 전하러 오는 신의 대리인을 맞는 건 심력을 빼앗기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을 지시할 때도 많아서 과연 이것이 다섯 주신이 바라마지 않는 일인지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늘 신의 안배를 한낱 인간인 제가 이해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으로 귀결되는 고민은 언제나 덧없었다.
이번에 마크시스 황제가 신께 기도를 올릴 때 갑작스레 나타난 이가 전한 말은 뜻밖에 황태자의 혼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비엘과 엘리시아라.”
둘 다 결혼하기 적당한 나이에 신분이 쳐지지도 가문의 후광이 모자라지도 않으니 좋은 짝이 될 것이다. 유테르 공작가에 여자아이가 태어나자 세라피나 황후는 뛸 듯이 기뻐했었다. 유테르 공작가라면 황태자비 감으로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정도로 전통 있고 훌륭한 가문이었다.
하지만 뜻밖에 아주 어린 나이의 엘리시아가 하듄샤로 출가해버리자 세라피나 황후는 사비엘의 비로 마음에 차는 레이디가 없다고 난리였다.
“그래. 신의 품에 드는 일도 보통은 아니겠으나, 그 길을 벗어나는 것 역시 사람의 뜻대로 될 것은 아니니.”
오래 신을 섬기기 위해 고된 수련을 했을 엘리시아의 삶을 생각하면 그것을 다행이라 하긴 어렵겠지만, 이 또한 인연이 아닐까 싶었다.
“황후가 기뻐하겠지.”
세라피나 황후가 반길만한 소식에 마크시스 황제는 몸소 황후궁으로 걸음한 차였다.
“황제 폐하. 이런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따로 전갈을 보내지 않고 찾은 터라 세라피나 황후가 놀란 얼굴로 그를 맞았다.
“차는 됐소. 이리 앉으시오.”
“네에.”
세라피나 황후의 얼굴에는 어쩐 일이냐는 기색이 만연했다. 그녀는 마크시스 황제가 주변을 물리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오랜만에 신께서 하문하셨소.”
“다섯 주신께서 말인가요?”
세라피나 황후 역시 황실의 일원. 황제의 동반자인 황후 역시 황좌에 오른 이에게만 전해지는 비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건국 신화를 종교로 섬기는 나라. 죽은 후 신좌에 오른 오데르의 후손이 신의 자식이라는 걸 증명하며 통치하는 나라 콘스탄스 제국.
대대로 황제에게는 신의 말씀을 전하는 이가 나타나곤 했다.
황좌에 오른 자와 그 옆자리에 앉은 황후만이 아는 은밀한 사실이었다.
때로는 기근을 피하도록 해주고, 큰 재난을 막아주기도 했다고 선대 황제로부터 후대로 전해 내려온 고서에 기록이 되어 있었다.
이번 황제의 대에 이르러서는 제국의 명운이 달린 ‘예언서’의 내용을 각별히 전한다며 조금 예전 황제들이 받은 것과는 다른 말씀을 전하고 있어서 곤혹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이것이야말로 오데르의 핏줄과 더불어 제국 황실을 정의하는 정체성일 수도 있었다.
신의 후손이기에 전해 듣는 예언과 말씀들.
세라피나 황후가 황제를 채근했다.
“무슨 말씀이기에 이리 직접 행차하셨습니까?”
“사비엘의 혼사에 대해 말씀하셨소.”
“네? 사, 사비엘의 혼사요?”
“그렇소.”
“아니, 신께서 우리 황태자에게 무슨 말씀을…….”
워낙 희한한 전언도 많았던 탓인지 세라피나 황후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엘리시아 유테르를 황태자비 후보로 삼으라 하셨소.”
“정말이십니까? 폐하?”
“진실로 그리 하문하셨소.”
그제야 황후의 얼굴이 펴졌다.
“세상에. 그리 좋은 말씀을 내려주셨다니. 다섯 주신과 오데르께 감사의 뜻으로 공물이라도 올려야 할 것 같군요.”
세라피나 황후가 기뻐하는 모습에 마크시스 황제도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황후가 바란 탐탁한 혼인 상대가 아니오.”
“물론입니다. 폐하. 마음에 들고 말고요. 공표는 언제 하십니까?”
“유테르 공작과 이야기해서 조율하려 하오. 그나저나…….”
마크시스 황제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레브 황녀가 귀국해야 하지 않겠소.”
“네?”
“황태자가 곧 혼사를 치를 텐데 하나뿐인 황실 어른이 레브 황녀가 아니오.”
“그렇지요.”
“트로팔가라에서는 연락이 그게 끝이었소?”
“예. 폐하.”
세라피나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어디로 가셨는지 추적이 되지 않아 연락이 닿지 않으니 난처합니다.”
“그렇군. 그래도 좀 더 사람을 풀어 찾아보시오. 비용도 내 사재에서 지불할 터이니.”
“뜻 받들겠습니다. 폐하.”
세라피나 황후가 고분하게 대답하자 마크시스 황제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많지도 않은 황실인데.’
늘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레브.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게냐.’
하나뿐인 여동생을 떠올리며 황제는 쓸쓸한 얼굴로 황후궁을 나섰다.
***
탁. 타탁.
수명을 다한 장작이 불꽃을 튀기며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시아는 가늘게 눈을 떴다.
“콜록. 콜록.”
잘게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키자 목이 따가웠다.
“여기는…….”
눈에 익은 천장과 가구. 그녀의 근무처 중 한 곳인 일레온의 침실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머리가 무겁고 멍했다. 몇 번을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자신이 일레온과 강가에 나들이를 갔다가 물에 빠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눈이 멀지 않았어.」
제게서 하얀 꽃잎을 떼어가던 남자.
「보여.」
초점을 잃은 듯하던 잿빛 눈동자의 시선이 제게 꽂히던 순간.
물살에 렌즈가 벗겨지며 드러난 그의 적안을 보며 의식을 잃었던 것이 차례로 기억났다.
‘그럼 그는 일부러 내게 거짓말을…….’
상황을 정리하자 가슴이 먹먹해지며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왜?
어째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행동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반듯하고 공정하고 세상의 모든 부정과 거리가 먼 이였다. 그는 이 세계의 남주였으니까. <눈먼 짐승의 꽃>에서 흠결 하나 없는 존재였던 그가 자신을 속였나 생각하니 믿기지 않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도피하던 이해가 분명히 보았던 붉은 눈동자의 벽에 가로막혔다.
침대에서 일어난 엘리시아는 거실 문 손잡이를 쥐고 망설였다.
침실 안에 그가 없다면, 일과 시간을 주로 보내는 방에 있을 터.
엘리시아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공포의 감각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모르기 때문에 무섭고, 이해할 수 없기에 두려운 것이다.
누구보다 빙의자인 자신이 이 이야기를, 일레온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해진 성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며 일탈한 것 같은 일레온은 엘리시아 예상 밖의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럼 그는 누구일까? 내가 읽었던 그 일레온이 아니라면.
카리나가 아니라 제게 마음이 있다던 남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년이나 수족처럼 붙어있던 그의 모르던 면모는 머릿속에서 금기를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경보를 울려댔다.
어쩐지 등 뒤가 서늘했다. 지금 그를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들어서 엘리시아는 심호흡을 했다.
일레온의 침실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응접실을 겸한 거실로 지나야만 하는 구조였다.
‘애초에 내 방이 아니라 나를 왜 이곳으로 데려다 놓은 거야?’
언제까지나 대공의 침실을 메이드가 차지하고 있을 순 없었다. 시간이 늦으면 어차피 그가 자러 와야 할 테니 말이다.
‘집사님이 부르러 와주시면 좋을 텐데.’
일레온과 둘만 마주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이 방에서 나갈 수 있도록.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드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일레온이 어쨌길래? 그답지 않은 행동을 하긴 했지만, 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주기도 했다. 제게 해를 가한 것도 없는데 금역의 선을 넘을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벌벌거릴 건 뭐란 말인가.
한참을 서성이다 그녀는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찰칵.
엘리시아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제가 머물던 침실에만 난로를 피웠는지 온도 차 탓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방은 불도 켜지 않고 어둑한 채였다. 어둠에 눈이 익자 문을 등지고 놓인 의자에 비스듬하게 그가 기대어 앉은 모습이 보였다.
엘리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 일레온 님.”
“깨어났군. 몸은 좀 어떻지?”
“괘, 괜찮아요.”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고저가 없었다.
“제게 거짓말을 했어요?”
감정이 실리지 않은 투에 기가 눌린 엘리시아는 크게 따지지도 못하고 혼잣말하듯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째서요?”
선뜻 더는 다가가지 못하고 그가 무어라 말해주길 기다릴 때였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텐데.”
일레온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엘리시아는 미시감을 느꼈다.
일레온이 이 방에서 일어서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었는데, 처음 보는 것처럼 그가 낯설고 커 보였다.
“그대는 눈이 멀어야만 곁에 머물러주는군.”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일레온의 눈이 붉게 빛났다.
“일레온 님.”
엘리시아는 멍하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속였다는 사실에 화를 내야 하는데, 강렬한 눈빛으로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일레온을 보고 있자니 입이 틀어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는 나를 미치게 해. 엘리시아.”
쿵쿵.
심장이 불안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불과 며칠 전, 그의 눈이 멀었다는 말에 미친 사람처럼 달려왔던 그 날 밤으로, 혼란했던 감정이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랬는데 어떻게 내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그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공기가 달랐다.
“넌 분명 알고 있었어.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
평소 제가 알던 일레온이 아닌 것처럼 서늘하고 흉흉하게 느껴지는 기운 탓에 눈가가 시릴 정도였다.
“네가 나를 멀리할 것처럼 밀어내고 거절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죽을 것 같았는지.”
성큼.
그가 제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했다.
“모르고 돌아온 거 아니잖아. 엘리시아. 내가 널 어찌할지.”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다가오는 그와 주춤거리며 거리를 벌리던 엘리시아는 몸을 돌려 방에서 복도로 이어진 문을 향해 달음질쳤다.
그것이 먹이사슬 정점에 있는 짐승의 본능을 자극할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아!”
순식간에 엘리시아를 잡아채어 바닥으로 쓰러트린 일레온이 팔 아래 그녀를 가두었다.
붉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네가 스스로 온 거야.”